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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원공께서 제작하신 우리나라 최초의 세계지도--
1) <지도 설명> (2002. 2. 영환(문) 제공)
일본 교토에 있는 류코쿠(龍谷)대학 도서관에는 아주 귀중한 지도 한장이 있습니다.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고지도이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로 알려져 있습니다.이 지도는 익원공께서 좌의정으로 계실때 우의정 이무와 함께 만드셨습니다. 混一疆理曆代國都之圖 = 왜 만들었나? 조선 초기 수도 이전과 행정 구역의 개편, 그리고 압록강ㆍ두만강 유역 일대의 영토 회복과 주민 이주 등 일련의 국가적 사업을 추진하면서 조선 왕조는 각 지역에 대한 정확한 지리 정보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 초기부터 지도와 지리지의 편찬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또한 대외적으로는 불안정한 북방 영토 및 고려 말 이후 잦은 왜구의 침입 등에 대비하기 위해 세계 지도의 제작을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도 제작은 행정ㆍ국방상의 필요성 이 외에 조선 왕조의 국가적 권위와 왕권을 확립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즉, 중국 중심의 세계에 조선 왕조가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음을 세계 지도를 통하여 보여줄 수 있었다. 조선은 세계 지도를 만들기 위해 우선 사신을 통하여 다른 나라의 지도를 수집하였다. 그리고 지도 제작에 조정의 중신들(좌정승과 우정승)이 직접 참여하였는데, 이러한 사실에서 세계 지도의 제작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사업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어떻게 만들었나? 조선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전통적인 중국의 세계 지도에는 중국과 주변 지역만 그려져 있을 뿐 유럽과 아프리카는 나타나 있지 않았다. 그런데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등 당시 알려진 세계가 모두 그려져 있다. 이 중 동남 아시아, 인도, 이슬람은 교류가 있었고, 또 그 곳에 다녀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그 지역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럽과 아프리카는 교류도 없었고 가 본 사람도 없었는데 어떻게 100여 개의 유럽 지명과 35개의 아프리카 지명을 지도에 기재할 수 있었을까? 이는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만들 때 참조한 지도들을 통하여 추리할 수 있다. 지도를 만드는 데 참여한 권근의 발문에 의하면, 이 지도는 중국에서 들여온 『혼일강리도』와『성교광피도』를 좌정승 김사형과 우정승 이무, 검상 이회가 검토한 후 합쳐 하나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성교광피도에는 요수(遼水, 중국의 랴오허) 동쪽과 우리나라가 자세하게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나라와 일본에 대한 지도를 첨부하여 새로운 지도로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결과적으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이택민의 성교광피도에서 아랍 지역을, 청준의 혼일강리도에서 중국을, 이회의 팔도지도와 동서가 남북으로 된 행기도(行基圖)에서 각각 우리나라와 일본을 참조한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는 아랍ㆍ중국ㆍ한국ㆍ일본 지도가 합쳐져서 편집된 세계 지도이며, 유럽과 아프리카의 지명은 성교광피도에서 인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에는 신대륙이 빠져 있는데, 이는 이 지도가 신대륙 발견(1492)보다 무려 90년이나 앞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얼마만큼 뛰어난가? 전체적인 지도의 모습을 보면 지도 가운데에 중국이 있고, 중국 오른편에는 조선과 일본이, 외편에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자리납고 있다. 중국과 조선은 매우 정확하며, 하천과 도서를 자세히 기입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강은 매우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중국 남부 지방은 마치 수많은 섬처럼 보인다. 그 중에서도 중국의 황하(黃河)는 다른 강들과 달리 노란색으로 표현되었으며, 만리 장성도 뚜렷이 나타나 있다. 반면 우리나라는 산줄기가 비교적 자세히 표현되어 있어 두 나라의 지형적 특징을 비교할 수 있다. 일본은 비록 방위는 틀리지만 혼슈(本州)와 큐슈(九州)의 형태가 비교적 정확하게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의 가장 큰 특징은 한반도가 다른 지역에 비해 매우 크게 그려져 있다는 것이다. 한편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반도는 실제보다 훨씬 작게 그려져 있지만 모양은 비슷하다. 특히 아프리카의 가운데에는 사하라 사막(黃沙)이 그려져 있고, 북쪽으로 흐르는 나일 강도 나타나 있다. 그러나 지중해는 바다가 아닌 강으로 표현되었다. 이에 비해 인도와 인도차이나 지역은 오류가 심하다. 인도는 반도가 아니라 단순한 해안선으로 연결된 육지처럼 표현 되었고, 인도차이나의 여러 나라들은 남쪽 바다 위의 섬들로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일부 지역들은 너무 과장되거나 왜곡되어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도는 동ㆍ서양을 막론하고 당시에 그려진 세계 지도 가운데 가장 뛰어난 지도임에 틀림없다.
지도에 숨겨진 것들, 개방적이고 과학적인 조선 창업기의 문화적 배경 아래에서 만들어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다. 먼저 이 지도는 동ㆍ서양 간의 문화 교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지도는 인도가 반도로 표현되지 않은 점과 나일 강의 수로 형태로 보다 톨레미(Ptolemy)식 지도의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은 것으로 보인다. 톨레미식 지도의 영향을 받은 이슬람 지도가 원나라에 전해지고, 한역(漢譯)된 원나라의 전도가 조선으로 전해진 것이다. 따라서 이 지도에 나타난 유럽, 아프리카, 서아시아 지역은 지명은 중세 이슬람의 지리학자 알 이드리시가 만든 세계 지도에 나오는 지명을 한자로 번역한 것이다. 또 이 지도는 당시 사람들의 지리적 사고를 보여 준다. 이 지도에는 우리나라가 일본보다 4배정도 크게 그려져 있으며, 심지어 아프리카 대륙보다도 더 크게 그려져 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이 지도의 가운데에 놓여 세계 육지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보아 중화적 세계관이 반영되어 있다. 한편 우리 나라와 중국과의 거리는 매우 가깝게 그린 반면, 일본과의 거리는 매우 멀게 표현했고, 도서 방향의 일본을 남북 방향으로 나타내었다. 즉, 우리나라에 중요하고 우리가 지향하는 중국은 크고 가깝게 그린 것이고, 중요하지 않고 관심도 적은 일본은 멀고 작게 나타낸 것이다. 현대인들도 이와 같은 지리적 사고를 종종 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국가적 관심을 가지고 다양한 자료를 수집하여 만든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당시에는 가장 뛰어난 세계 지도였으며, 현재에는 세계에 자랑할 만한 문화 유산이다.그러나 이러한 세계 지도 제작의 전통이 이후 계승되지 못하여 참으로 안타깝다.
[지리교사 모임 '지평', "지리로 보는 세상"에서]
2)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지(歷代帝王混一疆理圖誌) (2003. 6. 21. 태서(익) 자료 제공) (1) 출전 : 동문선 제105권 지(志) 천하가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과 밖으로는 사해(四海)가 몇 천만 리가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수척(數尺)되는 넓이에 그리게 되니, 자세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그림 그리는 자들이 대개 다소 삭제하고 간략하게 하는데, 오직 오문(吳門)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聖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구비하였으며, 역대 제왕 국도 연혁(歷代帝王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 1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어 실렸다. 건문(建文) 4년 여름에 좌정승(左政承) 상락 김공(上洛金公) 사형(士衡)ㆍ우정승(右政承) 단양 이공(丹陽李公) 이름은 무(茂) 이 정사를 화[變]하게 다스리는 여가에 이 그림을 참고하여 연구하고 검상 이회(檢詳李會)에게 명하여,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고 광피도를 합하여 한 도를 만들었다. 그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 나라 강역에는 택민의 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빠져서 간략한데, 지금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을 붙여 새로 그림을 새겨 이룩하니, 조리가 정하여 볼 만하게 되었으니, 참으로 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개 지도를 보면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알게 되니,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있었다. 김ㆍ가 두 공이 그림에 힘쓰고 힘썼으니, 그 규모와 국량의 큰 바를 알 수 있다. 근(近)은 재주도 없이 인재의 부족한 때를 당하여 참찬(參贊)으로 두 공의 뒤를 따랐으므로, 이 그림이 이룩됨을 즐거이 보고, 깊이 다행히 여기는 바이다. 이미 내가 평일에 책을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뜻을 이루었고, 또 내가 다른 날 물러가 시골에 있으면서도 누워서 강산에 놀게 되는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면서, 이 말을 그림 아래에 쓰는 바이다. 건문(建文) 4년 가을 8월 일에 기록한다.
(2)양촌선생문집 제22권 발어류(跋語類) 역대 제왕 혼일강리도(歷代帝王混一疆理圖)의 지 천하는 지극히 넓다. 안으로 중국에서 밖으로 사해에 닿아 몇 천만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 것을, 요약하여 두어 자 되는 폭(幅)에다 그리니 자세하게 기록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지도를 만든 것이 대개 소략(疏略)한데, 오직 오문(吳門) 이택민(李澤民)의 〈성교광피도(聲敎廣被圖)〉는 매우 상세하게 갖춰졌으며, 역대 제왕의 국도 연혁(國都沿革)은 천태승 청준(天台僧淸濬)의〈혼일강리도(混一疆理圖)〉에 갖추 실렸다. 건문(建文 명 혜제(明惠帝)의 연호) 4년(태종 2, 1402) 여름에 좌정승 상락(上洛 본관) 김공 사형(金公士衡)ㆍ우정승 단양(丹陽 본관) 이공 무(李公茂)가 정사를 보살피는 여가에 이 지도를 참고 연구하여 검상(檢詳) 이회(李?)를 시켜 다시 더 상세히 교정하게 한 다음에 합하여 한 지도를 만들었다. 요수(遼水) 동쪽과 우리나라 지역은 택민의〈광피도〉에도 또한 많이 궐략되었으므로, 이제 특별히 우리 나라 지도를 더 넓히고 일본(日本) 지도까지 붙여 새 지도를 만드니, 조리가 있고 볼 만하여 참으로 문 밖을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다. 대저 지도를 보고서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아는 것도 또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에 한 도움이 되는 것이니, 두 공이 이 지도에 정성을 다한 데에서도 그 규모와 국량의 방대함을 알 수 있다. 근(近)은 변변치 못한 재주로 참찬(參贊)이 되어 두 공의 뒤를 따라 이 지도가 완성됨을 보고 기뻐하였으며 매우 다행하게 여기는 바다. 평일에 책에서 강구하여 보고자 하던 나의 뜻을 이미 이루었고, 또 내가 다른 날 물러가 시골에 있으면서 누워서 유람하는 뜻을 이루게 됨을 기뻐하며 이 말을 지도 아래 쓴다. 이해 가을 8월 일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 제작연대 : 1402년 - 지도크기 : 세로 171cm, 가로 164cm - 제 작 자 : 의정부(김사형, 이무) - 지도소장처 : 류코쿠대학(원본), 서울대학교 규장각(모사본) 규장각 모사본은 지리학자 이찬 교수가 일본에서 촬영해온 사진을 바탕으로 자비를 들여 화원과 서예가에게 위촉해서 제작한 것이다. 그 후 이 모사본은 규장각에 기증되었다. 원래의 지도는 상단에 제목이, 하단에는 권근이 쓴 설명문이 붙어 있다.
- 지도의 특징 중국지도와 일본지도를 들여오고, 조선의 지도를 함께 합쳐서 그린 세계지도. 조선과 중국이 상세하고 과장된 반면, 아프리카 대륙과 아라비아 반도는 실제보다 훨씬 축소되어 있다. 인도 반도는 그 형체가 나타나 있지 않고 해안선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일본도 방위가 뒤바뀐 채 축소 왜곡되어 있다. 인도의 해안선 처리, 아프리카 대륙의 나일강의 윤곽 등은 고대 그리이스의 지식에 근원을 둔 것이다. 그리이스의 지식은 중국(원나라)으로 흘러 들어왔고, 그것이 다시 조선에 전해짐으로써 당시로써는 최고 수준의 이 세계지도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
- 다른 사본들 북경고궁박물관에서 소장된 <대명혼일도>는 중국지도인데, 그 윤곽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의 중국부분과 유사하다. 일본 천리대학에서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는 류코쿠대학 소장본에 비해 아프리카 남단에 섬이 훨씬 많이 그려져 있다. 일본 큐슈 본광사에 소장된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는 류코쿠대학 소장본과 거의 유사하다. 《퍼온곳 : http://leeyunggi.com.ne.kr/JOJAKGANGRI.htm》
*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우표로 만들다. (2007. 5. 19.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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