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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천체시계-일성정시의 (1)사진1-일성정시의 복원품 *시 대 : 조선시대 세종 19년 (1437년). *소 장 : 세종대왕유적관리소. * 재 료 : 청동. * 복원년대 : 1998년.
(2) 사진2-일성정시의의 계형(界衡)과 정극환(定極環) *시 대 : 조선시대 세종 19년 (1437년). *재 료 : 청동. *복원년대 : 1998년 *그림설명 : 계형은 환의 눈금을 측정하는 용도이며 정극환은 북극을 맞추는데 사용되는 부분이다.
(3) 사진3-일성정시의 구조도
그림설명 : ▶ 바퀴(輪)와 십자거(十字距) 바퀴(輪)는 주천환과 같은 크기로 일성정시의의 관측부에 해당하는 주천(周天), 일귀(日晷), 성귀( 星晷), 그리고 정극환(定極環)을 바치는 환이며 기둥에 서린 용에 물리도록 십자거(十字距)가 이어진 부분이다. ▶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 주천도가 새겨져 있는 환으로 주천도의 1도는 4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세종시대에는 주천을 365.25도로 보았으므로 각 도(度)를 4등분하면 주천환의 주천눈금은 모두 1461개가 되며, 하나의 눈금은 0.25도가 된다. ▶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 태양시를 측정할때 쓰이는 환으로 백각눈금이 그려져 있다. 주천환과 성귀환의 사이에 위치하며 고정된 상태로 주천환, 일귀환과 맞물려 두 환을 움직일 수 있게 되어 있다. ▶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 일귀백각환과 맞물려 가장 안쪽에서 움직이며 도는 두 귀(耳)를 가진 성귀백각환은 일귀백각환처럼 100각이 새겨져 있으며 매각을 6분으로 하였다. 성귀백각환에 새겨져 있는 100각 역시 일귀백각환의 것과 같은 모양이다. ▶계형(界衡)과 정극환(定極環) 계형은 환의 눈금을 측정하는 용도이며 정극환은 북극을 맞추는데 사용되는 부분이다. ▶자루 기록에는 서리고 있는 용(龍)의 길이 즉, 자루의 길이에 대하여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다른 부분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관측에 편리한 구조였을 것이다. ▶대(臺) 직사각형 모양의 대에는 가장자리를 따라 수로(水路)가 있고 수로와 연결된 둥그런 형태의 못(池)이 있다. 이 수로와 못(池)의 용도는 전체적인 수평을 취하기 위함이다. 수로에 물을 채운후 수평을 맞춤과 동시에 여기에 바늘을 띄워 그 자성(磁性)에 의해 자북(磁北)을 찾는 방법도 취하였다.
김돈 선조님의 시계제작에 관여하신 기록을 통해 업적을 조명해보고 있습니다. 당시의 시계는 해시계, 물시계가 있었습니다. 해시계는 정확하지만, 흐리거나, 밤에는 알수없는 단점이 있고,물시계는 계속 시각을 알 수 있지만, 정확하지가 않았습니다. 이에 해와 별의 움직임으로 시각을 재는 방법을 연구하게 됩니다. 이의 완성품이 [일성정시의]입니다. 일성정시의 銘과 序를 김돈 할아버님이 쓰신 것으로 보아 이의 제작, 설계에 직접 참여하셨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우선 일성정시의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조선초기 세종대(世宗代)에는 당시 시각법(時刻法, 또는 時制)인 1일(日)을 12시(時)와 100각(百刻)으로 나누었고, 밤시간은 5경(五更)으로 나누어 시간을 측정하는 많은 종류의 시계가 제작되었다. 그 중에는 자격루, 옥루와 같이 잘 알려져있는 물시계와 앙부일귀(仰釜日晷) 등 여러 종류의 해시계가 있었다. 특히 천문시계의 일종인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는 독창적인것으로서 당시의 과학 기술을 세계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천문시계들은 당시에 사용하였던 다른 계시기(計時器)들과 달리 크게 두가지의 특징이 있다. 첫째는 한양의 북극 고도인 한양의 위도를 정확히 측정하여 일성정시의의 정극환의 방향을 한양에서의 북극고도에 맞추어 사용함으로서 한양을 기준으로한 국가 표준시계라 할 수 있다. 둘째 지구의 자전축 방향인 북극에 맞추어 천문에 사용하는 적도좌표계(赤道座標系)와 일치하도록 설치함으로서 지구의 자전운동으로 인한 하늘의 태양이나 천체의 일주운동의 변화량을 측정하여 주야(晝夜)로 시간을 알 수 있는 주야겸용측시기(晝夜兼用測時器)인 정밀한 천문시계이다. 이것은 낮에 태양뿐 아니라 밤에는 당시의 북극성을 중심으로 항성(恒星)이 규칙적으로 일주 운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고 북극성을 중심으로 천구상에서 회전하는 북극성 주위의 별들의 위치를 측정하여 밤 시간(夜時刻)을 측정하였고, 그 시간을 궁중에 알려주고 또한 자동시보 장치인 자격루의 시각 교정에 사용하였다. 일성정시의의 구조와 원리 그리고 사용법은 세종실록 77권에 실린 김돈의 「간의대기」 서문 중, 「일성정시의명병서」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성정시의는 당시 동양에서 사용하던 원둘레 365.25도를 적용하였으며, 주천환(周天環, 주: 원둘레를 365.25도로 매긴 환으로 1도는 1일을 나타낸다), 일귀백각환(日晷百刻環, 주: 해시계의 눈금을 새긴 환이며, 당시의 하루 시간은 100각이다), 성귀백각환(星晷百刻環, 주: 야간에 항성시를 측정하는 별시계의 환)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용이 이들을 물고 있는 형상을 하도록 하였다. 세종은 이와 같은 일성정시의를 4개를 제작하여 하나는 경복궁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주고 나머지 2개는 평안도와 함길도의 원수영에 내려보내 군사에 활용하도록 하였다. 세종대의 유물은 지금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성종대에 이것을 소형화시킨 소정시의의 유물이 하나 남아있어 홍능 세종대왕기념관에 전시하고 있다. 또한 중종대에도 창경궁에 보루각을 하나 더 건립하면서 일성정시의대를 축조하였는데 이는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보물 851호로 지정되어 있기도 하다. 1980년대에 영국의 Needham박사는 <세종실록>과 유물을 바탕으로 일성정시의를 복원하였다. 최근 이용삼 교수(충북대 천문우주학과)와 필자는 Needham의 복원도를 바탕으로 세종 일성정시의를 복원하는데 성공하였다 일성정시의는 원대의 천문학자 곽수경이 만든 성귀의(星晷儀)를 참고하여 만들었다고 하나 성귀의에 관한 기록은 중국에서 찾아 볼 수 없으며 유물도 남아 있지 않다. 일성정시의는 분명 세종의 발명품으로서 필자는 이를 자격루, 흠경각루, 현주일귀, 측우기와 더불어 세종대의 5대 발명품으로 꼽는다.
(6) <국가표준시계> 일성정시의와 조선시대의 표준시간 글 남문현 건국대 교수, 한국산업기술사학회장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표준시간을 알아내어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까? 조선시대 국가의 표준시계는 보루각 자격루였다. 세종대에 장영실이 처음 만들어 경복궁의 보루각에 설치한 이 시계는 세종 16년(1434년) 7월 초하루부터 국가의 표준시계로 채택되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양의 표준시각을 알렸다. 요즘 우리나라 표준시간을 서울의 경도 127도 30분에 맞춰 정하자는 논의가 일부에서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 이유인 즉 슨, 동경 127도 30분에 위치한 우리 나라가 경도 135도에 맞춘 일본東京의 표준 시각을 쓰고 있어 실제 시각과 30분이나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표준시는 60년대 초, 127도 30분의 표준시로 바꾸어 썼다가 다시 재조정한 시각으로 무엇보다 일본의 표준시가 아닌 세계시에 맞춘 시간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오랜 옛날에는 무엇을 기준으로 표준시간을 정하였을까? 조선시대에는 세계시(world time)가 아닌 한양의 지방시(local time)를 표준으로 삼았다. 세종대에 <칠정산 내편>을 엮은 이후 한양을 기준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각을 정하고 태양이 한양(후반기에 위도 37도 39분 15초로 확정)에 남중하는 시각을 오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도의 개념인 동서편도가 전해지자 기존의 표준 시각이 한양과 연경(북경)의 편도 15도를 감안해 1시간의 시간 차이가 난다는 것을 깨닫기도 하였다. 이번 호에서는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한양의 표준시를 무엇으로 측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표준시계에 맞추었는지 알아보기로 하겠다.
표준시간 알려주기 지금은 우리나라 국립천문대에서 알려주는 표준시보에 시계를 맞추지만 6.25직후 50년대 천문대시설이 빈약하던 시절에는 일본 동경천문대에서 보내주는 낮 12시 시보를 라디오에서 중계하였다. 시간을 맞추려면 손목시계의 용두를 빼어 시계를 정지시킨 다음 기다렸다가 라디오에서 나오는 뚜 뚜 뚜 뚜 소리에 맞추어 용두를 제자리에 끼어 시계가 다시 가도록 해주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어떻게 표준시간을 알아내어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을까? 조선시대 국가의 표준시계는 보루각 자격루였다. 세종대에 장영실이 처음 만들어 경복궁의 보루각에 설치한 이 시계는 세종 16년(1434년) 7월 초하루부터 국가의 표준시계로 채택되어 아침 점심 저녁으로 한양의 표준시각을 알렸다. 이 시계는 기본적으로 인정(人定)·파루(罷漏)와 오정 시보를 위한 것이었다. 자격루 시보에 맞추어 종루에서 인정과 파루에 종을 울렸는데, 종로에 위치한 종루에서 경복궁 안의 보루각에 들어 있는 자격루 시보에 맞추어 종을 치려면 너무 멀어 들리지 않으므로(직선거리로 800미터) 경복궁에서 종루에 이르는 곳곳에 초소를 짓고 경회루 남문→ 광화문→ 병조장문→월차소 행랑→수진방 동구의 병문→의금부→종루의 순서로 자격루 시보를 전달하는 체제를 갖추기도 하였다. 이 제도는 구한말 인정·파루 제도가 폐지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물시계의 기준시간 맞추기 조선시대에는 시간측정용 항아리에 시간눈금을 새긴 잣대를 넣고 물을 흘려 넣어 물이 차 올라 잣대가 뜨는 대로 눈금을 읽어 시간을 알아내는 유입식 물시계(inflow-clepsydra)를 사용하였다. 따라서 하루의 시간을 측정하고 나면 항아리가 물로 가득 차므로 더 이상 시간을 측정할 수 없어 항아리의 물을 비운 뒤에 새로 물을 넣기 시작하여 시간을 측정해야 하는 불편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항아리의 물을 빼고 잣대를 새로 설치하는 동안은 시간 측정이 일시적으로 중단되었으므로 장영실은 측정용 항아리 2개를 만들어 교대로 사용함으로써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묘안을 짜내기도 하였다. 물시계를 새로 시작하는 시각은 오정이며 이 시각을 기준시계(보통은 해시계)로 알아내어 물시계 관리자들에게 알려주면 되었다. 우리가 라디오 시보에 따라 시계를 맞추듯이 기준시계 관리자가 오정이 되었음을 알리는 신호를 물시계 관리자에게 보내면 이것을 신호로 빈 항아리에 물을 흘려 넣기 시작하면 되었던 것이다. 바로 이때 기준시계로 사용된 기기가 일성정시의였다. 日星定時儀라는 이름이 뜻하듯이 이는‘해와 별로써 시각을 결정하는 기기’였다. 즉, 해시계로써 물시계를 교정할 오정시각을 정확히 구하는 기능을 담당하였으며 별시계로써 북극성의 위치를 추적하여 천문시간(항성시)을 구해줌으로써 밤시각을 정확히 측정하고 아울러 365일의 날짜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기능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경복궁에는 북극성을 관찰하기 편리한 만춘전 동쪽에 일성정시의대를 쌓고 일성정시의를 올려 놓아 이곳에서 밤낮으로 담당관리가 시각을 측정하도록 하였다.
(7)<일성정시의 명 병서 (日星定時儀銘 幷序) 김돈(金墩)> 의상(儀象)에 있어서는 말할 것도 없으니, 다 저 요순(堯舜)으로부터 한당(漢黨)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여기지 않음이 없었다. 그 문헌이 경사(經史)에 나타나 있으나 다만 옛일이 이미 요원하여 그 법이 자상하지 못하더니, 우리 전하께서 전고에 뛰어나신 성신(聖神)의 자격으로 만기(萬幾)의 결을에 천문(天文)과 법상(法象)의 이치를 연구하시와 무릇 옛날의 이른바 혼의(渾儀) 혼상(渾象) 규표(圭表) 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 소간의(小簡儀) 앙부(仰俯) 천평(天平) 현주(懸珠) 일구(日구)등의 기구를 빠짐없이 제작하셨으니, 그 하늘을 공경하고 만물의 뜻을 개발하고 천하의 사무를완성케 하시려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날이 한 바퀴 돌자면 백 각(百刻)이 되어 낮과 밤이 각각 절반을 차지하는데, 낮에는 일구(日구)를 추칙하여 대를 짐작하므로 <그에 대한> 기구도 이미 마련 되었거니와 밤에 있어서는 주례(周禮)에 별(星)로써 밤을 분간 한다는 문구가 있고 원나라 역사에도별로써 정한다는 말은 있으나 어떻게 헤아린다는 방법은 말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명령하여 주야의 시각에 대한 기구를 만들게 하고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그 제작은 구리를 사용하여 만들었는데 먼저 바퀴(輪)을 만들어 형세는 적도에 준하고 자루가 있으며 바퀴의 직경은 두 자, 두께는 4푼 넓이는 3치이고 중간에 십자거(十字距)가 있어 넓이는 1치 5푼, 두께는 바퀴와 같고 십자거 가운데 축(軸)이 있어 길이는 5푼 반, 즉경은 2치인데 북으로 면을 하고 그 중심을 갈라 파서 일리(一厘)를 남기어 두께를 하고 그 속에 둥근 구멍을 만들되 풀씨[芥]가 용납할만하게 하였으니, 축(軸)은 계형(界衡)을 관통하고 구멍은 별을 바라보자는 것이며, 아래는 서린 용(龍)이 있어 바퀴 자루를 물었는데, 자루의 두께는 1치 8푼, 용의 입으로 들어간 것이 1자 1치 밖으로 나온 것이 3치 6푼이고 용의 아래는 대(臺)가 있어 넓이는 2자, 길이는 3자 두 치로 못도 있고 뜰도 있으니, 평평한 것을 취한 때문이며 바퀴의 상면에 3환(環)을 만들었으니, 주천 도분환(周天度分環) 일구 백각환(日晷百刻環) 성구 백각환(星晷百刻環)이었다. 그 주천도분환은 밖에 있어 운전하므로 밖으로 두 귀[耳]가 있어 직경은 2자, 두께는 3푼 넓이는 8푼이고 일구 백각환은 중간에 있어 운전하지 않는데 직경은 1자 8치 4푼이고 넓이와 두께는 외환(外環)과 동일하며 성구 백각환은 안에 있어 운전하므로 안으로 두 귀가 있어 직경은 1자 6치 8푼이며, 넓이와 두께는 외환(外環) 중환(中環)과 동일하고 귀가 있는 것은 운전하는 까닭이며, 3개의 환 위에 계형(界衡)이 있으니, 길이는 2자 1치 넓이는 3치 두께는 5푼이고 양쪽머리는 속이 비었는데 길이는 2치 2푼 넓이는 1치 8푼으로 되었으니, 3환의 끄은 선을 가리지 않으려는 까닭이요 허리의 중간의 좌우에 각각 한 용이 있어 길이는 한 자인데 함께 정극환(定極環)을 떠받었으며 정극환은 둘이 있어 외환 내환의 사이에 구진(句陳)의 큰 별이 보이고 내환의 안에 천추성(天樞星)이 보이게 하였으니, 남북의 적도(赤道)를 바르게 한 까닭이요, 외환은 직경이 2치 3푼 넓이는 3푼이고 내환은 직경이 1치 4푼 반 넓이는 4리 두께는 다 2푼인데, 조그만큼 서로 맞다서 십자(十字)와같고 계형(界衡)의 양쪽 머리 빈 곳에 안팎으로 각각 작은 구멍이 있고, 정극외환(定極外環)의 양변에도 또한 작은 구멍이 있어, 가는 노끈으로 여섯 구멍을 관통하여 계형의 양쪽 머리에 맺어 놓았으니 위로 일성(日星)을 바라보고 아래로는 시각을 상고 하자는 것이며, 주천환은 주천의 도수(刀手)를 각하여 매도(每度)에 4분을 마련하고 일구환은 백각(百刻)을 각하여 매각에 6육분을 마련하고, 성구환(星晷環)도 역시 일구환 같이 각하였는데 다만 자정(子正)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면 주천(周天)이 1도(度)를 지난 것과 같이 하는 것이 다를 뿐이며 주천환을 쓰는 술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冬至) 새벽 전 자정을 얻어 계형(界衡)으로써 북극 제 2성(北極第二星)의 있는 곳을 바라보아 바퀴의 변두리에 기록하고 인하여 주천 초도(初度)의 처음에 해당케 한다. 그러나 해가 오래되면 천세(千歲)가 반드시 어긋나므로 수시력(授時歷) 한으로써 상고하여 16년에 기수(寄數)가 있으면 일부분을 물리고 66년에 기수가 있으면, 1일도를 물리고 이에 이르면 모름지기 다시 바라보고 정해야 하며, 북극제이성은 북신(北辰)에 가깝고 가장 빛나고 밝아서 여러 사람들이 보기 쉬운 것이므로 그로써 측후하는 것이요, 일구환(日晷環)은 쓰는 법이 간의(簡儀)와 같고 성구환(星晷環)을 쓰는 술법은 첫해 동지(冬至) 첫날 새벽 전 한밤중 자정을 위시하여 주천(周天)초도의 처음에 해당케 하고 1일에 1도 2일에 2도, 3일에 3도로 하여 3백 64일에 이르면 이내 3백 64도로써 이듬해 동지 첫날 자정에는 3백65도가 되고 1일에 영도(零度) 3분 2일에 1도 3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이내 3백 6십 3도 3분으로써 또 이듬해 동지 첫날에는 3백 64도 3분이 되고, 1일에 영도 2분 2일에 1도 2분으로 3백 64일에 이르면 이내 3백 63도 2분으로써 또 이듬해 동지 첫날에는 3백 64도 1분이 되고, 1일에 영도 1분 2일에 1도1분으로 3백 64도 1분이 되나니, 이를 일(一)이라 했다. 이르며 다하면 처음으로 회복하는 것이다. 무릇 인사(人事) 동정(動靜)의 기틀은 실로 일성(日星)의 운행과 관련되며 일성의 운행은 의상(儀象)의 가운데 소상히 나타나 있다. 옛날 성인(聖人)이 반드시 이것으로써 정치의 급선무를 삼았으니, 요(堯)임금의 역상(歷象)과 순(舜)임금의 선기(琁璣)가 즉 이것이 다우리 전하의 제작하신 아름다운 뜻은 바로 요, 순과 더불어 동일한 법이며 우리 동방 수천 년 이래에 없었던 성사이오니 아,거룩도하다. 이는 마땅히 명(銘)하여 후세에 명시해야 하므로 신 돈(墩)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을 올리나이다 그 사에 이르기를, 요(堯)임금은 역상(曆象)을 공경하시고 / 순(舜)임금은 기형(璣衡)을 살피셨네. / 역대 마다 서로 전하여 제작하는 법은 더욱 정(精)하고 / 의(儀)라 상(象)이라 칭하여 그 이름 하나 만이 아니로세. / 위, 아래를 관찰하여 백성의 일을 기록해주었네. / 옛이 이미 멀어 지자 만드는 법초차 희미하구려. / 간책(簡策)에는 남아 있으나 뉘라서 그 뜻을 알리. / 성신(聖神)하신 우리 임금 시대에 응하시와 / 요(堯), 순(二舜)을 조술(祖述)하여 / 표루(表漏)랑 의상(儀象)이랑 모두 옛제도를 찾으셨네. / 이당시 백각(百刻)이 있어 밤낮으로 궤도(軌道)를 나뉘니, / 해를 추측하는 데 있어서는 기구가 구비되었지만 / 밤의 살핌을 겸하자고 신의(新儀)를 만들었네. / 그 이름은 무엇인가 일성정시(日星定時)라 이른다네. / 그 사용은 어떠한가 별을 보고 구각(晷刻)을 안배하네. / 그 바탕은 구리쇠요 제작 도비할 데 없이 훌륭하네. 먼저 둥근 바퀴를 만들고 십자거(十字距)가 마련 되어 남북으로 높고 낮어 적도(赤道)를 준하였네. 용이 대에 서리어, 입으로 바퀴 자루를 물고 똘을 내어 못과 연하기는 오직 물이 지극히 바른 까닭일세. 바퀴 위 세 개의 환은 서로 함께 의지하고 있는데, 바깥 환은 주천(周天)으로 도분(度分)을 버려 놓았고. 안에 있는 두 환은 해와 별의 길을 갈라 놓았네, 성환(星環)의 각(刻)은 주천(周天)의 도(度)와 같이 가고 내환 외환은 굴지 만은 중환은 굴지 않네. 저울대[衡 ]는 면에 비끼었고 축(軸)은 중심을 관통하고 축을 타서 구멍을 뚫어 침개(針芥)가 용납할 만 하며, 저울대 끝을 통하게 하여도, 각이 역력히 보이네. 두 용은 축을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떠받들며, 환은 안팎으로 있고 별은 그 새로 보이네. 그 별은 무엇인가 구진(勾陳)과 천추(天樞)로세. 남, 북이 정해지고 동, 서가 서로 응하네. 보기는 어떻게 보는가 선(線)으로써 바라보네. 환의 우에 올라 앉어 아래로 저울에 끝을 꿰어 보네. 해를 추측할 땐 둘을 쓰고 별을 추측할 잰 하나를 쓰네. 제좌(帝座)의 밝은 별이 북극에 가차우니, 선(線)을 이용하여 바라보면 시각[辰刻]을 알 수 있네.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자정이 되거들랑 윤(輪), 환(環)에 표시하니 주천(周天)의 기점(起點)일레. 매일 밤 돌아 가는 것은 도, 분의 시종이라 기구는 간략하고 용도는 주밀하네. 몇 번이나 선철(先哲)의 솜씨를 거쳤지만 이런 제도 없었는데 우리임금 하늘을 앞서 이 의(儀)를 만드섰네 희화(羲和)에 내려 주니 만세의 보배로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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