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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공의 三子이신 문영공(諱 恂)이하 후손들의 모임이다. *문영공(諱 恂) 1258(고종 45)∼1321(충숙왕 8) .8. 24 고려의 문신. 자는 귀후(歸厚), 방경(方慶)의 3子.
1279년(충렬왕5. 22세)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듬해 중시(重試)에서 조간(趙簡)의 방하(榜下)에 2등으로 들어 낭장(郎將)이 되었다. 그 후 학사(學士)로 추천되어 직강(直講)이 되었다. 충렬공이 일본 원정을 나갈때 공도 종군하고자 했으나 충렬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에 공은 몰래 배에 올라 종군하고 돌아왔고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가 되었다. 여러번 밀직부사에 추천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297년 좌부승지(左副丞旨), 이듬해 좌승지(左丞旨)를 거쳐 밀직부사(密直副使)로 있다가 사퇴했으나 같은 해 광정부사·승지·성균 제주(光政副使·丞旨·成均祭酒)를 거쳐, 우승지·보문각 학사·지민조사(右承旨 寶文閣學士 知民曹事)에 이어 삼사좌사(三司 左辭)에 올랐다.
1312년(충선왕4) 중대광상락군(重大匡上洛君)에 봉해졌고, 1321년(충숙왕 8) 판삼사사(判三司事)가 되었다. 그 해 8월 24일 졸하였고 수는 64세이며 시호는 문영(文英)이다. 공은 성품이 관대하고 후덕하였으며 예서(隸書)를 잘 썼다. 만년에는 소리하는 기생들을 키웠으며, 나날을 현악기와 관악기 연주로써 낙을 삼았다. 이런 사적은 고려사 열전(列傳)과 여지승람에 보인다. 익재 이제현이 부인의 묘지를 찬하였는데 동문선(東文選)에 보인다. 1942년 봄에 지석이 구묘지인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 뒷산 언덕에서 발견되어 1943년 봄에 경기도 안양시 관양동 뒷산 간좌(艮坐)에 천봉(遷奉)하였다.
* 문영공 휘 순의 필적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1298년(충렬왕24년 무술)에 세운 <대구 팔공산의 동화사 홍진국사비>,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원나라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 혜인사에 세운 비문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와 1306년 (충렬왕26, 대덕10)에 강원도 회양부(淮陽府) 금강산에 세운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가 있다. 그런데 현재 이 필적은 그 소재를 알지 못하고 있다. (2003. 3. 주회(안) 제공)
<근거문헌>
◈<근역서화징> (1927, 오세창) ◈<신고 한국서예사> (1975, 김기승, 정음사) ◈<元代麗史資料集錄> (1997, 張東翼, 서울대학교출판부)
<문영공 묘소> (08. 4. 13. 묘역 공사 후 4. 24일 촬영)
<묘비석>
<문영공 묘지석-2008. 4. 13. 발굴, 08. 4. 25, 촬영>
<구 묘역 모습>
<문영공 묘소 옛모습>(2002. 6. 3. 발용(군). 제공)
<배위(양천허씨) 영단>
<문영공 재실(永慕齎)>(1988. 8. 항용(제) 제공)
<문영공 묘비석>
<김정묵공(문영공 묘소터 제공자) 묘소-문영공 묘소 좌하에 있음>
<대구 동화사 내 문영공의 유필인 홍진국사비 탁본>
*(현재 비석은 유실됐으며 그 탁본만이 전하고 있음. 사진 左-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 소장된 탁본. 사진 右-<대동금석서>(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영인본. 1932. 99P)에 있는 비문 탁본 내용). (2002. 1. 항용(제) 제공) <각종 문헌의 문영공 관련 기록 내용>(2003. 2. 주회(안) 제공)
(1)<근역서화징>의 기록 내용 성품이 너그럽고 후했으며, 예서에 뛰어났다. 기예인(技藝人)을 두고 날마다 음악으로 소일했다. (고려사) (1298)에 세운 동화사 홍진국존비 비는 김훤이 짓고 밀직승지 김순이 썼으니 대구 팔공산에 있다. (해동금석총목)
(2)<신고한국서예사>에서 "그는 천성이 寬厚하며 隸書를 잘 썼고 聲技를 집에 두고 絲竹으로 낙을 삼았다" 고 그의 서예와 풍류취미를 전하고 있다. (고려사). 그의 書蹟이 대구팔공산의 동화사홍진국사 탑비에 남아있다. 동 비문은 김훤(金小宣)이 지었다 (金石評)
(3)<元代麗史資料集錄>에서 金承用(휘방경의 1남 휘 선의 2남)의 장인인 元瓘(원관)과 관련된 원나라 시대의 기록중에 [高麗國僉議贊成事元公捨大藏經記 (고려국첨의찬성사원공사대장경기)] 는 閔漬(민지,1248-1326)가 撰하고 중대광상락군 金恂이 書幷題하여 元祐元年2月日 한 것으로, 1314년(충숙왕1, 연우1) 2월에 강절행성 항주로에 위치한 고려혜인사 주지 혜복이 건립한 비문이다. ( 典據 : <李者羽 著, 玉 山今) 山惠因高麗華嚴敎寺志>7 )
(4)불교에 관련된 기사 <高麗國大藏移安記 (고려국대장이안기)>에서 閔漬가 撰하고, 봉익대부밀직사부사 判비서寺事문한학사 金恂 書하여 大德 10年 丙午 9月 日 記한 것으로, 1306년 (충렬왕26, 대덕10) 고려인 민지가 찬한 대장경 이안기로서, 그 주된 내용은 1304년 고려에 왔던 원의 승려 鐵山(紹)이 강화도 보문사에서 얻은 대장경 1부를 강서행성 애주로 의춘현의 대앙산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또 劉喜海의 海東金石存攷(고) 26에는 "大德10年9月閔漬撰 金恂書 在江原道淮陽府金剛山" 하여 이 비의 존재를 확인하고 있다. (석각사료신편 26, p19514) (典據 : <周南瑞 編, 천하동문> 전갑집 7>, <사고전서> 총집 (영인본 1366책)의 <천하동문집>7 ) 參考문헌 : 허흥식, 1306년 고려국대장이안기, 고려불교사연구, 일조각, pp706-717,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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