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성립(金誠立)1562(명종17)∼1592(선조25)--(서). 허난설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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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당공 소개

2. 주요 사진 자료 소개

3.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4. 배위-허난설헌 소개

 1) 허난설헌

 2) 생애

 3) 친정 가계

 4) 일간지 기고내용

 5) 서울 거주지 자료

 6) 영정

 7) 친필 서화

 8) 묘소

 9) 시비소개

10) 생가 탐방

11) 규원가 소개

12) 신간도서소개

13) 오페라 소개

14) 일화(서당공과 난설헌) 소개

15) 허난설헌집 위작설 모음

16) 허난설헌작품 모음집

17) 허난설헌집 종합 소개

18) 연극 공연 관람기(안사연)

19) 고문헌(백옥루산량문) 경매 입수기

20) 허난설헌 창작소설 소개

21) 각종 문헌 내의 기록 내용

22) 허난설헌의 삶을 통한 여성들의 삶

 

본문

p11.png 4. 허난설헌 소개

4) 허난설헌 관련 모일간지(1995. 5. 25) 기고 내용-태영(군) 종친  (2002. 6. 9. 발용(군) 제공)

 

여자는 태어나면서 어버이를 따르고 혼인 해서는 남편을 섬기며 늙어서는 자식을 따라야 하는 삼종(三從)의 도가 수명처럼 지배하던 가부장적 사회 제도에서 여자에게 필요 한것은 오로지 복종(服從)과 인내(忍耐)였다. 조선사회(朝鮮社會)를 살다간 여인들을 얘기할때 우리에게 먼저 떠올리는 것응 한(恨)이다. 어려서 태어나면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여자로서의 행실을 가르치는 외에는 글공부도 시키지 않았고 출가 해서는 오로지 남편만을 섬기며 시집 살이를 해야했다. 귀먹어리3년 장님3년 벙어리3년으로 지내는 동안에는 가문(家門)을 이을 아들을 낳아야 했고 그러지 못하면 소박데기 신세의 서러움을 십어야 하는 오로지 기다림만이 그네들의 위안 이었다고 한다.

 

이렇듯 울타리속에 갇힌 여인들 이였기에 그들의 한을 시(詩)나 노래속에 담았다. 조선시대 여류시인 중에서 첫손에 꼽는 인물이 허난설헌이다 그에게서는 조선시대 여인들의 한이며 지식인으로 서의 고뇌를 모두 느끼게 한다. 그의 어릴때 이름은 초희(楚姬)였고 자는 경번(景樊)이며 본관은 양천(陽川)난설헌(蘭雪軒)은 호다. 조선시대 여인들중에서 드물게 호를 가졌던것으로 보아 그의 의식세계는 남달랐지만 그 때문에 그의 일생이 얼마나 번뇌에 찼던가를 짐작케 한다. 천품이 뛰어나고 아름다운 용모를 타고나 어렸을 때에는 여신동(女神童) 라고 까지 하였으나 그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와 함께 남편에게서 버림받은 아내로서의 슬품, 자식을 사별하는 어버이로서의 비애를 모두 겪고 삶의 의욕을 잃어 시작(詩作)으로 나날을 보내다가 1589년(선조22년) 3월19일 27세의 일기로 요절한다.

 

허난설헌은 조선명종 18년(1563년)에 동지중추부사를 지낸 허협의 딸로 태어나 명문대가의 안동김씨 김성립과 결혼했으나 원만치 못한 규원과 친정이 역옥에 연루되는 겹친 화액에서 오는 고뇌를 시작으로 도학적인 분위기속에서 학문세계에 눈을뜨게 된다. 그의 문장력은 여성특유의 감상적 시풍에 시세계를 이룩, 작품일부를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 주지번에게 건네주자 중국에서 "난설헌집"이라는 시집이 간행되어 겪찬을 받았으며 일본에까지 애송되었다. 명나라 문장가들 까지도 놀라움을 금치 못헸다는"광한전백 옥류상량문"은 8살때 지었다 한다.

 

허난설헌은 난편에게 버림받은 아픔과 함께 두자식을 병으로 잃고 만다. "작년에 딸 잃고 올해에는 아들을 여의다니 슬프다 광릉땅에 두 무덤이 마주 섰구나.백양나무에 바람 처량이 불고 소나무 숲엔 도깨비 불만 밟다니. 지전을 뿌려 혼을 부르고 술잔을 네 혼에 바치노니 너의 남매 가엾은 혼은 생전처럼 밤마다 정답게 놀고 있으리. 배안에 또 아이 있으나 어찌 장성하기를 바라리 이제 황대사를읊으며 통곡

과 피눈물을 삼키노라" 이렇듯 자식을 잃은 어버이로서의 애끓는 심정을 시로 담았다. 이때 그의 친정에서는 당파싸움에 몰려 오빠 허봉이 갑산으로 귀양을 가는등 설상가상 이었다. 그는 또 인생의 허무함을 뼈저리게 체험했고 천재이기에 어느 사람보다 뜨거운 정열과 애정을 가지고도 번뇌와 우수를 겪어야 했다.

 

그의 무덤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 산29의5 남동향을 바라보고 있고 주위에는 안동김씨의 문중 묘젹 30여기의 무덤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까지 그가 남긴 작품으로서는 시2백11수와 두편의 산문이 전해지는데 그의 시에는 신선의 세계가 즐겨 등장한다. 철저한 남권중심 사회로 자유분방 함이 인정되지않는 폐쇠된 사회,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해도 여자에게는 오히려 허물이되는 사회,삼종의 예와 칠거지약으로 여성을 울타리에 가둬둔 현실 세계에서 새로운 이상향은 그림으로서 정신적인 안식처를 얻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자들은 그의 신선세계가 현실을 부정한 허구적인 세계라기 보다도 현실을 토대로한 미화세계라고 말한다.

허난설헌, 그는 평생에 3가지 한을 가졌다고 하는데 남자아닌 여자로 태어났음이 그 첫째고 조선처럼 좁은사회에 태어나 기개를 펴지 못했다는 것이 둘째, 시재를 겸한 의걸을 남편으로 섬기지 못했음을 원통히 여겼다.

"시대를 앞서간 선각자 허난설헌" 도내의 흩어져 있는 수많은 충신열사 들의 무덤이 세월속에 스러져가고 있음을 보아왔던 것과는 달리 그의 글이 오히려 세월속에서 더 큰빛을 내듯 그는 죽어서도 오늘까지 살고있는듯 하다.

                   1995. 5.25 ...난설헌묘역에서... 김 태 영

 

☞ 위의 글은 군사공파 태영씨가 모 일간지 기고란에 올렸던 글을 대필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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