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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개략적인 것을 기록하며, 추후 보완하겠음)
(1)1942년 당시 묘는 처음에 경기도 개풍군 임계면 가정리 마산 뒤 언덕에 장례하였는데 병화(兵火)로 유실 되었다. 다행히 600여년 후인 1942년 지석(誌石)이 발견 되어 다시 사초(莎草)를 하였는데 그 지방 장씨(張氏)들의 방해로 인하여 1943년 봄, 현재의 경기도 안양시 관양1동에 익원공파 16대손인 찬원(讚源)씨가 자신 소유의 임야를 헌납해 줌으로써 이곳으로 옮겨 천봉(遷奉)하였다. 이 때 각파 유사(有司-파대표)로는 제학공파 약호(若浩. 21대손)씨, 안렴사공파 순묵(舜默. 21대손)씨, 익원공파 달연(達演. 22대손)씨로 정해 졌는데, 3파 대표의 결의에 의하여 다음과 같이 천봉에 대한 일을 분담하기로 하였다.
<각 파 분담 및 활동 내용> 가) 제학공파 : 이장(移葬)과 석물(石物) 일체--이장관련 비용을 부담하고 상석과 비석을 세웠는데. 상석이 불결하고 동토가 낫다고 하여 석물을 파손하였다. 다시 그 이듬해(1943년) 상석과 비석, 설단비(設壇碑)를 보수하여 세웠다. (현재 비석의 갓부분 일부와 설단비의 일부분이 파손된 것은 당시 상황을 일부 증명하는 것임) 나) 안렴사공파 : 재실(齋室) 건립. 다) 익원공파 : 종토(宗土) 조성 *위답 구입전 시제 행사관계
(2) 1946년 이후 여러가지 사정으로 원활한 종사활동이 어려웠다. 해방 직후(1946년) 한식 차례(4. 5일)때, 백범 김구 선생께서 중국에서 귀국한 후 이곳 문영공 산소에 참배하러 오셨다. 이 때 많은 종인들이 선생의 귀국 환영을 위해 모였으며, 그 자리에서 선생의 원활한 정치활동을 위한 기금도 모았다. 그러나 선생께서는 '이 돈은 받을 수 없다' 하고 만류하시자, 문영공 종회에서는 회의를 통해 이 기금을 문영공파 종비(宗費)로 이용하기로 하고, 이로써 일부 종답을 더 사들이면서 활성화 되기 시작함.
*서기 1949년 4월 5일 청명일에 안양 문영공(휘 恂:충렬공 3째 아드님) 묘하에서 전국 종친 100여 명이 모여 절사(節祀)를 올리고 기념촬영. (전열 뒤로 3열 중앙에 검은 두루마기에 안경을 쓰고 머리를 약간 右로 갸우뚱하고 있는 분이 백범 김구 선생)
(3) 계속 보완중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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