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자점(金自點)1588(선조21)∼1651(효종2)--(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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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서공 소개

 2. 출생 추정지 답사

 3. 교서 소개

4. 자점보 소개

 5. 귀양추정지

 6. 낙서공 구제 차자

 7. 낙서공 정치담론

8. 각종설화소개

 9. 연구문헌

10. 창덕궁 재건기록

11. 낙서공의 옥사

 

12.각종 문헌 기록 내용 종합

1) 연려실 기술

2) 대동기문

3) 비변사등록

4) 만사

 

본문

p11.png 1. 낙서공 소개

조선의 문신. 字는 성지(成之), 호는 낙서(洛書), 익원공(휘 사형)의 후손으로 질(珥)의 5대손. 성혼(成渾)의 문인. 강원도 관찰사 억령(金億齡)의 손자로 아버지는 김함이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을 주도한 조선 중기의 문신이다. 음보(蔭補)로 등용되어 병조좌랑(兵曹佐郞)이 되었으나 광해군 말년에 대북파(大北派)에 의해 삭직되었다가, 1622년(광해군14) 이귀(李貴)·김유(金廋)·신경진(申景玹)·최명길 (崔鳴吉)·이괄(李适) 등과 함께 반정(反正)을 계획하고, 이듬해 3월 홍제원(弘濟院) 밖 세검정에서 이귀·이괄(李适) 등의 군사와 합류하여 광해군과 대북파를 축출하고 인조를 추대하였다. 반정에 성공한 후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훈록되고 호조좌랑(戶曹 佐郞)에 이어 동부승지(同副丞旨)에 특진되었다.

 

당시 집권층인 서인(西人)이 공서(攻西)와 청서(淸西)로 갈라지자 공서에 속하여 김상헌(金尙憲) 등 유림(儒林)을 배경으로 한 청서를 탄압했다. 인조 2년 이괄의 난을 평정하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순검사 임진 수어사(巡檢事臨津守禦使)에 임명되었다. 1630년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1636년 도원수(都元帥)가 되었으나 이 해에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토산(兎山) 싸움에서 참패한 죄로 문외출송(門外出送) 당하고 절도정배(絶島定配)당했다.

 

1640년 풀려나와 강화부 유수(江華府留守)가 되었고, 이어 손자 세룡(世龍)을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이 되었고, 1642년(인조20) 병조판서에 승진, 낙흥부원군(洛興府院君)의 봉함을 받았다. 이때 같은 공서인 원두표(元斗杓)와 세력 다툼을 벌임으로써 공서(功西)가 양분되자 그는 낙당(洛黨)의 영수로서 반대파를 가혹하게 탄압했다.  

 

이듬해 판의금 부사(判義禁府事)로 등극사(登極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우의정에 승진했고, 1644년 좌의정에 봉해지고 영의정에 올라 사은사(謝恩使)로서 다시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후 역모를 꾸몄다는 정적들의 모함에 의해 1651년(효종2) 아들(김익)과 함께 처형 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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