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자점(金自點)1588(선조21)∼1651(효종2)--(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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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낙서공 소개

 2. 출생 추정지 답사

 3. 교서 소개

4. 자점보 소개

 5. 귀양추정지

 6. 낙서공 구제 차자

 7. 낙서공 정치담론

8. 각종설화소개

 9. 연구문헌

10. 창덕궁 재건기록

11. 낙서공의 옥사

 

12.각종 문헌 기록 내용 종합

1) 연려실 기술

2) 대동기문

3) 비변사등록

4) 만사

 

본문

p11.png 4. 자점보 소개

1) 자점보 소개

(2002. 3.4. 영환(문) 조사 자료 제공)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 402m 의 우뚝 솟은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가 자점보 인데 조선 인조 임금때 인조 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것 휘두르다 역적 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이 쌓았다하여 자점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때 눈독을 들이다가 임금의 총애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물이 있어야 되는데청미천만으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뽑아 써서 근처 일대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이 전설로 보아 김자점공은 치수에도 많은 공이 있었음에도 역적으로 몰린 다음 이렇게 윤색되어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보며 아울러 김자점공의 새로운 자료 발굴에도 관심을 갖을 필요가 있겠으며, 당쟁속에서 희생된 선조의 넋을  다시 한번 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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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점보>(2002. 11. 윤만(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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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족산>(2002. 11. 윤만(문) 제공)

 

2) 백족산과 자점의 보 

(2004. 1. 14. 윤만(문) 제공)

장호원은 남쪽으로 해발402m 의 우뚝 솟은 백족산이 있고 이 백족산 남단을 휘돌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길게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남단에 청미천 상류를 막아 만들어진 보가 자점보 인데 조선 인조 임금때 인조 반정의 공신으로 영의정까지 지내며 권세를 마음것 휘두르다 역적 사건이 발각되어 죽음을 당한 김자점이 쌓았다하여 자점보라 불리워지고 있는데 거기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때 눈독을 드리다가 임금의 총애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물이 있어야 되는 청미천만으로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몰래뽑아 써서 근처 일때가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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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호원-충주 우회도로, 다리 위가 백족산이고 아래가 자점의 보다>

 

3) 자점보 현지 탐방기

(2004. 9. 23. 발용(군) 제공)

백족산은 장호원읍 남서쪽에 우뚝 솟은 해발 402m의 산으로 백개의 발이 달린 커다란 지네가 이 산에 살았다는 전설에서 유래되어 ‘백족산’으로 불리워지기도 한다.   백족산의 서북면은 경사가 완만한 반면,  남동면은 가파른 급경사를 이루어 산줄기가 맺힌 그 밑을  경기도와 충청도의 경계를 이루는 청미천이 감돌아 흐르고 있다.  이 백족산 기슭에 청미천을 막아 쌓은 보(洑)가 있으니,  인조반정의 공신 김자점이 쌓았다고 하여 ‘자점보’  또는  ‘자재미보’ 라 불리워지고 있으며,  여러 가지 유래가 전해온다.

 

<유래 1>

백족산 산중에는 비룡상천형(飛龍上天形)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한다.  이 명당자리에 묘를 쓰면 그 자손이 크게 번성하여 대대손손 부귀영화를 누리게 되낟고 하여 누구나 탐내는 자리였다. 김자점이 이 명당자리를 눈여겨 보아두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政)에 가담하여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으로 권세를 잡게 되자 부친의 묘를 이곳에 썼다.  그러나,  풍수설에 이르기를 비룡(飛龍)은 물이 있어야 마음껏 조화를 부릴 수 있으니,  비룡상천형에는 반드시 그 앞에 큰 물이 있어야 하는데 청미천만으로는 물의 세력이 부족한 것이 한가지 흠이었다.

 

김자점은 수 많은 인부들을 동원하여 청미천을 가로질러 석축을 쌓아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있는 인공호수를 만듦으로써,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비룡상천의 명혈(名穴)이 되도록 하였다. 그 후 가뭄이 들면,  인근지역의 농부들이 자점보의 물을 몰래 뽑아 썼던 탓에 지금의 장호원읍 오남리(梧南里) 일대는 가뭄을 모르는 옥토가 되었다고한다.

 

비룡상천의 명당을 차지하게 된 김자점은  공신으로 득세하고 그의 손자를 효명옹주(孝明翁主)와 결혼시켜 왕실의 외척으로 부원군이 되었으며,  마침내는 최고의 관직인 영의정에까지 오를 수 있었는데 이 것 또한 부친의 묘자리를 잘 쓴 덕분이라고 그 당시의 사람들은 믿었을 것이다.

김자점이 역모죄로 몰려 죽은 후 백족산에 있는 그 부친의 묘를 파헤쳤더니 장례를 지낼 때 엎어서 묻었던 시체가 거의 용의 모습으로 화하여 자점보 쪽을 향해 굴을 뚫고 전진해 가던 중이었더라고 한다.  결국 형리들이 용의 목을 잘랐는데 지금도 백족산 기슭에 있는 이 비룡상천의 명당자리에는 그때 용이 뚫은 굴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것이며,  바람이 몹시 부는 날도 이곳만은 바람기가 조금도 없이 잔잔하다고 한다.  자점보는 지금도 그 형태의 많은 부분이 손상되지 않은 채 남아 있어, 오남리 벌판에 물을 대는 중요한 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유래 2>

백족산에는 금반형이라는 묘자리가 있는데 풍수지리적으로 금반형은 묘자리중에 으뜸으로 김자점이 젊었을 때부터 보아두었는데  인조반정으로 득세하자  부친의 묘를 그곳에 썼다. 그런데 금반형의 부족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묘에서 내려 보이는 곳에 큰 물이 있어야 한다.  청미천의 물만으로는 부족하여 많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고 거기에 사시사철 푸른 물이 고여 있게 하여 부친의 묘를 명실상부한 금반형의 명당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가뭄이 들때에도 근처 양민들이 보의 물을 뽑아 써서 근처 일대는 흉년을 모르는 고장이 되었고 미질이 좋아 임금님께 진상하는 쌀이 되었고 그 덕분에 김자점은 권세를 누릴 수 있었다 한다. 현재 남아 있는 보의 길이는 약5백미터 폭은 넓은 곳은 6미터 좁은 곳은 약 2미터 가량인데 자점보는 지금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업 용수로 긴요하게 쓰여지고 있다. 위의 두가지 유래로 보면 낙서공께서 역모로 돌아가신 후 집권세력에 의하여 전설이 만들어진 느낌이 듭니다(이미 오래전부터 역모를 계획하고 있던 것처럼...)

자점보(일명; 자재미보)는  낙서공께서 치수사업의 일환으로 조성한 것이 분명하며 지금까지도 장호원일대의 중요한 농업용수의 수원지라는 것엔 변함이 없습니다.

 

2004년 9월의 자점보는 2년전 윤만종친께서 방문했을 때에 비하여 형태상의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또 세월이 흐르면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이며 자점보가 자연 소멸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면 당시의 낙서공께서 자점보를 축조하실 때의 애민 정신은 길이길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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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년 자점보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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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전의 자점보 모습(윤만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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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점보를 배경으로..(좌로부터  용주. 항용. 윤만. 주회. 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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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족산을 배경으로...(좌로부터 발용. 윤만. 주회. 용주. 항용)

 

4) 자점보와 정방산성 소개 (2003. 6. 13. 태서(익) 소개)

 

(1) 출전 : 한국 정신문화연구원

(2) 정방산성 : 황해도 봉산군 정방리 정방산에 있는 산성의 성벽. 1633년 당시 도원수였던 김자점(金自點, 1588~1651)의 지휘하에 개축한 것으로 이 성안에 유명한 성불사가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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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자점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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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지둔보(於之屯洑)와 경우궁보(景祐宮洑)는 별개의 보(洑)다 ▣ (2003. 8. 11. 윤만(문) 제공)

 

--재령평야는 원래 멸악(滅惡)·구월(九月)산맥 및 황주(黃州)준평원 사이의 함몰부, 즉 고재령만(古載寧灣)이 황해안 일대의 융기와 재령강 및 지류인 서흥강(西興江) ·은파천(銀波川) ·서강(西江) 등에 의한 퇴적으로 육지가 된 전형적인 충적평야이다.

--재령평야의 생성과정은, 사리원(沙里院) 북쪽에 있는 해식동의 흔적, 약 550년 전에 호수(海跡湖) 밑에서 솟아나온 신천온천(信川溫泉)이 홍수로 매몰된 것을 지금부터 약 200년 전에 다시 파냈다는 옛 기록과 평야 동쪽의 해주선(海州線)과 장연선(長淵線) 분기점인 상해(上海)는 고대에 한인(漢人)들의 상륙지였기 때문에 상해라고 불렀다고 구비전설 등은 말해준다. 그러나 육지화는 그리 오래된 것이 아니어서, 평야 주변의 구릉지에 산재하는 고구려의 고분, 대방군(帶方郡)의 성터, 기타 유적으로 보아 약 1000년 전까지도 평야부는 큰 만(灣)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고, 또 신천온천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약 550년 전에는 육지화가 크게 진척되어 옛 재령만은 담수의 석호로 변한 것을 알 수 있다. 때문에 재령평야는 해발고도 20 m가 넘는 곳이 드물고, 남률면(南栗面) 일부는 만조 때에는 해면하 3 m에 놓인다.

--조선 인조(仁祖) 때 김자점(金子點)에 의해 어지둔보(於之屯洑) ·경우궁보(景祐宮洑) 축조의 공사가 완성됨으로써 재령평야는 한국 유수의 미작지대가 되어 진상미(進上米)로 널리 알려진 양질의 쌀을 산출하였다. 쌀 외에 조 ·밀 ·콩류 ·면화 ·잎담배 등 밭작물이 재배되어 왔고, 활발한 원예농업으로 사과 ·배 ·복숭아 ·참외 등의 산출도 많다. 한편 평야 서연부(西緣部) 구월산 기슭에는 단층선을 따르는 온천대가 형성되어 신천 ·삼천(三泉) ·달천(達川) ·안악(安岳) 등지에 온천이 있으며, 또 주변에 구월산 ·수양산(首陽山) ·장수산(長壽山) ·정방산(正方山) 등의 산과 한사군(漢四郡) ·고구려의 고분 등 유적이 많아 휴양 ·관광지로도 알려져 있다.

(인터넷 검색 - 재령평야)

 

☞ 1636년(인조 21)에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하여 논을 관개하였다. (인터넷 검색 - 농업 수리의 역사)

 

5) 황해도 사리원의 수리사업과 자점보

(2002. 11. 28. 주회(안) 제공)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 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인터넷 검색>간척지 사료작물 재배기술 및 문제점 (축산기술연구소 초지사료과 연구관 임영철)

<우리나라의 간척 역사>

우리 조상들이 간척지 영농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지금부터 1600여년전 신라시대부터 였으며, 간척 자원개발에 국가적인 차원에서 관심을 기울여 온 것은 고려조 고종22년(서기1235년)에 몽고병 침입으로 강화파천 후에 강화를 방어하기 위하여 연안의 제방축조가 고려사에 최초로 기록되어 있고, 그 후에 간척농지 개발에 대한 것은 고종35년(서기1248년)에 병마판관 ★김방경이 ♠안북촌(현 평북안주) 용도에 축조하여 간척농지를 경작하므로서 몽고 병란시 식량을 조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256년에는 군량미 확보책으로 ♠강화도내 제포, 와포, 초포, 이포에 제방을 축조하였다.

 

이조에 와서는 태종14년(서기1414년)에 경기 통진지구(현김포)에 간척지 약 200여석 직이를 사축하였던 기록이 있고, 인조21년(서기1643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김자점에 의해 ♠재령강 연변에 방조제를 축조하여 농지화하고 관개배수까지 갖춘 기록이 있다.

 

*또 다른 자료([새천년을 여는 전북] 2000년 봄호 水利의 고장 - 전라북도.문경민, 새전북신문 정치부장)에 인조21년(1643년)에는 ★김자점(金自點)이 황해도 봉산군에 ♠어지둔보(於之屯洑)를 축조하여 약 500정보의 논을 관개하고, 경기 장호원에 ♠김자점보를 축조했다는 기록이 있다.

 

6) 자점보 이야기(2002. 10. 30. 태서(익) 제공)

<전 략>

공은 정승재임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농업정책에 힘을 기울여 ♠호남지방에 보(洑)를 막고 저수지를 축조하여 지금도 그 이름이 자점보(自點洑)로 통하는 곳이 있으며, ♠황해도 재령은 배수가 되지 않아 갈대가 우거진 황무지였으나 수로를 개척하고 풍부한 수원을 이용하게 됨으로써 곡창지대가 되었다는 사실이 그곳 향지에 실려있고,400여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세인의 입에서 전설로 전해져 공의 은혜를 감사하고 있다고 한다.  또 전국의 치산을 잘하여 서울 홍제원에 낮에도 범이 출모한다는 소문에 인조께서 심히 걱정을 하고 공에게 명하여 대책을 강구하라 하심에 백성을 편안케하였다.

 

7) 노래속의 자점보 (2004. 1. 23. 윤만(문) 제공)

 

 ▣ 노래 속의 자점보 ▣

1930년 초 일제 강점기에 주천리 구린들에서는 홍순구·강순원 등이 동평부락진흥회를 조직하여 아이들에게 야학을 시키고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글을 가르쳤다. 이로 인하여 홍순구·강순원·최성락(주천 최병선의 부친)·강상주(강순원의 부친) 등이 일본인 순사에게 요시찰 인물로 낙인찍혀 행동의 제한도 받고 수시로 불려가 고초를 당했다. 이들은 노래를 만들어 아이들에게도 가르쳤는데 이 노래가 마을 주민들에게도 알려져 모를 심을 때나 같이 모여 일을 할 때 많이 불렸다 한다. 이로 인해 일본인들의 박해는 더 심해 어려움을 겪던 중, 갑신년(1944년)에 큰 장마가 나서 구린들 마을이 휩쓸려가자 이웃 마을로 모두 흩어졌고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백족의 거대한 묘한 자태와

     자점보의 끝임없는 그 물소리에

     신성하고 신비스런 자연 속에서

     평화를 노래하는 우리 동민들

     앞으로 앞으로 같이 나가며

     앞으로 앞으로 전진합시다.

     고생됨을 생각말고 뛰어 나가세

     우리의 동민은 씩씩하도다.

 

☞ 구린들 : 충북 음성군 감곡면 주천리에 있던 마을. 새터 북쪽에 있는 마을이었는데 갑신년(1944년) 장마로 인하여 모두 떠내려가 지금의 새터와 대둔(새터말)으로 이주해 없어졌다. 30여 호나 되는 동네였고 대장간도 있었으며 토질이 비옥하였다.

                                -주천리 최병선 제공-

《출전 : 감곡향토지 pp41/감곡면·감곡향토문화연구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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