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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판돈녕부사 김구덕(金九德)의 졸기(卒記) (2003. 10. 8. 윤만(문) 제공) ≪출전 : 세종실록 39권 세종10년 3월10(임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 부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2) <안정공 관련 자료 종합> (2005. 5. 3. 영환(문) 제공) (1) 판돈녕 김구덕에게 내린 제문 (세종 040 10/04#16(정유)) 출전 : 조선왕조실록 판돈녕 김구덕에게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에 말하기를, “신하로서 충성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니, 국가가 그를 포창하고 높여 주는 은전(恩典)은 마땅히 영광과 애도의 뜻을 겸비해야 할 것이로다. 경은 도량이 너그럽고 품행이 방정하며, 타고난 자질이 순후하며 온화하고 의젓하였도다.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으로서 여러 임금의 조정에서 문무 백관들의 의표(儀表)가 되었도다. 정사에 참예하여 강령을 잡으니 시책(施策)에 불가(不可)한 것이 없었으며, 목민관과 관찰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성망(聲望)이 있었도다. 가문(家門)은 동관(쪐管)의 상서(祥瑞)를 열어 일표(日表)의 은혜를 입었으며, 자손이 산초나무 씨처럼 번성하는 경사가 넘쳐서 춘궁(春宮)의 배필도 나왔도다. 진실로 대대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적덕(積德)이 그 몸에 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나라와 더불어 영세(永世)토록 아름다움을 같이할 수 있었겠는가. 전번에 판돈녕의 직임을 주어 친애하고 존경하는 뜻을 표시하고, 백세의 장수(長壽)를 누리어 길이 자손들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받기 바랐더니, 어찌 생각지도 아니하여 갑작스리 서거하였는가. 부고를 듣자 곧 조휼(弔恤)의 예제를 갖추고 이미 은혜를 절도있게 하여 시호(諡號)를 내리고, 또 치전(致奠)하여 애도(哀悼)의 정(情)을 표시하노라. 아아,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비록 꼭 이르는 이수(理數)이기는 하나, 임금과 신하의 은의(恩義)와 예절이야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하여 다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전】 3 집 129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2) 춘정 변계량의 차김참지구덕봉사시운(次金參知 九德 奉使詩韻 ) 출전 : 춘정집 제3권
시(詩)
차김참지 구덕 봉사시운 次金參知 九德 奉使詩韻 명 시대 소년이 사명 띠고 나가니 / 少年觀國際文明 전별의 그 시가 구절마다 청아하네 / 贈別新詩句句淸 우습게도 병들어서 두문불출하던 나도 / 自笑病夫甘閉戶 호기 생겨 필단을 마음대로 휘둘렀네 / 筆端豪氣?縱橫
*변계량(卞季良) 1369(공민왕 18)∼1430(세종 12). 조선시대 초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거경(巨卿), 호는 춘정(春亭). 검교판중추원사(檢校判中樞院事) 옥란(玉蘭)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제위보부사(濟危寶副使) 조석(曺碩)의 딸이다.
이색(李穡)·권근(權近)의 문인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네살에 고시의 대구를 외우고 여섯살에 글을 지었다. 1382년(우왕 8) 진사시에 급제하고, 이듬해 생원시에도 급제하였으며, 1385년 문과에 급제하여 전교주부(典校主簿)·
비순위정용랑장(備巡衛精勇郎將)겸 진덕박사(進德博士)가 되었다. 1392년 조선왕조의 건국과 더불어 천우위중랑장(千牛衛中郎將)겸 전의감승(典醫監丞)이 되었으며, 의학교수관(醫學敎授官)을 거쳐 1396년(태조 4)에는 교서감승(校書監丞)에 지제교(知製敎)를 겸하였다. 태종초에는 성균관악정, 사제감소감 겸 예문관응교와 직제학을 역임하였으며, 1407년(태종 7) 문과중시에 을과 제1인으로 뽑혀 당상관에 오르고 예조우참의(禮曹右參議)가 되었다. 이듬해 세자좌보덕(世子左輔德)이 되고, 그뒤 예문관제학·춘추관동지사 겸 내섬시판사·경연동지사 등을 거쳐, 1415년 세자우부빈객이 되었다. 이때 가뭄이 심하여 상왕이 크게 근심하므로 하늘에 제사하는 것이 예는 아니나 상황이 절박하니 원단(圓壇)에 빌기를 청하여 태종이 그에게 제문을 짓게 하고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을 보내 제사드리게 하니 과연 큰비가 내리었다. 그뒤 태종말까지 수문전제학·좌부빈객·예문관대제학 겸 성균관대사성·우빈객·예조판서·경연지사·춘추관지사·의정부참찬 등을 역임하였다. 1420년(세종 2) 집현전이 설치된 뒤 그 대제학이 되었고, 1426년에 우군도총제부판사(右軍都摠制府判事)가 되었다. 특히 문장에 뛰어나 거의 20년간 대제학을 맡아 외교문서를 작성하였으며, 과거의 시관으로 선비를 뽑는 일에 지극히
공정을 기하여 고려말의 폐단을 개혁하였다. 그러나 대제학으로서 귀신과 부처를 섬겨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하여 주위로부터 ‘살기를 탐내고, 죽기를 두려워 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고려말과 조선 초기의 정도전(鄭道傳)·권근으로 이어지는 관인문학가의 대표적인 인물로서 〈화산별곡 華山別曲〉·〈태행태상왕시책문 太行太上王諡冊文〉을 지어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였다. 저서로는 《춘정집》 3권 5책이 있다. 《태조실록》의 편찬과 《고려사》 개수(改修)에 참여하였고 기자묘(箕子墓)의 비문과 〈낙천정기 樂天亭記〉·〈헌릉지문 獻陵誌文〉을 찬하였다. 《청구영언》에 시조 2수가 전한다. 거창의 병암서원(屛巖書院)에 제향되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3)국조인물지에서 2005. 8. 21. 윤식(문) 제공) (4) 왕조실록 기록 내용 *《 태조 005 03/01/13(계축) / 사헌부에서 금주를 과도하게 단속하니 완화하도록 명하다 》 헌사(憲司)에서 금주(禁酒)하기를 지나치게 엄하게 하니, 임금이 장무(掌務)인 잡단(雜端) 김구덕(金九德)을 불러 명령하였다. “무릇 사람으로서 병이 있는 자는 혹 술을 약으로 마시게 되는데, 개괄(槪括)하여 범령(犯令)으로써 죄를 가하는 일이 옳겠는가? 대저 금주(禁酒)는 잔치를 베풀어 술을 마시어 몹시 취하지 못하게 할 뿐인 것이다.”
【원전】 1 집 53 면 【분류】 *사법-법제(法制)
*《 태조 009 05/05/06(임술) / 유원정 집 여종을 갑사 이부개가 희롱하다 압사시킨 데 대한 판결이 공정치 못했다 하여 형조 전서를 가두다 》
형조 전서 문계종(文繼宗)과 의랑(議郞) 김구덕(金九德) 등을 순군옥(巡軍獄)에 하옥시켰다. 서성군(瑞城君) 유원정(柳爰廷)의 집종[家婢]이 길에서 나무를 운반하는 갑사(甲士)들을 만났는데, 이부개(李夫介)란 자가 종[婢]과 희롱하다가 종이 수레에 눌려 죽었다. 형조에서 이부개를 가두고 소매전(燒埋錢)과 종의 몸값[婢價]까지 징수하고는 매를 치려 하니, 임금이 이를 듣고, “법관이 죄를 논의하는데 공정하지 못했다.” 하여, 이런 명령이 있었으나, 얼마 아니 되어 출옥시켰다.
【원전】 1 집 91 면 【분류】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사법(司法)
*《 정종 005 02/08/04(병 신) / 최이·서유·맹사성·박습 등에게 관직을 주다 》
최이(崔칀)로 겸 대사헌(兼大司憲)을, 서유(徐愈)·맹사성(孟思誠)으로 좌산기(左散騎)·우산기(右散騎)를, 박습(朴習)·이은(李垠)으로 좌간의(左諫議)·우간의(右諫議)를, 김구덕(金九德)으로 중승(中丞)을 삼고, 대성(臺省)·형조를 모두 좌천하여, 좌산기 상시(左散騎常侍) 박은(朴?)은 충주 목사(忠州牧使)를, 중승(中丞) 안성(安省)은 보주사(甫州事)를,형조 전서(刑曹典書) 여칭(呂稱)은 청주 목사(淸州牧使)를, 시사(侍史) 전이(田理)는 김해 부사(金海府使)를, 잡단(雜端) 박헌(朴軒)은 낙안 군사(樂安郡事)를 삼았다.
【원전】 1 집 18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정종 006 02/11/01(신유) / 참판삼군부사 최운해를 음죽, 예문관 학사 송제대를 배주에 귀양보내다 》
참판삼군부사(參判三軍府事) 최운해(崔雲海)를 음죽(陰竹)에, 예문관 학사(藝文館學士) 송제대(宋齊岱)를 배주(白州)에 귀양보냈다. 처음에 최운해와 송제대가 남경(南京)으로부터 서원군(瑞原郡)에 와서 자는데, 군수 박희무(朴希茂)가 근수(根隨)하는 사람을 먹이지 않았었다. 최운해 등이 노하여 박희무를 구타하였다. 박희무가 곧 헌사(憲司)에 고하니, 헌사에서 상서(上書)하여 죄주기를 청해 말하기를,
“최운해와 송제대가 임의로 수령을 구타하였는데, 송제대는 오히려 불가한 것을 알고 마침내는 스스로 금지하였으니, 그 경중에 따라 죄주소서.”하였다. 최운해는 파직하고 송제대는 용서하였다. 문하부(門下府)에서 대사헌 정구(鄭矩)·중승(中丞) 김구덕(金九德)·시사(侍史) 안등(安騰)·잡단(雜端) 이계공(李季拱)이 최운해·송제대 등의 죄상을 논청(論請)한 것이 불공평하다고 하여 탄핵하고, 드디어 죄주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전자에 헌사(憲司)에서 두 사람의 죄상을 논한 것이 송제대가 조금 경하기 때문에, 다만 최운해만 파직한 것이다.” 하였다. 이에 낭사(郞舍) 등이 정구 등의 법을 굽혀 공정치 못하게 한 죄를 탄핵하였다. 송제대는 좌정승 민제(閔霽)의 처형이었으나, 대궐에 나아가 상언(上言)하였다.
“최운해·송제대가 함께 의논하여 수령을 구타하였으니 그 죄가 동일한데, 지금 헌사(憲司) 정구(鄭矩) 등이 그 죄를 논청하는 데 사곡(邪曲)하게 경중을 나누었으니, 뜻이 실로 공정치 못합니다. 신 등은 이런 까닭으로 헌사의 관원을 탄핵한 것입니다. 원하건대, 최운해 등을 율에 의하여 죄를 처단하소서.” 임금이 이에 귀양보냈다. 세자가 듣고 탄식하였다.
“낭사(郞舍)에 사람이 있구나! 이 일이 대단히 정대(正大)하다. 송제대는 나에게 인친(姻親)이고, 좌정승의 처형이다. 헌사에서 이 때문에 그 죄를 경하게 한 것은 잘못이다. 최운해는 용맹한 장수이다. 만일 불우의 변이 있으면 마땅히 어모(禦侮)를 하여야 할 터인데도, 지금 밖으로 폄출(貶黜)하였는데, 어찌 가볍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송제대 같은 자는 비록 바다의 섬에 귀양보내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다.”
【원전】 1 집 185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정론(政論) / *인물(人物)
*《 정종 006 02/11/13(계유) / 주상을 높여 상왕이라 하고, 상왕의 거처를 공안부, 중궁의 거처를 인녕부라 하다 》
주상(主上)을 높여 상왕(上王)을 삼고, 부(府)를 세워 ‘공안부(恭安府)’라 하고, 중궁(中宮)의 부(府)를 ‘인녕부(仁寧府)’라 하였다. 민제(閔霽)로 여흥백(驪興伯)을, 김사형(金士衡)으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를, 이거이(李居易)로 문하(門下) 좌정승을, 조박(趙璞)으로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정구(鄭矩)로 대사헌을, 이백강(李伯剛)으로 청평군(淸平君)을, 김수(金需)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이내(李來)로 예문 학사(藝文學士)를, 맹사성(孟思誠)으로 좌산기(左散騎)를, 김구덕(金九德)으로 중승(中丞)을 삼았다. 밤 2경에 추동(楸洞) 본궁(本宮)으로 돌아왔다.
【원전】 1 집 186 면 【분류】 *왕실-국왕(國王) / *인사-임면(任免)
*《 정종 006 02/12/01(신묘) / 문하부의 상소로 분경을 금하지 않은 대사헌 정구, 중승 김구덕 등을 파직하다 》
대사헌 정구(鄭矩)·중승(中丞) 김구덕(金九德) 등을 파직하였다. 낭사(郞舍) 서유(徐愈) 등이 상소하여 대사헌 정구 등의 죄를 청하였다.
“인주(人主)는 위에서 법을 만들고, 신하는 아래에서 법을 지킨 연후에, 기강이 문란하지 아니하고 위 아래가 서로 편안할 것입니다. 엎드려 보건대, 고려 말년에 정사가 권신(權臣)에게 있어 분경(奔競)하는 것이 풍습을 이루어, 용사(用舍)가 거꾸로 되었는데, 성조(盛朝)에 이르러서도 백성의 풍속과 선비의 습관이 오히려 완전히 고쳐지지 못하였습니다. 신 등이 즉위하시던 처음에 상소하여 헌사(憲司)로 하여금 분경(奔競)을 금하여 선비의 풍습을 바로잡기를 청해서 곧 유윤을 받고, 이미 헌사(憲司)에 이문(移文)하였습니다. 지금 재상(宰相) 백집사(百執事)가 공공연하게 분주(奔走)하여 권문(權門)에 모이는데, 대사헌 정구·중승 김구덕·시사 안등(安騰)·잡단 이계공(李季拱) 등이 곧 금지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장차 분경을 더욱 치열하게 하고, 권병(權柄)을 아래에 옮기게 하는 것입니다. 정구 등이 일찍이 이것을 생각지 않고 이루어진 법을 준수하지 않으니, 교지(敎旨)를 폐각(廢閣)한 것이 죄가 너무나 큽니다. 원하건대, 정구 등은 그 직첩을 거두어 멀리 외방에 귀양보내고, 충직(忠直)하고 강직(剛直)하여 세력에 굴하지 않는 자를 택해서 헌사(憲司)에 충당하여 기강을 진작하소서.”
임금이 좌우에게 말하기를,
“전일에 성랑(省郞)이 정구 등의 죄를 청하기에 내가 다만 파직만 시켰는데, 다시 생각하니 헌사가 직책을 받들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문하부(門下府)에서 수교(受敎)하여 이문(移文)하였으니 헌사로서는 마땅히 빨리 영을 내어 분경을 금하였어야 할 것인데, 머물러 두고 행하지 않았으니 죄를 받는 것이 마땅하다. 무릇 일은 마음을 공평하게 가지고 보면 곡직(曲直)을 알 수 있다. 성랑(省郞)의 아뢴 바가 말이 순하고 이치가 바르니 듣지 않을 수 없다.”
【원전】 1 집 188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인사(人事) / *역사(歷史)
*《 태종 005 03/01/03(신사) / 상왕전의 내관 박영문을 그의 고향으로 내치다 》
박영문(朴英文)을 그의 시골로 내쳤다. 영문은 상왕전(上王殿)의 내관(內官)인데, 대간(臺諫)과 형조(刑曹)가 순위부(巡?府)에 잡좌(雜坐)하여 국문(鞫問)하니, 말이 상왕(上王)에 관련되었기 때문이었다. 사간원에서 영문의 죄를 청하니, 임금이 지사간(知司諫) 김구덕(金九德)에게 명하기를, “내가 영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아니라 부득이한 것이다.” 하였다. 구덕이 말하기를, “만일 죄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악한 사람을 징계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그 죄를 이름 지어 사실로 할 수 없기 때문에 시골로 내친 것이니, 거론하지 말라.”
【원전】 1 집 254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사법-탄핵(彈劾)
*《 태종 005 03/05/16(임진) / 사간원 지사 김구덕을 함부로 가둔 호군 이봉을 하옥하다 》
순관(巡官)인 호군(護軍) 이봉(李奉)을 옥에 가두었다.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 김구덕(金九德)이 일찍 대궐로 나오는데, 봉(奉)이 붙잡아 가두었다. 우사간 대부(右司諫大夫) 구종지(具宗之) 등이 대궐에 나와 아뢰기를, “김구덕이 하례(賀禮)로 인하여 일찍 대궐로 나오는데, 이봉이 살피지 않고 함부로 가두었습니다.” 하였으므로, 명하여 구덕을 석방시키고 봉을 가두었다.
【원전】 1 집 265 면 【분류】 *사법-행형(行刑)
*《 태종 012 06/09/08(갑자) / 경차관을 보내 경기·풍해·강원도의 전지를 다시 측량하다 》
경차관(敬差官) 김구덕(金九德) 등 60여 명을 나누어 보내어 다시 전지(田地)를 측량하게 하였다. 경기(京畿)·풍해(?海)·강원도(江原道)에 모두 측량을 마치라고 명하니, 의정부에서 그 경계(經界)가 바르지 못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원전】 1 집 37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농업-양전(量田)
*《 태종 022 11/10/03(신묘) / 임금이 친히 종묘에 향사하다 》
종묘(宗廟)에 친히 향사하였다. 하루 전에 임금은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법가(法駕)를 타고 왕세자와 백관을 거느리고 종묘에 나가 알묘례(謁廟禮)를 행하고, 재궁(齋宮)으로 돌아왔다. 종헌관(終獻官)인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하윤(河崙)은 여러 집사(執事)와 묘정(廟廷)에서 의식을 연습하였다. 임금이 풍악 소리를 듣고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집례(執禮) 예조 참의(禮曹參議)허조(許稠)에게 명하였다.
“묘정에서 습례(習禮)하는 것은 불경(不敬)한 것이 가까운 것으로 어느 시대에 시작 하였는지 매우 미편하게 여긴다. 또 전작(奠酌)한 뒤에 절이 없고 지게문[戶]의 내외(內外)에서 읍(揖)이 없으니, 너무 간략하지 않은가?” 허조가 대답하였다.
“묘정에서 습례하는 것은 신 등도 또한 미편하게 여기나, 전조(前朝)부터 국초에 이르기까지 으레 하는 일로 여기고 있고, 전작(奠爵)한 뒤에 절이 없고 지게문[戶] 내외에서 읍이 없는 것은 하윤의 헌서(獻書)로 인하여 한결같이 경인년 부묘(쯊廟)의 예에 의하였기 때문에, 신 등이 비록 미편하게 여기나 감히 고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제사가 끝나자 임금이 말하였다.
“이번 행한 향사(享祀)에 여러 집사(執事)가 각각 성경(誠敬)을 다하여 예의(禮儀)가 어그러지지 않았고, 또 일기가 맑아서 나는 아주 기쁘다. 그러나, 친히 종묘(宗廟)에 향사하는 것은 인군의 상사(常事)이니, 향관(享官)을 제수하면 후세에 법이 될까 두렵기 때문에 내가 하지 않았다.”
하윤에게 안마(鞍馬)를, 봉조관(奉俎官) 김승주(金承켼), 찬례(贊禮) 안성(安省), 집례(執禮) 허조(許稠)·탁신(卓愼), 판통례(判通禮) 김구덕(金九德)·변이(邊?)및 여러 대언(代言)에게 구마(廐馬)를 각각 한 필씩 주고, 의정부·육조 판서, 여러 종친을 불러 광연루(廣延樓)에서 잔치를 베풀어 지극히 즐기었다. 임금이 김여지와 박신에게 이르기를,
“친히 강신(降神)하는 예가 십분 즐겁고 기쁘나, 다만 궁중에 마음 편찮은 일이 있다.” 하였으니, 대개 중궁이 서로 화합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었다. 김여지 등이 대답하였다. “전하만 기쁜 것이 아니라, 무릇 분주(奔走)하게 일을 돕는 자로서 누가 감히 기뻐 하지 않겠습니까?”
【원전】 1 집 604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왕실-사급(賜給)
* 태종 022 11/10/27(을묘) / 김구덕의 딸을 빈으로 삼고 노귀산과 김점의 딸을 잉으로 삼다 》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김구덕(金九德)의 딸을 맞아 빈(嬪)을 삼고, 전 제학(提學) 노귀산(盧龜山)의 딸과 전 지성주사(知成州事) 김점(金漸)의 딸을 맞아 두 잉(칑)으로 삼았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가례(嘉禮) 때에 나이 어린 시녀(侍女)를 남장(男裝)을 해서 입히고, 또 털이 있는 호립(胡笠)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실로 원조(元朝) 공주(公主) 때의 남은 제도입니다. 지금 원(元)나라 조정의 구제도를 모두 다 고치었는데, 이것만 아직 남아 있으니, 준수할 것이 아닙니다. 모(帽)가 없고 형체가 작은 청초 여립(靑쿑女笠)을 사용하게 하소서.”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또 명하기를, “가례 날 시녀의 복색은 풍속을 따르게 하라.” 하였다.
【원전】 1 집 607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의생활(衣生活) / *역사-고사(故事)
*《 태종 022 11/11/20(정축) / 김씨를 명빈으로, 노씨를 소혜 궁주로, 김씨를 숙공 궁주로 책봉하다 》
김씨(金氏)를 봉하여, 명빈(明嬪)을 삼고, 노씨(盧氏)는 소혜 궁주(昭惠宮主)를, 김씨(金氏)는 숙공 궁주(淑恭宮主)를 삼았다. 임금이 김구덕(金九德)에게 벼슬을 제수하고자 하여 지신사(知申事) 김여지(金汝知) 등에게 이르기를,
“판각(判閣)이나 근시(近侍)의 벼슬은 빈(嬪)의 아비로 시킬 수 없을까?” 하니, 대답하였다. “전례(前例)로는 마땅히 군(君)을 봉하여야 합니다.” 임금이 말하였다. “옛적에 한(漢)나라에서 유씨(劉氏)가 아니면 왕이 되지 못하였으니, 이것이 비록 사정(事情)은 다르나, 군(君)을 봉할 수 없고, 또 후세에 예(例)로 삼으면 불가하다.” 임금이 말하였다. “천자(天子)가 황후(皇后)에게 제후(諸侯)가 부인(夫人)에게 천지(天地) 일월(日月) 같아서 높고 낮은 것이 등급이 있는데, 예전 사람이 말하기를, ‘남편이 아내에게 굴한다.’ 하였으니, 만일 헌수(獻酬) 기거(起居)를 예(禮)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할 것인가?” 예조 참의(禮曹參議) 허조(許稠)가 대답하였다. “경적(經籍)에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남편은 아내의 벼리[綱]가 되는데, 어떻게 항례(抗禮)할 수가 있겠습니까?”
【원전】 1 집 610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역사-고사(故事)
*《 태종 022 11/12#07(계해) / 하구·노귀산·김구덕·한옹·김점·맹사성·탁신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하구(河久)·노귀산(盧龜山)을 좌군 총제(左軍摠制)로, 김구덕(金九德)을 우군 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로, 한옹(韓雍)을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김점(金漸)을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맹사성(孟思誠)을 판충주목사(判忠州牧事)로, 탁신(卓愼)을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삼았다. 처음에 하구를 도총제로 삼았는데, 하구의 아비 하윤이 상언하였다.
“도총제는 늙은 장수의 직책인데, 하구가 나이 젊고 아는 것이 없으니, 이 직책에 합당치 않습니다.” 임금이 다시 하구를 총제로 삼았으니, 하윤의 청을 따른 것이다. 예조에서 아뢰었다.
“관습 도감 제조(慣習都監提調) 맹사성(孟思誠)은 음률에 정(精)하여 거의 선왕(先王)의 음악을 회복할 수 있는데, 근일에 판충주(判忠州)를 제수하였습니다. 신 등은 생각건대 한 고을의 정무(政務)는 사람마다 능한 이가 많지마는 선왕의 음악은 사람마다 능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청컨대, 맹사성을 머물게 하여서 정악(正樂)을 가르치소서.”
【원전】 1 집 616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예술-음악(音樂) / *인물(人物)
*《 태종 024 12/07/13(병 신) / 김남수·정진·여칭·김구덕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김남수(金南秀)로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를, 정진(鄭鎭)으로 형조 판서를, 여칭(呂稱)으로 중군 도총제(中軍都摠制)를, 김구덕(金九德)으로 한성 윤(漢城尹)을 삼았다.
【원전】 1 집 64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태종 025 13/01/24(갑진) / 김구덕·우홍강·석인정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강원도 도관찰사 김구덕(金九德)으로 한성부 윤을 삼고, 우홍강(禹洪康)으로 대신하게 하였다. 평안도 순안(順安) 사람 전 총랑(摠郞) 석인정(石仁正)에게 판사(判事)를 제수하여 치사(致仕)하게 하니, 석인정은 사재를 내어 관가(官家)를 세우고 또 은혜를 백성에게 베풀었으므로, 정부에서 포상하기를 청한 때문이었다. 또 그 아들 부사직(副司直) 석거(石?)의 직질도 승진시키었다.
【원전】 1 집 661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태종 025 13/04/24(임신) / 안성·윤향·김구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안성(安省)으로 한성부 윤(漢城府尹)을, 윤향(尹向)으로 대사헌(大司憲)을, 김구덕(金九德)으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를 삼았다. 이 앞서 의정부 사인(議政府舍人)은 모두 지제교(知製敎)의 직책을 띠고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하윤(河崙)이 사무가 너무 번거롭고 바쁘다고 하여 삭제시켰다.
【원전】 1 집 67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행정-중앙행정(中央行政)
*《 태종 027 14/04/03(병오) / 김구덕을 한성부 윤으로 김겸을 참지의정부사로 임명하다 》
김구덕(金九德)을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삼고, 김겸(金謙)을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삼았다.
【원전】 2 집 10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태종 027 14/04/24(정묘) / 천추사로 한성부 윤 김구덕을 명나라에 보내다 》
한성부 윤(漢城府尹) 김구덕(金九德)을 보내어 경사(京師)에 가서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게 하였다. 임금이 일렀다.
“2품 이상이 출사(出使)할 때 전별연(餞別宴)은 금후로는 예조(禮曹)로 하여금 지신사(知申事)·예방 대언(禮房代言)과 더불어 하나같이 함께 시행하는 것으로써 항식(恒式)을 삼도록 하라. 지신사(知申事)가 유고(有故)하면 다음 대언(代言)으로써 이를 행하게 하고, 육조(六曹)로 하여금 모여서 전별(餞別)하지 말게 하라.” 임금이 또 말하였다. “입조(入朝)하는 사신(使臣)의 반전(盤纏)과 치부(致賻) 따위의 일은 금후로는 승정원(承政院)에서 마감(磨勘)하여 아뢰어라.”
【원전】 2 집 13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의식(儀式) / *사법-법제(法制)
*《 태종 028 14/09#21(신유) / 하천추사 김구덕이 명나라에서 돌아오다 》
하천추사(賀千秋使) 김구덕(金九德)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왔는데, 통사(通事) 김을현(金乙玄)이 방갈라국(方葛剌國)에서 기린(麒麟)을 바치는 주본(奏本) 1통을 전사(傳寫)하여 가지고 와서 바치었다.
【원전】 2 집 39 면 【분류】 *외교-명(明)
*《 태종 029 15/06/25(경인) / 육조에서 각사가 진언한 내용중 시행할 만한 사안 33건을 올리다 》
육조에서 시행할 만한 진언 사건(陳言事件)을 의논하여 아뢰었으니, 무릇 33조항이었다.
1. 전 강릉 부사(江陵府使) 이귀(李龜)의 진언(陳言)입니다. ‘일찍이 수령(守令)이 되어 사람을 죽였거나 사람을 상해(傷害)하여, 이미 죄를 받은 자는 서용(픊用)하지 말아서 외방 관리(官吏)의 가혹한 정사(政事)를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중외(中外)의 관리(官吏)로 불법하게 살인한 자와 탐오(貪汚)하여 정사를 어지럽혀서 이미 죄를 받은 자는 영구히 서용하지 말며, 몽롱(朦朧)하게 보거(保擧)한 자도 율(律)에 의하여 단죄(斷罪)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우군 도총제(右軍都摠制) 이화영(李和英) 등 86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성중 애마(成衆愛馬)와 각사(各司)의 이전(吏典)·조례(?隸) 등은 1년의 두 차례 도목(都目)에 거관(去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각사의 이전(吏典)으로 개월(箇月)이 이미 찬 자는 매 1년마다 많은 곳엔 2명을 쓰고, 적은 곳엔 1명을 쓸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우부대언(右副代言) 서선(徐選) 등 6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종친(宗親)과 각품의 서얼(庶孼) 자손(子孫)은 현관 직사(顯官職事)에 임명하지 말아서, 적첩(嫡妾)을 분별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전 판원주목사(判原州牧使) 이상(李湘) 등 5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각사(各司)의 이전(吏典)으로 거관(去官)하여 직책을 받고 녹(祿)을 받지 못했는데도 개차(改差)되는 일이 간혹 있으니, 바라건대 이조와 병조로 하여금 녹(祿)을 받았는지의 여부를 고찰하게 한 뒤에 체차(遞差)하소서.’ 하였는데,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무릇 도목(都目)에 거관(去官)하여 녹을 받지 못한 자는체차하지 말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전 낭장(郞將) 황유중(黃有中)이 진언한 것입니다. ‘불충(不忠)한 난신(亂臣)의 자손은 서용(픊用)하지 말게 하소서.’ 하였고,
1. 공조 정랑 반영(潘泳) 등 2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근년에 물에 빠져 죽은 선군(船軍)의 성명을 각 소재관(所在官)에 이문(移文)하여 추고(推考)하게 하여, 그 집의 세(稅)를 면제하게 하소서.’ 하였고,
1. 전 형조 판서 유용생(柳龍生) 등 3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각도의 시위군(侍衛軍)은 당번(當番)이 되면 서울로 올라와 시위(侍衛)하고, 하번(下番)하면 본진(本鎭)에 나가 근무하게 되니, 두 가지 군역(軍役)은 진실로 어렵습니다. 원컨대, 시위(侍衛)와 진속(鎭屬)을 나누어 정하소서.’ 하였고,
1. 병조 좌참의(兵曹左參議) 신개(申죏)가 진언한 것입니다. ‘각 역승(驛丞)이 부임할 때에 포마(鋪馬) 2필씩을 주어 보내소서.’ 하였습니다. 이상의 네 가지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진언한 것입니다. ‘저화(楮貨)의 일로 인하여 죄를 범한 사람의 가산(家産)도 또한 사첩(謝牒)을 환급(還給)하는 예(例)에 의하여 환급하시고, 금후로 죄를 범하는 자는 중국에서 보초(寶쿘)를 사용[流行]하는 율(律)로써 논죄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은 을미년 6월 20일 이후부터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1. 흥해 호장(興海戶長) 최가해(崔可海)가 진언한 것입니다. ‘간악한 무리들이 동기(同氣)·골육(骨肉)의 4, 5촌의 가난한 집 딸을 그 종[奴子]으로 하여금 강간(强奸)하게 하여, 그 소생(所生)을 잡아다가 부리는 자가 있으니, 바라건대 철저히 추고(推考)하여, 비첩(婢妾) 소생의 예(例)에 따라 사재감(司宰監)에 충용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철저히 추고하여 이혼[離異]시키고, 그 소생은 속공(屬公)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판내자시사(判內資寺事) 이수(李穗) 등 14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자기의 비첩(婢妾) 소생은 그 아비가 죽기를 기다려서 부리[役使]게 하소서.’ 하였고,
1.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진언한 것입니다. ‘성중(城中)에서 가끔 인명(人命)을 함부로 살해하여 저잣길[市路] 사이에 버리기도 하고 혹은 개천의 물[渠水]에다 던지기도 하니, 바라건대 헌사(憲司)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고, 만약 고발하는 자가 있으면 범인의 가산의 반을 상으로 충당하여, 그 원통하고 억울함을 씻어 주게 하소서.’ 하였고,
1. 도총제 이화영(李和英) 등 11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양편이 모두 부당하여 속공(屬公)시킨 노비가 도망하여, 그 정상이 현저한 자는 본 주인으로 하여금 대신 세우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상의 세 가지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창녕 부원군(昌寧府院君) 성석린(成石璘)과 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법(法) 하나를 고치는 것이 비록 소민(小民)에게 해가 없는 것 같으나, 그 폐단이 다단함은 실로 쉽게 말하지 못할 것이 있으니, 원컨대 이제부터는 일이 국가의 대체(大體)에 관계되고, 민생(民生)에 커다란 폐해가 되는 것은 반드시 없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서 크게 이해(利害)가 없는 것은 마땅히 그전의 법을 따르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였고,
1. 안성군(安城君) 이숙번(李叔蕃)이 진언한 것입니다. ‘활인원(活人院)에 나누어 소속시킨 무격(巫覡)으로 하여금 병인(病人)들을 돌보아 보호하게 하고, 매년 세말(歲末)마다 활인(活人)한 인원의 다소를 상고하여, 10명을 살린 자는 상을 주어 뒷사람을 권장하고, 마음을 쓰지 않은 자는 죄를 논하소서.’ 하였고,
1. 대사성(大司成) 유백순(柳伯淳)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연해(沿海) 어량(魚梁)으로 호세가(豪勢家)에 의하여 탈취 점령[奪占]된 것은 금령(禁令)을 엄히 가하여 백성들의 소망에 부응(副應)케 하소서.’ 하였고,
1. 직예문관(直藝文館) 황현(黃鉉)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벼슬하는 사람들은 원조(元朝)의 법에 의하여 유사(攸司)로 하여금 귀관(歸觀)·배소(拜掃)하는 제도를 정하게 하여, 충효(忠孝)를 온전하게 하소서.’ 하였고,
1. 진산 부원군(晉山府院君) 하윤(河崙)이 진언한 것입니다. ‘경기(京畿)의 예전에 초완(草?)이 생산되던 곳이 함부로 경작(耕作)을 당하여 일가(一家)의 이익만 주는것을 모두 다시 속공(屬公)시켜, 예전대로 초완이 성장(成長)하게 하고, 백성들이 베어 가는 것을 허용하며, 선공감(繕工監)의 1년 경비(經費) 이외의 것은 즉시 나누어 방매(放賣)케 함이 편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이상 다섯 가지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상호군(上護軍) 김사미(金思美)가 진언한 것입니다. ‘경기 감사(京畿監司)가 행행(行幸)을 지응(支應)한다고 핑계하여 교초(郊草)를 수다(數多)하게 베어 사사(私私) 단자(單字)로 사용하니, 인정(人情)에 매우 미편(未便)합니다. 금후로는 일체 금지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강무장(講武場)의 상소(常所)로 상정(詳定)한 각관(各官)과 강무 때 경과하는 노변(路邊)의 각관 이외에는 교초를 베는 것을 금하되, 진언한 대로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정랑(正郞) 반영(潘泳)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녹양(祿楊)·금양(衿陽)·고양(高陽) 등의 목장(牧場) 안에서 세 곳만을 택하여 삼군(三軍)에 정속(定屬)시키고, 그 나머지 목장은 일체 모두 혁파하여 버리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오늘날의 갑사(甲士)의 수효는 감(減)하였는데 목장만은 예전대로 두었으니 미편합니다. 바라건대, 적당히 그 수를 감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습니다.
1. 진산 부원군 하윤 등 29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각호(各戶)의 차역(差役)을 전지(田地)와 인구의 다소에 따라 상고해서 균등하게 정하라고 일찍이 교지(敎旨)가 있었는데 관리(官吏)들이 다만 호패(號牌)에 의하여 인구수에 따라 역사에 차출하는 인원을 결정합니다. 청컨대, 교지에 따르지 않는 것으로 논죄(論罪)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에 의하여 시행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1. 참찬 유관(柳觀)이 진언한 것입니다. ‘경기(京畿)에 있는 각품(各品)의 과전(科田)은, 빌건대 소재지 관사(官司)로 하여금 답험(踏驗)하게 한 뒤에 조세(租稅)를 거두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한 내용에 의하여 소재지 관사(官司)에 손실 답험(損實踏驗)의 첩자(帖字)를 만들어 주어, 전객(佃客)이 경작한 전지(田地)의 손(損)이 10분의 8에 이른 것은 조세의 수납을 면제하여, 민생(民生)을 후하게 하고, 공전(公田)도 또한 이 예(例)에 의하소서.’ 하였습니다.
1. 전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최용소(崔龍蘇)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그 진언의 내용에 이르기를, ‘전라도의 조운(漕運)은 빌건대, 사선(私船)으로 값을 주어 상납(上納)하고, 병선(兵船)으로 하여금 호송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에 의하여 시행하고, 나머지 미멸(米?)은 조운선(漕運船)을 이용하여 상납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1. 중군 총제(中軍摠制) 이징(李澄)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저화(楮貨)를 만드는 닥[楮]을 민간(民間)에서 수납(收納)하니, 그 폐단이 적지 아니합니다. 원컨대, 저화로써 <그 값을> 환급(還給)하여 교역(交易)하여 민폐를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관가에서 심은 닥밭[楮田]의 소출로써 <저화를> 만드소서.’ 하였습니다.
1. 사간원 우사간 대부 이맹균(李孟畇) 등 5인이 진언한 것입니다. ‘외방(外方)에서 진사(眞絲)를 바치[貢]는 것을 면제하소서.’ 하였고,
1. 공안부 윤(恭安府尹) 안성(安省)이 진언한 것입니다. ‘강원도에서 연례(年例)로 바치는 목재(木材)는 궐(闕)할 수 없는 것이니, 그 도(道)의 다른 공물(貢物)은 타도(他道)로 적당히 옮기어, 그 백성들을 부생(復生)하게 하소서.’ 하였고,
1. 전 한성부 윤 민계생(閔繼生)이 진언한 것입니다. ‘각도의 계수관(界首官)에 소재(所在)한 저화(楮貨)를 그 임내(任內)로 나누어 보내어 분포(分布)시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상경(上京)하여 무역하는 폐단을 없애게 하소서.’ 하였고,
1. 철성군(鐵城君) 이원(李原)이 진언한 것입니다. ‘부강(富强)한 사람은 전지(田地)를 많이 차지하여 일가(一家)의 경작(耕作)이 이미 넉넉한데도, 가난한 백성과 병작을 하여 이익을 취하니, 고르지 못한 환(患)이 있습니다. 환과 고독(鰥寡孤獨)으로 자경(自耕)할 수 없는 자 이외에, 부강한 자가 병작하는 전답은 경작하고 있는 가난한 백성에게 지급하여, 그들의 생계를 이루게 하소서.’ 하였고,
1. 사선 주부(司膳注簿) 진운수(秦云壽)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기선군(騎船軍)의 영전(營田)의 경우(耕牛)와 농기구[農器]는 관(官)에서 저화(楮貨)를 지급하여 사주어, 스스로 비치하지 말게 하고, 따라서 번(番)을 나누어 일을 시키게 하소서.’ 하였는데, 이 다섯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1. 전 급사(給事) 김한의(金漢義)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각관(各官)에서 창고에 있는 묵은 쌀[陳米]과 묵은 콩[陳太]을 상납할 때에는, 빌건대 다시 말[斗]로 되어서 제사(題辭)을 매겨 주어 출포(出浦)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수량을 되어 보지도 않고 수령(守令)에게 그대로 지급[據給]한 자는 다른 사람이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여 논죄하소서.’ 하였습니다.
1. 전 사정(司正) 길충실(吉忠實)이 진언한 것입니다. ‘유후사(留後司)에서 요역(?役)을 배정[差定]하는 등의 일을 4현(縣)의 호장(戶長)에게 체지(帖紙)를 내려보내게 하나, 호장 등이 고르게 배정하지 아니하니, 바라건대 대관(大官)의 예(例)에 의하여 몸소 고르게 배정하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은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진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하였습니다.
1. 유학(幼學) 배적(裵迪) 등이 진언한 것입니다. ‘조전선(漕轉船)을 압령(押領)하는 만호(萬戶)·천호(千戶)가 진상(進上)을 명목으로 여러 섬[島]에서 사냥하여 폐단을 일으키니, 금후로는 배가 떠난 날을 빙고(憑考)하여 그 폐단을 없애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추고(推考)하여 금지하되, 여전(如前)히 폐단을 일으키는 자는 다른 사람이 진고(陳告)하도록 허락하여 논죄하소서.’ 하였습니다.
1. 흥해 호장(興海戶長) 최가해(崔可海)가 진언한 것입니다. ‘충주(忠州)의 경원창(慶源倉)에 쌀을 납입할 때 국가에서 상정(詳定)한 것 이외의 잡물(雜物)을 거두는 것이 매우 많으니, 바라건대 전례(前例)에 의하여 상납(上納)케 하여 폐단을 제거하소서.’ 하였는데, 위 조항을 의논하여 결론을 얻기를, ‘상정한 것 이외의 잡물을 거두는 것을 엄히 금하소서.’ 하였습니다.”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원전】 2 집 72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정론(政論) / *행정(行政) / *인사-임면(任免) / *인사-관리(管理) / *사법-법제(法制) / *군사-중앙군(中央軍) / *군사-지방군(地方軍) / *군사-군역(軍役)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금융(金融) / *상업(商業) / *교통-육운(陸運) / *농업(農業) / *수산업(水産業) / *가족-가족(家族) / *신분-천인(賤人) / *윤리(倫理) / *구휼(救恤)
*《 태종 033 17/05#01(병진) / 윤향·이백지를 경상·강원도 도관찰사로, 김구덕을 동지돈녕부사로 삼다 》
윤향(尹向)을 경상도 도관찰사(慶尙道都觀察使)로, 이백지(李伯持)를 강원도 도관찰사(江原道都觀察使)로, 김구덕(金九德)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삼았다.
【원전】 2 집 163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태종 034 17/07/02(을묘) / 권홍·김구덕·이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권홍(權弘)을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로, 김구덕(金九德)을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이징(李澄)을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로, 유사눌(柳思訥)을 좌군 동지총제(左軍同知摠制)로, 오진(吳眞)을 공안부 윤(恭安府尹)으로, 오식(吳湜)을 인녕부 윤(仁寧府尹)으로, 이추(李推)를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이흥(李興)을 개성 유후사부유후(開城留後副留後)로 삼았다.
【원전】 2 집 177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태종 035 18/06/03(임오) / 세자 이제를 폐하고 충녕 대군으로서 왕세자를 삼다 》
세자 이제(李?)를 폐하여 광주(廣州)에 추방하고 충녕 대군(忠寧大君)으로서 왕세자를 삼았다. 임금이, “백관(百官)들의 소장(疏狀)의 사연을 내가 읽어 보니 몸이 송연(첞然)하였다. 이것은 천명이 이미 떠나가 버린 것이므로, 이에 이를 따르겠다.”
하니, 영의정 유정현(柳廷顯)·좌의정 박은(朴?)·우의정 한상경(韓尙敬)·옥천 부원군(玉川府院君) 유창(劉敞)·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정탁(鄭擢)·찬성 최이(崔칀)·병조 판서 박신(朴信)·한평군(漢平君) 조연(趙涓)·평성군(平城君) 조견(趙죺)·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판좌군 도총제부사(判左軍都摠制府事) 이화영(李和英)·이조 판서 이원(李原)·곡산군(谷山君) 연사종(延嗣宗)·공조판서 심온(沈溫)·도총제(都摠制) 박자청(朴子靑)·이징(李澄)·대제학(大提學) 변계량(卞季良)·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형조 판서 박습(朴習)·참찬 김점(金漸)·총제(摠制) 권희달(權希達)·유은지(柳殷之)·최윤덕(崔閏德)·최운(崔?)·문계종(文繼宗)·홍부(洪敷)·홍섭(洪涉)·이배(李培)·김귀보(金貴寶)·문효종(文孝宗)·윤 충(尹惟忠)·예조 참판 신상(申商)·병조 참판 이춘생(李春生)·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 이담(李湛)·공조참판 이적(李迹)·부윤(府尹) 이원항(李原恒)·호조 참판 이발(李潑)·부윤(府尹) 민계생(閔繼生)·사간(司諫) 정상(鄭尙)·집의(執義) 허규(許揆) 등이 조계청(朝啓廳)에 모이니, 지신사(知申事) 조말생(趙末生)·좌대언(左代言) 이명덕(李明德) 등에게 명하여 전지(傳旨)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지극히 무도(無道)하여 종사(宗社)를 이어 받을 수 없다고 대소 신료(大小臣僚)가 청(請)하였기 때문에 이미 폐(廢)하였다. 무릇 사람이 허물을 고치기는 어려우니, 옛 사람으로서 능히 허물을 고친 자는 오로지 태갑(太甲)뿐이었다. 말세(末世)에 해외(海外)의 나라에 있어서 내 아들이 어찌 능히 태갑과 같겠는가? 나라의 근본은 정하지 아니할 수가 없으니, 만약 정하지 않는다면 인심이 흉흉(洶洶)할 것이다. 옛날에는 유복자(遺腹者)를 세워 선왕(先王)의 유업(遺業)을 이어 받게 하였고, 또 적실(敵室)의 장자(長子)를 세우는 것은 고금(古今)의 변함없는 법식이다. 제(?)는 두 아들이 있는데, 장자(長子)는 나이가 다섯 살이고 차자(次子)는 나이가 세 살이니, 나는 제(?)의 아들로써 대신시키고자 한다. 장자가 유고(有故)하면 그 동생을 세워 후사(後嗣)로 삼을 것이니, 왕세손(王世孫)이라 칭할는지, 왕태손(王太孫)이라 칭할는지 고제(古制)를 상고하여 의논해서 아뢰어라.” 하였다. 한상경 이하의 군신(群臣)은 모두 제(?)의 아들을 세우는 것이 가(可)하다고 하였으나, 유정현은 말하기를, “신은 배우지 못하여 고사(故事)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일에는 권도(權道)와 상경(常經)이 있으니,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擇賢]이 마땅합니다.” 하고, 박은(朴?)은 말하기를, “아비를 폐하고 아들을 세우는 것이 고제(古制)에 있다면 가(可)합니다만, 없다면 어진 사람을 골라야 합니다.” 하고, 조연·김구덕·심온·김점·유은지·이춘생·최운·문계종·이배·윤유충·이적·이원항·이발·정상·허규 등 15인이 말하기를, “어진 사람을 고르소서.” 하였다. 이원은 말하기를, “옛 사람은 큰 일이 있을 적에 반드시 거북점[龜占]과 시초점[筮占]을 쳤으니, 청컨대 점을 쳐서 이를 정하소서.” 하니, 조말생 등이 돌아와서 내전(內殿)에 들어갔다. 임금이 좌우(左右)를 물리치고, “제경(諸卿)들이 무엇이라고 하던가.” 하니, 조말생이 여러 신하들의 의논을 바치었다. 임금이 이를 읽어 보고, “나는 점을 쳐서 이를 정하겠다.” 하니, 조말생이 나갔다. 임금이 내전으로 들어가서 여러 신하들의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청(請)을 왕비에게 말하니, 왕비가 불가(不可)한 것을 말하기를, “형을 폐하고 아우를 세우는 것은 화란(禍亂)의 근본이 됩니다.” 하였다. 임금도 또한 이를 옳게 여겼으나, 한참 만에 곧 깨달아 말하기를, “금일의 일은 어진 사람을 고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즉시 최한에게 명하여 뒤쫓아가 조말생을 도로 데려오게 하였으나, 최한이 이르기 전에 조말생이 이미 여러 신하들에게 전지(傳旨)하여 이르기를, “장차 이원의 의논을 따르겠다.” 하였다. 조말생이 돌아오니, 임금이, “의논 가운데 점괘를 따르도록 원한다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나도 이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나라의 근본(根本)을 정하는 것은 어진 사람을 고르지 않을 수가 없다.” 하고, 곧 전지(傳旨)하기를, “나는, 제(?)의 아들로써 대신시키고자 하였으나, 제경(諸卿)들이 모두 말하기를, ‘불가(不可)하다.’고 하니, 마땅히 어진 사람을 골라서 아뢰어라.” 하였다. 유정현 이하 여러 신하들이 또 아뢰기를, “아들을 알고 신하를 아는 것은 군부(君父)와 같은 이가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였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 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 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 충녕 대군【휘(諱).】이 대위(大位)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擇賢]도 또한 충녕 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이었다. 이윽고 조말생 등에게 하교(下敎)하기를, “대저 이와 같이 큰 일은 시간을 끌면 반드시 사람을 상(傷)하게 된다. 너는 선지(宣旨)를 내어서 속히 진하(陳賀)하게 함이 마땅하다.” 하니, 이때에 문무 백관(文武百官)들이 예궐(詣闕)하여 세자를 정한 것을 하례하였다. 임금이 즉시 장천군(長川君) 이종무(李從茂)를 경도(京都)에 보내어 종묘(宗廟)에 고(告)하기를, “세자 제(?)가 지난해 봄에 허물을 뉘우치고 스스로 꾸짖는 글을 지어서 고(告)하였으므로 신이 오히려 보존하였는데, 일년이 되지 못하여 다시 전날의 잘못을 저질러서 자못 심함이 있었으나 신이 또 가볍게 꾸짖어 그가 뉘우치고 깨닫기를 바랐습니다. 요즈음 다시 상서하였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여 전혀 신자(臣子)의 예(禮)가 없어, 대소 신료가 합사(合辭)하여 폐하기를 청하고 충녕 대군(忠寧大君)【휘(諱).】이 효성스럽고 우애스럽고 온화하고 인자하여 진실로 저부(儲副)에 합당하다는 여망이 있었으므로, 이것을 감히 고(告)합니다.” 하고, 또 상호군(上護軍) 문귀(文貴)를 전지관(傳旨官)으로 삼아 최한과 더불어 백관(百官)들이 폐하자고 청(請)한 장소(章疏)를 가지고 경도(京都)로 가서 제(?)에게 보이고, 또 폐하여 내친다는 뜻을 유시(諭示)하게 하였다. 그때 유정현 등이 제와 가속(家屬)을 춘천(春川)에 내치도록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참 있다가 전교(傳敎)하기를,
“중궁(中宮)이 성녕 대군(誠寧大君)이 졸(卒)하면서부터 하루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날이 없는데, 제(?)를 가까운 고을에 두기를 청하여 소식이라도 자주 듣기를 바라고, 또 물이 깊어서 떠나 보내기가 어려우니, 그를 사제(私第)에 내보내어 물이 줄기를 기다려서 곧 보내라.”
하니, 유정현 등이,
“경도(京都)에 머물러 둘 수는 없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옳게 여겨 즉시 명하여 첨총제(僉摠制) 원윤(元胤)을 배치관(陪置官)으로 삼아서 경도(京都)에 가서, 근수비(根隨婢) 13명, 종[奴] 6명, 화자(火者) 4명으로 하여 제(?)를 광주(廣州)에 내쳐서 안치(安置)하게 하고, 이에 하교(下敎)하였다.
“저부(儲副)를 어진 사람으로 세우는 것은 곧 고금(古今)의 대의(大義)이요, 죄가 있으면 마땅히 폐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항구한 법식이다. 일에는 하나의 대개(大槪)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리에 합당하도록 기대할 뿐이다. 나는 일찍이 적장자(嫡長子) 제(?)를 세자로 삼았는데, 나이가 성년(成年)에 이르도록 학문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성색(聲色)에 빠졌었다. 나는 그가 나이가 어리기 때문이라 하여 거의 장성(長成)하여 허물을 고치고 스스로 새 사람이 되기를 바랐으나, 나이가 20이 넘어도 도리어 군소배(群小輩)와 사통(私通)하여 불의한 짓을 자행하였다. 지난해 봄에는 일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자가 몇 사람이었다. 제가 이에 그 허물을 모조리 써서 종묘에 고하고, 나에게 상서(上書)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꾸짖는 듯하였으나, 얼마 가지 아니하여 또 간신 김한로(金漢老)의 음모(陰謀)에 빠져 다시 전철(前轍)을 밟았다. 내가 부자(父子)의 은의(恩誼)로써 다만 김한로만을 내쳤으나, 제는 이에 뉘우치는 마음이 있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망하고 노여운 마음을 품어 분연(憤然)히 상서하였는데, 그 사연이 심히 패만(悖慢)하여 전혀 신자(臣子)의 뜻이 없었다. 정부(政府)·훈신(勳臣)·육조(六曹)·대간(臺諫)·문무 백관(文武百官)이 합사(合辭)하고 소장(疏狀)에 서명(署名)하여 말하기를, ‘세자의 행동이 종사(宗社)를 이어받아 제사를 주장하거나 막중한 부탁(付託)을 맡을 수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태조(太祖)의 초창(草創)한 어려움을 우러러 생각하고, 또 종사(宗社) 만세(萬世)의 대계(大計)를 생각하여 대소 신료의 소망(所望)에 굽어 따르시어 공의(公義)로써 결단하여, 세자를 폐하여 외방으로 내치도록 허락하고, 종실에서 어진 자를 골라서 즉시 저이(儲貳)를 세워서 인심(人心)을 정(定)하소서.’ 하고, 또 이르기를,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영명 공검(英明恭儉)하고 효우 온인(孝友溫仁)하며, 학문을 좋아하고 게을리 하지 않으니, 진실로 저부(儲副)의 여망(輿望)에 부합합니다.’ 하였다. 내가 부득이 제(?)를 외방으로 내치고 충녕 대군【휘(諱).】을 세워 왕세자(王世子)로 삼는다. 아아! 옛 사람이 말하기를, ‘화(禍)와 복(福)은 자기가 구(求)하지 않는 것이 없다.’ 하니, 내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애증(愛憎)의 사심(私心)이 있었겠느냐? 아아! 중외(中外)의 대소 신료는 나의 지극한 생각을 본받으라.”
충녕 대군(忠寧大君)은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덕망(德望)이 날로 높아지니 중외(中外)에서 마음이 쏠리고, 양궁(兩宮)이 총애(寵愛)하기를 더욱 성(盛)하게 하였다. 제(?)가 그와 같이 광포(狂暴)하고 방종(放縱)하여 나라 사람들도 또한 그가 지워진 중임(重任)을 감당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나, 임금은 일찍이 폐(廢)하거나 새로 세울 생각이 없었으므로, 군신(群臣)이 청(請)하자 오히려 어렵게 여겼고, 중궁(中宮)도 또한 불가(不可)하다고 말하였다. 군신(群臣)이 굳이 청(請)하자, 이에 따르니, 중외(中外)에서 흡연(洽然)히 기뻐하고 경축(慶祝)하였다. 이숙번(李叔蕃)이 일찍이 임금에게 사뢰기를, “사람들이 모두 청하기를, ‘충녕이 가산(家産)을 다스리지 않으니, 정직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당군(上黨君) 이애(李촧)가 여러 차례 은근한 뜻을 보였고, 성달생(成達生)·이굉(李宏)이 모두 수종(隨從)하기를 원하여 공효(功?)를 이룰 뜻을 가졌으며, 이적(李迹)도 또한 대군(大君)에게 사뢰기를,
“이적도 인친(姻親)의 연고가 있으니 나아가 뵈올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외인(外人)으로서 만나 뵙기를 원하였으나 만나지 못한 자가 많았다. 한 때에 대군(大君)의 덕(德)을 경모(景慕)하여 사람들이 모두 마음을 돌림이 이와 같았다. 대군이 평상시에 거주할 적에 부인(夫人)을 경대(敬待)하여, 그녀가 나아가고 물러갈 때에는 반드시 일어나서 보내고 맞이하였다. 그때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임어(臨御)하니, 대소인(大小人)이 경복궁(景福宮)을 지나면서 하마(下馬)하는 자가 적었으나, 대군은 지날 적마다 반드시 내렸는데, 비록 저녁이든 밤이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폐하지 않았으니, 그 공경과 신중(愼重)함이 천성(天性)에서 나온 것이 이와 같았다고 한다. 사신(使臣) 황엄(黃儼)이 대군을 보고 매양 똑똑하고 밝은 것을 칭찬하여 말하기를, “영명(英明)하기가 뛰어나 부왕(父王)을 닮았다. 동국(東國)의 전위(傳位)는 장차 이 사람에게 돌아갈 것이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원민생(元閔生)이 세자를 봉(封)하도록 청(請)하는 표문(表文)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이르니, 황엄이 그가 오게 된 일을 물었다. 원민생이 말하기를, “세자를 바꾸기를 청합니다.” 하니, 황엄이 말하기를, “필시(必是) 충녕을 봉하도록 청하는 것이리라.” 하였다.
【원전】 2 집 230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사상-토속신앙(土俗信仰) / *외교-명(明)
*《 세종 002 00/11/29(을해) / 상왕이 유정현 등을 불러 빈과 잉첩을 더 들일 뜻을 말하다 》
상왕이 유정현·박은·이원·조말생·허조·하연을 불러 전교하기를,
“한(漢)나라 고조(高祖)는 영명(英明)한 임금이다. 혜제(惠帝)에게 재위(帝位)를 전하였는데, 혜제의 천성이 인자(仁慈)하고 유약하여, 인체(人?)를 보고는 병을 얻어 마침내 여씨(呂氏)의 난(亂)을 빚어내게 하였으니, 만약 주발(周勃)이 아니었다면 한나라의 국운은 어찌 되었을지 알 수 없을 것이며, 혜제가 또 후사(後嗣)가 없었으므로, 국운(國運)이 심히 위태로웠다. 임금의 계사(繼嗣)는 많이 두지 않으면 안 될 것이매, 내가 지난 해에 예관(禮官)의 청으로 인하여, 3, 4명의 빈(嬪)과 잉첩(잉妾)을 들였으니, 그들의 아버지인 권홍(權弘)·김구덕(金九德)·노귀산(盧龜山)·김점(金漸) 등의 왕실(王室)에 향하는 마음이 반드시 다른 신하와는 달랐다. 한편으론 계사를 많이 두고, 한편으론 여러 사람의 도움을 얻게 되며, 또 옛날의 한 번 혼인에 아홉 여자를 취한다는 뜻에도 맞는다. 지금 주상이 정궁(正宮)에 세 아들이 있지마는, 그러나 더 많으면 더욱 좋을 것이다.”
하니, 유정현이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제왕은 자손이 번성한 것을 귀하게 여겼으니, 빈(嬪)과 잉첩(칑妾) 2, 3명을 들이기를 청합니다.” 고 하였다. 상왕이 말하기를, “이 일은 주상이 알 바가 아니니, 내가 마땅히 주장할 것이다.” 하고, 인하여 예조에 명하여 가례색(嘉禮色)의 제조(提調)·별좌(別坐)를 선임(選任)하여 아뢰게 하였다. 박은 등이 상왕의 앞에 모시고 앉았다가 박은이 말을 하는 김에 아뢰기를, “궁중(宮中)이 적막합니다.” 고 하니, 그 뜻은 대개 중궁(中宮)을 마땅히 폐(廢)할 것을 말함이다. 상왕이 그 뜻을 알고 말하기를, “내가 이미 경의 뜻을 알았다.” 고 하였다. 의금부 제조(義禁府提調) 등이 수강궁에 나아가서 중궁을 폐하기를 청하니, 상왕이 말하기를, “평민의 딸도 시집을 가면 <친정 가족에> 연좌되지 않는 법인데, 하물며 심씨(沈氏)는 이미 왕비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폐출(廢黜)하겠는가. 경들의 말이 옳지 못한 것 같다.” 고 하고, 인하여 임금에게 말하기를, “죄인의 딸인 까닭으로 외인(外人)이 반드시 이를 의심하지마는, 그러나 이것이 어찌 법관(法官)이 마땅히 청할 바이겠느냐.” 고 하니, 조말생·원숙·장윤화 등이 대답하기를, “만약 형률(刑律)로써 논하오면 상교(上敎)가 옳습니다. 그러나 주상의 처지에서 논한다면, 심온은 곧 부왕(父王)의 원수이니, 어찌 그 딸로써 중궁(中宮)에 자리를 잡고 있도록 하겠습니까. 은정(恩情)을 끊어 후세(後世)에 법을 남겨두시기를 청합니다.” 하니, 상왕이 대답하지 않았다. 박은이 또 병조에 나아가서 당상관(堂上官)에게 이르기를, “그 아버지가 죄가 있으니, 그 딸이 마땅히 왕비로 있을 수 없다.” 고 하였다. 상왕이 이 말을 듣고 이에 유정현·허조·허지와 의정부 당상관을 불러 보고 말하기를,
“경(經)에, ‘형벌은 아들에게도 미치지 않는다.’ 하였으니, 하물며 딸에게 미치겠느냐. 그전의 민씨(閔氏)의 일도 또한 불충(不忠)이 되었으나, 그 당시에 있어서는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맞아 세우자고 의논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는데, 지금은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내가 전일에 가례색(嘉禮色)을 세우라고 명한 것은 빈(嬪)과 잉첩(칑妾)을 뽑으려고 한 것뿐이다.” 하니, 유정현은 대답하지 않고, 박은이 아뢰기를, “신 등도 또한 금지 옥엽(金枝玉葉)이 이와 같이 번성하오니, 왕비를 폐하고 새로 세우고 하는 일은 경솔히 의논할 수 없으니, 빈과 잉첩을 갖추게 하고자 함이 심히 마땅합니다.” 고 하였다. 허조는 아뢰기를, “빈과 잉첩을 갖추고자 함은 신도 역시 마땅히 두 성씨(姓氏)를 맞아 들여야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하니, 상왕이 매우 기뻐하였으며, 인하여 혼가(婚嫁)를 금하도록 명하였다.
【원전】 2 집 288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사법-재판(裁判) / *사법-법제(法制) / *역사-고사(故事)
*《 세종 005 01/09/26(무진) / 백관과 함께 인덕궁에 나아가 곡하다 》
임금이 소복(素服)·오대(烏帶)·청양산(靑陽傘)·청선(靑扇)의 차림으로 인덕궁에 가자, 백관들은 소복·오대의 차림으로 따라가 문밖에 줄지어 섰고, 판통례(判通禮)가 임금을 인도하여 전문(殿門)안에 들어갔다. 판통례가, “사배하고 15마디 곡하시오.” 하니, 임금이 사배하고 곡하고, 통찬(通贊)이, “사배하고 곡하라.” 고 창하니, 백관들이 다 사배하고 곡하였다. 판통례가, “사배하시오.” 하니, 임금이 사배하였다. 통찬이, “사배하라.” 창하니, 백관들이 사배하였다. 판통례가 임금을 인도하여 악차(幄次)로 가고, 통례문이 군신을 나눠서 인도하고 차례에 따라서 나갔다. 의평군(義平君) 이원생(李元生), 순평군(順平君) 이군생(李群生)들이 악차에 찾아 뵈었다. 임금이 환궁하여, 우부대언(右副代言) 윤회(尹淮)에게 명하여, 상사(喪事)를 감독케 하고, 예문 제학(藝文提學) 탁신(卓愼)과 전 도총제(都摠制) 노필(盧弼)을 빈전 도감 제조(殯殿都監提調)에, 지돈녕(知敦寧) 김구덕(金九德)과 공안부 윤 유장(柳暲)을 재도감 제조(齋都監提調)에, 예조 참판 김자지(金自知)를 상복색 제조(喪服色提調)에, 호조 참의 정초(鄭招)를 동부제조에 각각 발령하였다. 상왕은 몸이 불편하여, 임석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상왕이 주상(主喪)이 되고, 조정은 10일 동안, 항시(巷市)는 5일 동안 각각 정지시키고, 음악을 멈추고 도살과 혼인을 금지하여 산릉(山陵)<에 모시기> 전까지로 한정하고, 대소의 제사를 정지시켜 우제(虞祭) 전까지로 한정하고, 사직(社稷)<의 제사>만은 정지하는 제한 안에 두지 않았다.
【원전】 2 집 338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인사-임면(任免) / *사법-법제(法制) / *상업(商業)
*《 세종 005 01/10/09(경진) / 지돈녕 김구덕이 흥덕사에서 이재를 차리다 》
지돈녕(知敦寧) 김구덕(金九德)이 수강궁에 나아가 향과 소제문(疏祭文)을 받들고 가서 흥덕사(興德寺)에서 이재(二齋)를 차렸다.
【원전】 2 집 34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세종 006 01/11/01(신축) / 지돈녕부사 김구덕이 다섯 번째 재를 장의사에서 베풀다 》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향과 소문(疏文)을 받들고 다섯 번째의 재(齋)를 장의사(藏義寺)에서 베풀었다.
【원전】 2 집 344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사상-불교(佛敎)
*《 세종 006 01/11/15(을묘) / 김구덕이 개경사에서 일곱 번째 재를 올리다 》
김구덕(金九德)이 향 및 소·제문을 받들고 일곱 번째의 재를 개경사(開慶寺)에서 베풀었다.
【원전】 2 집 345 면
*《 세종 013 03/08/28(무오) / 좌의정 박은이 상왕에 올린 상소문 》
좌의정 박은(朴?)이 상왕에게 상서하여 말하기를,
“신이 병중에 있으면서 문득 지나간 일을 생각하여 성총(聖聰)을 번독하게 하니, 황공하여 몸둘 곳이 없나이다. 지나간 때에 양녕군(讓寧君)이 세자로 덕이 없어, 신이 유정현(柳廷顯)과 함께 천수송정(天水松亭)에서 일찍이 밀지(密旨)를 받고, 전하(殿下)가 장차 종묘와 사직의 큰 일을 하시려는 것을 알고서, 신 등의 뜻하고 원하던 것이 이미 정하여졌구나 하였고, 얼마 뒤에 신 등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세자를 폐하여 밖에다 두기를 청하였으나, 전하께서는 큰 아들의 어린 이로 세대를 이으려 하여, 조말생·이명덕 등에 명하여 그 뜻을 여러 신하에게 유지(諭旨)하게 하니, 김점(金漸)이 먼저 그 내용을 알고서 여러 신하에게 크게 말하기를, ‘손자로 세자를 세운다는 것은, 임금의 뜻이 이미 작정이 굳어져서 아무리 해도 돌릴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여러 신하로서 듣는 자는 감히 다른 말을 하지 못하게 되었으나, 신은 조말생·유정현 등에게 눈짓을 하여 말하기를, ‘저부(儲副)를 정하는 것은 나라의 큰 일이니, 대신 이하로 어찌 의논을 올리지 아니할 것인가. 또 아비를 폐하고, 그의 아들을 세운다는 것이 옛날부터 정해진 법이 있다면 가하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의당히 어진 자를 가려서 세워야 한다.’ 하였더니, 유정현이 곧 말하기를, ‘일이 떳떳한 법으로 나갈 때도 있고, 권도로 할 때도 있으니, 마땅히 어진 이를 가려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제야 조말생·김구덕(金九德)·유은지(柳殷之)·문효종(文孝宗)·이춘생(李春生)·이발(李潑)·이적(李迹) 등 10여인이 이에 어진 이를 가리자는 의논을 바치게 되었고, 한상경(韓尙敬) 이하 20여인은 혹 임금의 뜻에 순종하기도 하고, 혹 점(占)을 쳐서 결정하자고 청하기도 하였고, 혹 위에서 재정하게 하자고 하기도 하였고, 혹 옛날 법에 의하자고도 하였으므로, 조말생과 이명덕이 여러 의논을 갖추어 계주(啓奏)하였더니, 전하께서는 드디어 맏손자를 세운다는 명령을 파하시고 이에 어진 이를 가린다는 의논을 따르시어, 어질고 덕이 있는 분을 명하여 동궁(東宮)의 위(位)에 정하시고, 잇따라 내선(內禪)의 예를 행하시었으니, 오늘날 이같은 거룩한 일은 옛날에도 없던 바입니다. 대개 이 신비한 모책과 위대한 계략은 성상(聖上)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여러 신하들은 그 사이에 아무것도 참예함이 없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전하는 매양 큰 일을 처리하실 때에는 실로 신성한 계산에서 나왔으나, 그 결단은 공론으로 정하시고, 일이 작정됨에 이르러서는, 거기에 대한 상벌을 논하여 권징(勸懲)하게 하므로, 원종 공신(原從功臣)이란 것도 미세한 공로이나, 또한 다 빠짐없이 등록하게 하였으니, 신은 망녕되게 원하옵기는, 어진 이를 가리자는 의논에 나선 유정현등 10여인과 나머지 조말생의 갖추어 주선하여 아뢰었던 공이 원종 공신의 밑에 있지는 아니하니, 병든 신하의 미친 말이라도 혹 취할 것이 있으시면, 정현·말생 등의 충성과 훈공을 성상의 재량으로 등분하시어 병조(兵曹)에 선지(宣旨)를 하시와, 주상 전하에게 계하여 그대로 받들어서 시행하게 하시어 인심을 수습하시고, 뒷 세상으로 하여금 전하께서 맏아들을 폐하고 어진 이를 세운 거조가 공론으로 되었다는 것을 알리게 하시고, 또 양녕군(讓寧君)으로 하여금 자신이 공론에서 용납되지 못하였음을 알게 하여, 원망하고 미워함이 없게 하면, 공정한 도에 있어 다행할 일이라 하겠나이다. 또 신은 본디 아무런 공훈도 없는데, 외람하게도 공신의 반열에 처하여, 부귀가 이미 극진하게 되었나이다. 신병이 계속되어 요량하오니, 이 세상에 오래 있지도 못할 것을 알겠으니, 다시 무엇을 더 바랄 것이 있겠나이까. 특히 받은 은혜가 깊고 무거워서, 비록 보답한 공효는 없으나, 여러 사람의 구구한 정성과 같이 하기는 어려운 것이므로, 진실로 아는 것은 말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이 충성을 죽은 뒤에야 알고자 하여, 감히 미친 말을 올려 천청(天聽)에 번독케 하오니, 오직 성명(聖明)께서 불쌍히 여겨서 살피소서.” 하였다. 상왕이 보고 말하기를,
“다른 사람이 이 글을 보면 반드시 한푼어치 값이 없는 것이라 할 것이다. 또 그 당시에 큰 의논을 결정하기는 실로 나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밖의 의논으로 된 것이 아니어늘, 은(?) 등이 무슨 공이 있으며, 말생 등은 말만 출납(出納)하였을 따름이니, 또 무슨 공이 있겠는가.” 하고, 드디어 그대로 접어두고 정원(政院)에 내리지 아니하였다.
【원전】 2 집 448 면 【분류】 *왕실-종친(宗親) / *인사-관리(管理)
*《 세종 020 05/05/27(병오) / 권현·김구덕·황희·김여지·이징 등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
권홍(權弘)으로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으로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황희(黃喜)로 예조 판서, 김여지(金汝知)로 의정부 참찬, 이징(李澄)으로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 박실(朴實)로 좌군 도총제(左軍都摠制), 조흡(曹洽)으로 우군 총제(右軍摠制), 박구(朴矩)·이춘생(李春生)은 모두 좌군 총제, 정효문(鄭孝文)은 중군 동제총제(中軍同知摠制), 유사눌(柳思訥)은 한성부 윤(漢城府尹), 정흠지(鄭欽之)로 사헌 집의(司憲執義), 김종서(金宗瑞)로 우헌납(右獻納), 조계생(趙啓生)으로 전라도 관찰사로 삼았다.
【원전】 2 집 542 면 【분류】 *인사-임면(任免)
*《 세종 025 06/07/08(신사) / 황제에게 처녀를 진헌하게 하고 진헌색을 설치, 판돈녕 김구덕 등을 제조로 삼다 》
주문사(奏聞使) 원민생(元閔生)과 통사(通事) 박숙양(朴淑陽)이 먼저 와서 계하기를,
“황제가 원민생에게 이르기를, ‘노왕(老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어 건어(乾魚)에 이르기까지 진헌하지 않는 것이 없었는데, 이제 소왕(小王)은 지성으로 나를 섬기지 아니하여, 전날에 노왕이 부리던 화자(火者)를 달라고 하였는데도 다른 내시를 구해서 보냈다. 짐은 늙었다. 입맛이 없으니 소어(蘇魚)와 붉은 새우젓과 문어 같은 것을 가져다 올리게 하라. 권비(權妃)가 살았을 적에는 진상하는 식품이 모두 마음에 들더니, 죽은 뒤로는 무릇 음식을 올린다든가 술을 양조한다든가 옷을 세탁하는 등의 일이 모두 마음에 맞지 않는다.’ 하니, 내관(內官) 해수(海壽)가 황제 옆에 서 있다가 민생에게 이르기를, ‘좋은 처녀 2명을 진헌하라.’ 하니, 황제가 흔연(欣然)하여 크게 웃으면서,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음식 만들고 술 빚는 데 능숙한 시비(侍婢) 5, 6인도 아울러 뽑아 오라.’ 하고, 민생에게 은 1정(丁)과 채단(綵段) 3필을 하사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전날 화자(火者)에 대한 일은 내가 황제가 노할 것을 모른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제 그 말은 처녀를 얻고자 하여 한 말이냐.” 하고, 즉시 정부와 육조를 불러 함께 의논하고, 중외(中外)에 혼인하고 시집 보내는 것을 금지하고 진헌색(進獻色)을 설치하고 판돈녕 김구덕과 판한성 오승과 예조 판서 신상으로 제조를 삼았다.
【원전】 2 집 611 면 【분류】 *외교-명(明) / *왕실(王室) / *인사-임면(任免) / *무역(貿易)
*《 세종 029 07/07/11(무인) / 윤대를 행하다. 판돈녕 김구덕을 홀로 인견하다 》
윤대를 행하였다. 판돈녕(判敦寧) 김구덕(金九德)이 입대(入對)하였는데, 임금이 홀로 앉아 좌우 시신을 물리치고 인견(引見)하였다.
【원전】 2 집 681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국왕(國王)
*《 세종 030 07/12/22(정해) / 대신들을 포함하여 술잔치를 벌인 도총제 이순몽의 죄를 적용할 율을 올리게 하다 》
사헌부에서 계하기를,
“도총제(都摠制) 이순몽(李順蒙)이 손[客]을 청하여 풍악(風樂)을 잡히며 술잔치를 벌이니, 호조 판서 안순(安純)·전 총제 정효문(鄭孝文)·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 박규(朴葵) 등 48인이 각기 술과 안주를 준비해 가지고 순몽의 집에 모여 마셨습니다. 그들이 나라의 금령(禁令)을 두려워하지 아니한 행위는 실로 부당(不當)합니다. 청하옵건대 율(律)에 따라 처벌하게 하소서.” 하였다. 임금이 “안순 등 공신의 자손들은 다 용서하고 그밖의 전 목사(牧使) 김소(金邵) 등만은 적용할 율(律)의 조문을 지적하여 올리라.” 하였다. 순(純) 등이 예궐(詣闕)하여 은사(恩赦)를 감사하였다. 임금이 대언 정흠지(鄭欽之)를 시켜 전교(傳敎)하기를, “무식(無識)한 무리라면 본래부터 꾸짖을 값어치가 없거니와, 이번에 모여서 술을 마신 자들은 다 사리(事理)를 아는 조사(朝士)들이며, 또 정사를 잡고 있는 대신 중에도 참여한 사람이 있다. 만약 이와 같은 일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매양 법사(法司)에서 논죄(論罪)를 청할 때마다 공신의 자손이라고 일컫고 죄를 면하는 것이 어찌 아름다운 명예가 되겠는가. 지금부터는 조심하라.”
하였다. 이 모임에 공신의 적장(嫡長)이 30여 인이었다. 그리고 집정 대신이라고 말한 것은 좌의정 이원(李原)이며, 판돈녕(判敦寧) 김구덕(金九德)도 역시 회음(會飮)에 참여하였었다.
【원전】 2 집 707 면 【분류】 *사법-탄핵(彈劾) / *사법-법제(法制)
*《 세종 034 08/10/08(무진) / 한양에 머물러 있는 종친과 대신들에게 각각 노루 한 마리씩을 하사하다 》
서울에 머물러 있는 종친과 좌의정 이직(李稷)·영돈녕(領敦寧) 권홍(權弘)·판돈녕(判敦寧) 김구덕(金九德)·판부사(判府事) 변계량(卞季良)·판한성(判漢城) 오승(吳陞)·이조 판서 이맹균(李孟畇)·호조 판서 안순(安純)·예조 판서 신상(申商)·형조 판서 정진(鄭津)·대사헌(大司憲) 최사강(崔士康)·대제학 이수(李隨)·참찬 허조(許稠)·우의정으로 치사(致仕)한 유관(柳寬)에게 각각 노루 한 마리씩을 하사하였다.
【원전】 3 집 45 면 【분류】 *왕실-행행(行幸) / *왕실-사급(賜給) / *군사-병법(兵法)
* 《 세종 035 09/02/08(병인) / 상호군 김오문의 집에 납채케 하다 》
이른 새벽에 임금이 장차 세자빈(世子嬪)을 맞이하려고 하여 면복(冕服) 차림으로 근정전에 나아가니, 문무의 여러 신하들이 시위(侍?)하기를 의식대로 하였다. 판부사(判府事) 최윤덕(崔閏德)과 호조 참판 성엄(成헩)에게 명하여 정사(正使)와 부사(副使)로 삼아, 상호군(上護軍) 김오문(金五文)의 집에 납채(納彩)하니,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그 아들 오문(五文)과 함께 공복(公服)을 갖추고 예궐하여 사은(謝恩)하였다.
【원전】 3 집 60 면 【분류】 *왕실-의식(儀式) / *왕실-비빈(妃嬪) / *의생활(衣生活)
*《 세종 036 09/04/09(정묘) / 김씨를 왕세자의 휘빈으로 봉하다 》
김씨(金氏)를 왕세자(王世子)의 휘빈(徽嬪)으로 봉하였다. 임금이 원유관(遠遊冠)을 쓰고, 강사포(絳紗袍)를 입고 근정전(勤政殿)에 거둥하여 문무 여러 신하를 거느리고 판부사 최윤덕(崔閏德)과 병조 참판 성엄(成헩)을 보내어 왕세자빈에게 책인(冊印)을 주었다. 판돈녕 김구덕(金九德)이 그 아들 총제(摠制) 김오문(金五文)을 데리고 대궐에 나아와 임금께 사은하였다.
【원전】 3 집 67 면 【분류】 *왕실-비빈(妃嬪) / *왕실-의식(儀式)
*《 세종 039 10/03/10(임진) / 판돈녕부사 김구덕의 졸기 》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김구덕(金九德)이 졸(卒)하였다. 구덕은 본관(本貫)이 안동(安東)이니 상락군(上洛君) 김묘(金昴)의 아들이다. 나이 19세에 진사(進士)·생원시(生員試)에 합격하고, 음직(蔭職)으로 산원(散員)에 보직(補職)되었다. 여러 번 사헌 규정(司憲糾正)으로 천전(遷轉)되어 잡단(雜端)과 형조 의랑(刑曹議郞)을 거쳐 나가서 단양(丹陽)·청풍(淸風)·한주(韓州)의 세 군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사헌 중승(司憲中丞)으로 전직되어 지사간(知司諫)으로 옮기고, 또 해주(海州)·광주(廣州)·청주(淸州)의 세 주(州)의 목사(牧使)와 연안 부사(延安府使)와 판통례문사(判通禮門事)가 되었다. 딸이 태종전(太宗殿)으로 뽑혀 들어와 명빈(明嬪)이 되었으므로 동지총제(同知摠制)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승진되고, 강원도 관찰사가 되고 들어와서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가 되었다. 또 한성윤(漢城尹)으로서 들어와 천추절(千秋節)을 하례하고, 조금 후에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가 되었다. 졸(卒)하매 조회를 3일 동안 폐하고, 조문(弔問)하고 부의(賻儀)를 내리고, 안정(安靖)이란 시호(諡號)를 내렸으니, 화합함을 좋아하여 다투지 않는 것을 안(安)이라 하고, 너그럽고 즐거워하여 고종명(考終命)한 것을 정(靖)이라 한다. 성품이 온량(溫良)하여 사람들을 예(禮)로서 대접하고 평소에 사장(詞章)을 좋아하여 시(詩) 읊기를 폐하지 않았다. 아들은 김오문(金五文)이었다.
【원전】 3 집 120 면 【분류】 *인물(人物) / *왕실-사급(賜給)
*《 세종 040 10/04#11(임진) / 김구덕에게 안정이라는 시호를 준 것이 옳지 않다고 허성이 아뢰다 》
우대언 허성(許誠)이 계하기를, “김구덕(金九德)의 시호를 안정(安靖)이라고 지어 준 것은 옳지 않은 것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옛날에도 임금과 신하의 시호가 같은 것이 있었는데, 무엇이 혐의쩍은가.” 하고, 조금 뒤에 상정소(詳定所)에 명하여 예전 제도를 상고하여 아뢰라고 하였다가, 곧 중지시키고 말하기를, “시호라는 것은 평생의 행장의 잘잘못을 근거로 하는 것이니, 벼슬을 제수(除授)하는 일보다 더 중대한 것이다.” 하였다.
【원전】 3 집 128 면 【분류】 *인사-관리(管理) / *인물(人物)
*《 세종 040 10/04#13(갑오) / 상정소에서 김구덕의 장사에 휘빈이 친히 가서 치전하게 하도록 건의하다 》
상정소(詳定所)에서 계하기를,
“삼가 당(唐)나라의 제도를 상고하여 보건대, ‘동궁(東宮)은 비(妃)의 부모가 사망하였을 때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치전(致奠)하고, 비의 조부모에게는 하지 아니하며, 동궁비는 조부모가 사망하면 분상(奔喪)하고, 장사 때에도 가며, 연상(練祥) 때에도 간다.’ 하였습니다. 비옵건대 옛 예(禮)를 조아서, 지금 김구덕(金九德)에게 치제하고, 장사 때가 되어서는 휘빈(徽嬪)이 친히 가서 치전하게 하소서. 또 《문공가례(文公家禮)》에 자손으로서 장사 전에는 글로써 고한다는 문사(文辭)가 없사오니, 청컨대 제문은 그만두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원전】 3 집 128 면 【분류】 *풍속-예속(禮俗) / *어문학-문학(文學) / *왕실-종친(宗親) / *왕실-비빈(妃嬪)
*《 세종 040 10/04#16(정유) / 판돈녕 김구덕에게 내린 제문 》
판돈녕 김구덕에게 사제(賜祭)하니, 그 제문에 말하기를,
“신하로서 충성하고 공경하는 마음이 처음이나 끝이나 변함이 없었으니, 국가가 그를 포창하고 높여 주는 은전(恩典)은 마땅히 영광과 애도의 뜻을 겸비해야 할 것이로다. 경은 도량이 너그럽고 품행이 방정하며, 타고난 자질이 순후하며 온화하고 의젓하였도다. 대대로 벼슬한 집안의 후손으로서 여러 임금의 조정에서 문무 백관들의 의표(儀表)가 되었도다. 정사에 참예하여 강령을 잡으니 시책(施策)에 불가(不可)한 것이 없었으며, 목민관과 관찰사가 되어 가는 곳마다 성망(聲望)이 있었도다. 가문(家門)은 동관(쪐管)의 상서(祥瑞)를 열어 일표(日表)의 은혜를 입었으며, 자손이 산초나무 씨처럼 번성하는 경사가 넘쳐서 춘궁(春宮)의 배필도 나왔도다. 진실로 대대로 집안에 전해 내려오는 적덕(積德)이 그 몸에 있지 않았다면, 어찌 능히 나라와 더불어 영세(永世)토록 아름다움을 같이할 수 있었겠는가. 전번에 판돈녕의 직임을 주어 친애하고 존경하는 뜻을 표시하고, 백세의 장수(長壽)를 누리어 길이 자손들의 영광스러운 봉양을 받기 바랐더니, 어찌 생각지도 아니하여 갑작스리 서거하였는가. 부고를 듣자 곧 조휼(弔恤)의 예제를 갖추고 이미 은혜를 절도있게 하여 시호(諡號)를 내리고, 또 치전(致奠)하여 애도(哀悼)의 정(情)을 표시하노라. 아아,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는 것은 비록 꼭 이르는 이수(理數)이기는 하나, 임금과 신하의 은의(恩義)와 예절이야 어찌 유명(幽明)이 다르다고 하여 다를 수 있겠는가.” 하였다.
【원전】 3 집 129 면 【분류】 *왕실-사급(賜給) / *인물(人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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