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고려·조선의 문신. 자는 평보(平甫), 호는 낙포(洛圃) 상락후(上洛侯) 영후(永煦)의 손자. 부지밀직사사(副知密直司事) 전(甸)의 아들. 음보(蔭補)로 앵계관직(鶯溪館直)이 된 후 감찰규정(監察糾正)을 거쳐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조준(趙浚) 등과 함께 대간을 지냈고, 1377년(우왕3) 집의(執 義)·개성부윤(開城府尹)이 되어 보리공신(輔理功臣)의 호를 받았다. 이어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이 있은 뒤에는 교주강릉도 도관찰출척사(交州江陵道都觀察黜陟使)로 나갔고, 1390년(공양왕2) 지밀직사(密直司)로 대사헌을 겸하다가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 특진, 뒤에 삼사 우사(三司右使)가 되었다. 1390년 윤이(尹?) · 이초(李初)의 옥이 있은 뒤 그 당을 둘러싸고 찬성사 정몽주와 대결하여 서로 탄핵하였다.
1392년 삼사 우사 · 동 판도평의사사로 있다가 여러 장상(將相)과 함께 이성계(李成桂:太祖)를 추대, 개국공신 1등에 봉해지고 문하시랑찬성사(門下侍郞贊成事)로 판상서사사(判尙瑞司事)와 병조전서(兵曹典書)를 겸임하였다. 이 해 12월 문하우시중에 제수되고, 상락백(上洛伯)에 봉해졌다. 개국공신 1등이 되고, 이어 문하우시중(門下右侍中)에 상락백(上洛伯)으로 봉해졌다. 그 후 좌정승을 지냈고 태조 7(1398년) 제 1차 왕자의 난에는 장자(長子)에게 선위(禪位)하여야 한다고 주장했고, 정종이 즉위하자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이 되었다. 1399년(정종1) 등극사(登極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 1401년(태종1) 좌정승(左政丞)에 복직되고, 이듬해 영사평부사(領司平府事)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 되어 공직에서 물러났다.
벼슬을 하면서 한 번도 탄핵받은 일이 없었다. 시호는 익원(翼元)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목왕리에 있다. 연락처 : 02)836-5631. 016-792-4078(사무국장-김만길). 시제일은 음력 1월 6일이다.
*관련 연구서적 (2003. 10. 16. 윤만(문) 제공) 1) 資料大韓民國史, 15-17 / 國史編纂委員會 [編] 國史編纂委員會 2001 951.7 ㄱ428ㄷ 1층대출대 2) 박위·金士衡의 對馬島 征伐 /노계현 1995 論文集 20('95.8) pp.141-154 韓國放送通信大學 041.1 15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