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4) 김수온의 만사 (2007. 5. 18. 태영(군) 제공)
상락부원군 만사 젊은 나이에 과거에 장원하여 일찍이 출신을 하여 검은 머리로 정승의 직위에 들어가 엄연하게 수신(垂紳)을 하시었지 기틀에 밝아 나라를 정립하여 이정(彛鼎)을 빛나게 하였고 표문을 올리어 근왕(勤王)을 하여 황제를 움직이었도다.
은촉이 휘황하여 쌍궐(雙闕)의 새벽 같은데 백양이 적적하니 구원(九原)의 봄이로세 다른 해에 공후의 은총을 알고자 하거든 돌아와 백척의 새로운 풍부한 비석이 있음을 볼지어다.
上洛府院君 挽詞 年少巍科早出身 黑頭入相嚴垂紳 炳機定國光彛鼎 抗表勤王動帝宸 銀燭煌煌雙厥曉 白楊寂寂九原春 他年欲識公候寵 還有豊碑百尺新
출전: 국역 식우집(拭疣集)
김수온 [金守溫, 1410~1481] 본관 영동(永同). 자 문량(文良). 호 괴애(乖崖) ·식우(拭疣). 시호 문평(文平). 1438년(세종 20)에 진사가 되고, 1441년(세종 2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있을 때 세종의 특명으로 집현전(集賢殿)에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을 편찬하였으며, 1445년(세종 27) 승문원교리(承文院校理)로서 《의방유취(醫方類聚)》 편찬에 참여하고, 부사직(副司直)으로 있을 때는 《석가보(釋迦譜)》를 증수(增修)하였다.
1449년(세종 31)에 병조정랑(兵曹正郞)이 되고, 1451년(문종 1) 전농시소윤(典農寺少尹)이 되었으며, 1457년(세조 3) 문과중시(文科重試)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중추원첨지사(中樞院僉知事)가 되었다. 1459년 한성부윤(漢城府尹), 1466년 발영시(拔英試)에 장원하였고, 같은 해에 실시된 등준시(登俊試)에 다시 급제하여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오르고, 세조의 총애를 받았다.
1471년(성종 2)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록되어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해졌으며, 1474년(성종 5) 중추부영사(中樞府領事)에 이르렀다. 학문과 문장에 뛰어나 서거정(徐居正) ·강희맹(姜希孟) 등과 문명(文名)을 다투었으며, 사서오경(四書五經)의 구결(口訣)을 정하고, 《명황계감(明皇誡鑑)》을 국역(國譯)하는 등 국어 발전에 힘썼다. 세종 ·세조 등 불교를 숭상하는 임금을 도와 불경(佛經)의 국역(國譯)과 간행(刊行)에도 공이 컸다. 문집에 《식우집(拭疣集)》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