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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흠경각기에 대해> (2003. 1. 8. 영환(문) 제공) 김돈 선조님은 집현전 학자출신으로 승정원의 승지를 역임하시면서 과학기기 제작에 참여하신 학자 출신 과학자이십니다.흠경각은 경복궁안에 설치된 종합과학관 같은 건물입니다.이 흠경각을 짓고 세종대왕은 김돈 선조님께 명하시어 그 기문을 짓도록 하셨습니다. (2) <경복궁 흠경각> 세종대부터 사정전, 강령전의 서쪽 즉 경회루 부근에는 천문시설이 많았다. 사정전의 서쪽에는 물시계를 설치했던 보루각(報漏閣)이 있었고, 강령전의 서쪽에는 천문기구를 설치했던 흠경각(欽敬閣)이 있었고, 경회루의 북쪽에는 천문을 관측하던 간의대(簡儀臺)가 있었다. 또한 보루각 남쪽에는 천문을 담당하던 관청인 관상감(觀象監)이 있었다. 흠경각은 1438년(세종 20)에 집현전 학자인 정인지 정초가 고증하고 이천, 장영실이 만든 옥루기륜(玉漏機輪)이란 자동시계를 설치하였다. 보루각은 물시계를 설치했던 곳으로, 태조때 종로에 물시계를 설치한 바 있는데 1434년(세종 16) 보루각에 물시계를 설치하였다. 임진왜란때 소실되어 창경궁에 중건하였다가 경희궁으로 옮겼다. 천문관측대인 간의대는 1434년에 길이 47척, 너비 32척, 높이 41척의 축대를 쌓고 천문관측기구인 간의(簡儀)를 설치하여 천문을 관측하였다. 이 건물도 모두 헐리고 지금은 1995년에 복원한 흠경각만 남아있다.
(3) <흠경각기> (2002. 6. 28. 영환(문) 제공) <<세종실록>> 권80 세종20년 1월 7일(임진) 기록 【원전】 4 집 123 면 흠경각(欽敬閣)이 완성되었다.이는 대호군 장영실(蔣英實)이 건설한 것이나 그 규모와 제도의 묘함은 모두 임금이 마련한 것이며,각은 경복궁 침전 곁에 있었다. 임금이 우승지 김돈(金墩)에게 명하여 기문을 짓게 하니, 이에 말하기를,
“상고하건대, 제왕이 정사를 하고 사업을 이루는 데에는 반드시 먼저 역수(曆數)를 밝혀서 세상에 절후를 알려 줘야 하는 것이니, 이 절후를 알려 주는 요결(要訣)은 천기를 보고 기후를 살피는 데에있는 것이므로, 기형(璣衡)과 의표를 설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상고하고 징험하는 방법이 지극히 정밀하여 한 기구 한 형상만으로는 능히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 전하께서 이 일을 맡은 자에게 명하여 모든 의기(儀器)를 제정하게 하였는데, 대소 간의(大小間儀)·혼의(渾儀)·혼상(渾象)·앙부일구(仰釜日晷)·일성정시(日星定時)·규표(圭表)·금루(禁漏) 같은 기구가 모두 지극히 정교하여 전일 제도보다 훨씬 뛰어나 오직 제도가 정밀하지 못하고, 또 모든 기구를 후원(後苑)에다 설치하였으므로 시간마다 점검하기가 어려울까 염려하여, 이에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 집을 세웠도다. 풀[糊]먹인 종이로 일곱 자 높이의 산을 만들어 집 복판에 설치하고, 그 산 안에다 옥루기(玉漏機) 바퀴를 설치하여 물로써 쳐올리도록 하였다. 금으로 해를 만들었는데 그 크기는 탄자만 하고, 오색 구름이 둘러서 산허리 위를 지나도록 되었는데, 하루에 한 번씩 돌아서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속에 들어가며, 비스듬한 형세가 천행에 준하였고, 극의 멀고 가까운 거리와 돋고 지는 분수가 각각 절기를 따라서 하늘의 해와 더불어 합치하도록 되어 있다. 해 밑에는 옥으로 만든 여자 인형 넷이 손에 금 목탁을 잡고 구름을 타고,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서 있어 인·묘·진시 초정(初正)에는 동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매양 목탁을 치며, 사·오·미시 초정에는 남쪽에 섰는 여자 인형이 목탁을 치고, 서쪽과 북쪽에도 모두 이렇게 한다. 밑에는 네 가지 귀형(鬼形)을 만들어서 각각 그 곁에 세웠는데 모두 산으로 향하여 섰으며, 인시가 되면 청룡신(靑龍神)이 북쪽으로 향하고,묘시에는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에는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에는 돌아서 다시 서쪽으로 향하는 동시에 주작신(朱雀神)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는데, 차례로 방위를 향하는 것은 청룡이 하는 것과 같으며, 딴 것도 모두 이와 같다. 산 남쪽 기슭에는 높은 축대(築臺)가 있어, 시간을 맡은 인형 하나가 붉은 비단옷 차림으로 산을 등지고 섰으며, 인형 무사 셋은 모두 갑옷 차림인데 하나는 종과 방망이를 잡고서 서쪽을 향해서 동쪽에 섰고, 하나는 북[鼓]과 부채를 잡고 동쪽을 향해 서쪽에서 약간 북쪽으로 가까운 곳에 섰고, 하나는 징[鉦]과 채쭉을 잡고 동쪽을 향해서 서쪽에서 약간 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서 있어서, 매양 시간이 되면 시간을 맡은 인형이 종 치는 인형을 돌아보고, 종 치는 인형도 또한 시간을 맡은 인형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게 되며, 매경(每更)마다 북과 부채를 잡은 인형이 북을 치고, 매점마다 징과 채를 잡은 인형은 징을 치는데, 서로 돌아보는 것은 종 치는 인형과 같으며, 경·점마다 북 치고 징 치는 수효는 모두 보통 시행하는 법과 같다. 또 산 밑 평지에는 열두 방위를 맡은 신들이 각각 제자리에 엎드려 있고, 열도 방위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어 상시에는 닫혀 있다가 자시(子時)가 되면 쥐 모양으로 만든 신 뒤에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인형 옥녀(玉女)가 자시패를 가지고 나오며, 쥐 모양으로 만든 신은 그 앞에 일어선다. 자시가 다 가면 옥녀는 되돌아서 구멍에 들어가는 동시에 구멍이 저절로 닫혀지고 쥐 모양의 신도 제 위치에 도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모양으로 만든 신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면서 옥녀가 또한 나오며, 소 모양의 신도 일어나게 되는데, 열두 시간이 모두 이렇게 되어 있다. 오방위(午方位) 앞에는 또 축대가 있고 축대 위에는 기울어진 그릇을 놓았고 그릇 북쪽에는 인형 관원이 있어,금병(金甁)을 가지고 물을 따르는 형상인데 누수 남은 물을 이용하여 끊임없이 흐르며, 그릇이 비면 기울고 반쯤 차면 반듯해지며, 가득 차면 엎어져서 모두 옛말과 같이 되어 있다. 또 산 동쪽에는 봄 3개월 경치를 만들었고, 남쪽에는 여름 경치를 꾸몄으며, 가을과 겨울 경치도 또한 만들어져 있다. 《시경》 빈풍도(詩經?風圖)에 의하여 인물·조수·초목 여러 가지 형용을 나무를 깎아 만들고, 절후에 맞추어 벌려 놓았는데 칠월 한 편의 일이 갖추어지지 않은 것이 없다. 집 이름을 흠경이라 한 것은 《서경》 요전(堯典)편에 ‘공경함을 하늘과 같이 하여, 백성에게 절후를 알려 준다[欽若昊天, 敬授人時]’는 데에서 따온 것이다.대저 당우 시대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시대마다 각자 제도가 있었으나, 당·송 이후로 그 법이 점점 갖추어져서 당나라의 황도유의(黃道遊儀)·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나라의 부루표영(浮漏表影)·혼천의상(渾天儀象)과 원나라의 앙의(仰儀)·간의(簡儀) 같은 것은 모두 정묘하다고 일렀다. 그러나 대개는 한 가지씩으로 되었을 뿐이고 겸해서 상고하지는 못했으며, 운용하는 방법도 사람의 손을 빌린 것이 많았는데 지금 이 흠경각에는 하늘과 해의 돗수와 날빛과 누수 시각이며, 또는 사신(四神)·십이신(十二神)·고인(鼓人)·종인(鍾人)·사신(司辰)·옥녀(玉女) 등 여러 가지 기구를 차례대로 다 만들어서,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는 것이 마치 귀신이 시키는 듯하여 보는 사람마다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서 그 연유를 측량하지 못하며, 위로는 하늘 돗수와 털끝만큼도 어긋남이 없으니 이를 만들은 계교가 참으로 기묘하다 하겠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울어지는 그릇을 만들어서 하늘 돗수의 차고 비는 이치를 보며, 산 사방에 빈풍도(?風圖)를 벌려 놓아서 백성들의 농사하는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였으니, 이것은 또 앞 세대에는 없었던 아름다운 뜻이다. 임금께서 여기에 항상 접촉하고 생각을 깨우쳐서, 밤낮으로 근심하는 뜻을 곁들였으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반(沐浴盤)과 무왕의 호유명(戶츐銘)과 같을 뿐이리오. 그 하늘을 본받고 때를 조음에 흠경하는 뜻이 지극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중하게 여기시니, 어질고 후한 덕이 마땅히 주나라와 같이 아름답게 되어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흠경각이 완성되자 신에게 명하시어 그 사실을 기록하게 하심으로 삼가 그 줄거리를 적어서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바치나이다.”
(4)<흠경각 관련 자료> (2003. 7. 23. 태서(익) 제공)
○ 김돈(金墩)ㆍ김조(金?)에게 명하여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조그마한 정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쯤 되게 하여 정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玉漏)를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ㆍ십이신(十二神)ㆍ고인(鼓人)ㆍ종인(鍾人)ㆍ사신(司辰)ㆍ옥녀(玉女) 등을 만들어 모든 기관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여 마치 신이 그렇게 하는 듯 하였다. 하늘과 해의 도수와 구(晷)와 누수(漏水)의 시각이 위로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기(?器)를 만들었는데,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산의 사방에는 빈풍(?風)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시의 경치를 만들고 나무에 인물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그 절후에 맞게 배포하여 민생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보였다. 그 이름은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서경》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국조보감》《필원잡기》《대동운옥》
흠경각은 세종 갑인년(1434)에 창건되었으니 경복궁 강녕전(康寧殿) 곁에 있었다. 뒤에 불탄 것을 명종(明宗) 갑인년(1554)에 그 옛터에 재건하였으나 또 임진왜란의 병화에 소실되었다. 광해군(光海君) 갑인년(1614)에 이르러 다시금 창덕궁 서린문(瑞麟門) 안에 세웠으니, 처음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두 세번 갑인년을 만나서 세워졌었다. 세종조에 이룩된 정시의(定時儀)가 아직 완전히 남아 있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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