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사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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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원공 소개 및 연보

  2. 묘소 및 영정

  3.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4. 낙포재 및 신도비

  5. 익원공 제작 <향약제집성방>

  6. <洛圃政案> 소개

  7. 밀직사사공(휘 승) 단소

  8. 삼공신 회맹문

  9. 익원공 신도비문

10. 익원공 시 소개

11. 각종 문헌 기록 내용

12. 해인사사적 기록자료

13. 부조묘 소개

 

 

본문

p11.png 1. 익원공 소개 및 연보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의 손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甸)의 아들.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1377년(우왕3) 집의(執 義)·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2) 지밀직사(密直司)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특진, 뒤에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0년 윤이(尹?)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太祖)를 추대,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이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에는 장자(長子)에게 선위(禪位)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1)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태종1) 좌정승(左政丞)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연락처 : 02)836-5631. 016-792-4078(사무국장-김만길). 시제일은 음력 1월 6일이다.

 

 *관련 연구서적

(2003. 10. 16. 윤만(문) 제공)

1) 資料大韓民國史, 15-17 / 國史編纂委員會 [編] 國史編纂委員會 2001 951.7 ㄱ428ㄷ 1층대출대

2) 박위·金士衡의 對馬島 征伐 /노계현 1995 論文集 20('95.8) pp.141-154 韓國放送通信大學 041.1 155

 

연  대

연              보

1392년(조선개국)

태조원년

7월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여 조선이 개국되자 승문하시랑 찬성사 겸 판상서사사 겸 병조전서 응양위상장군에 제수되었다.

7월 28일 좌명공신 문하시랑 찬성사 판팔위사 상락군에 봉하고  8월 16일 좌명개국공신호를 받았다. 이는 조선왕조에서 책훈되는 14인 공신의 한분이다.

8월 19일 공신들이 왕에게 잔치를 베풀고 공신의 부인들도 중궁(왕비)에게 시연하였다.

12월 문하우시중을 제수하고 상락백 식읍 1천호 식실봉 3백호의 봉작을 받았다.

태조5년 1396년

문하 우정승으로 오도병마도처치사에 임명되어 대마도원정군을 발하였다.

도주로부터 조공의 약속을 받고 익년 정월에 개선하였다.

태조6년 1397년

10월 6일 세자의 혼인을 관장하는 가례도감을 세우고 영삼사사 이화 우정승 김사형으로 제조를 삼았다. 12월 16일 김사형으로 겸판사헌부사를 삼았다.

태조7년 1398년

1월 11일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이 노비 판정도감의 일을 맡았다.

4월 26일 신도가 낙성되어 좌정승 조준과 우정승 김사형에게 신도팔경병풍을 하사하였다.

윤 5월 18일 양정에서 봉화백 정도전 참찬문하 이지란 월성군 설장수 문하찬성사 성석린을 불러 사신으로 갔던 일을 위로했는데, 판문하부사 심덕부 영삼사 권중하 좌정승 조준 우정승 김사형 의성군 남은이 잔치에 배석하였다.

이들 기로는 왕조의 중흥에 공효가 지대하며 이의 기능은 조직 활동에 표출되었다.

9월 1일 비로소 친왕자를 공으로 삼고 종친후로 정1품을 백으로 삼아 봉작제를 이루니 김사형을 우정승으로 삼았다.

왕자의 난에 입궐하여 적장자를 세자로 삼기를 청했다. 정종이 내선을 받자 공을 논하여 1등을 삼고 동덕정란사공신호를 받고 우정승으로 삼았다.

정종1년 1399년

6월 27일 우정승으로 명나라 건문황제 등극을 축하하는 하례사가 되어 가서 정종의 선위 사실을 승인받았다.

12월 왕의 허락을 받아 사직을 했다.

태종1년 1401년

3월 태종이 즉위한 후 좌정승이 되었다.

태종2년 1402년

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를 이무(李茂) 이회(李 )와 같이 제작하였다.

10월 사임하니 영사평부사를 삼고 달포가 지나 부원군이 되고 사저로 나갔다.

태종5년 1405년

64세로 기영회(기로회)에 입회하였다.

태종7년 1407년

7월에 향수 67세로 졸하니 시묘3일 유자부대언 윤수 치제하고, 시호는 익원공이다.

아들은 둘이며, 육(陸)은 동지중추공 승(陞)은 밀직사사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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