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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김돈(金墩) 기록 내용> (2003. 4. 20. 윤만(문) 제공) ▣ 제1권 p55-p57<경도 상 궁전(宮殿)> 흠경각(欽敬閣) : 강녕전 서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만일 제왕(帝王)이 정사를 베풀고 실무(實務)를 이루려면 반드시 역법(曆法)을 밝혀 철을 알려 주어야 한다. 철을 알리는 요긴한 방법은 진실로 천문의 기상을 관찰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기형(璣衡;54)·의표(儀表)를 시설한 까닭이다. 그러나 고찰하고 시험하는 방법은 극히 정하고 세밀하여, 한 가지 기구로서 능히 (형상으로) 바르게 할 수 없다. 우리 주상전하가 그 해당 관청에 명령하여 온갖 상의(象儀)를 만들었으니, 대간의(大簡儀)ㆍ소간의(小簡儀)와 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앙부일구(仰釜日晷)ㆍ일성정시규표(日星定時圭表)ㆍ금루(禁漏) 따위의 기구는 모두 지극히 정밀하고 교묘하다. 옛날 것보다 아주 특별하다. 그런나 오히려 제도가 극진하지 못할까 걱정하고, 또 모든 기구가 후원(後苑)에 시설되어 있어, 때때로 살피기가 어려워, 천추전(千秋殿) 서쪽 뜰에다 한 간의 조그만 전각(殿閣)을 세우고,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드니 높이가 7척쯤 되었다. 그것을그 전각 안에 두고 그 안에는 옥루(玉漏)의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물로 그것을 쳐서 돌게 하고 금으로 해를 만드니 크기가 탄환만하였다.
다섯 가지 빛깔의 구름이 그것을 둘러싸고 그 산허리 위로 도는데, 하루에 한 바퀴를 돌되 낮에는 산 밖에 나타나고 밤에는 산 중으로 빠진다. 비스듬한 형세는 하늘의 운행을 본떠서 북극(北極)과 멀고, 가까움과 나고 드는 분수(分數)를 각각 절기(節氣)를 따라 하늘의 해와 합하게 하였다. 그 해 밑에는 옥녀(玉女) 네 사람이 손에 금방울을 잡고, 구름을 타고 사방에 서 있다. 인(寅)ㆍ묘(卯)ㆍ진(辰)시의 초(初)에정(正)에는 동(東)에 있는 것이 매양 방울을 흔들고, 사(巳)ㆍ오(午)ㆍ미(未)시의 초(初)와 정(正)에는 남(南)에 있는 것이 방울을 흔드는데, 서쪽과 북쪽도 다 그러하다. 그 밑에는 네 신(神 청룡(靑龍)ㆍ주작(朱雀)ㆍ백호(白虎)ㆍ현무(玄武))이 각각 자기의 방위에 서서 모두 산을 향해 있다. 인시(寅時)가 되면 청룡이 북쪽으로 향하고 묘시가 되면 동쪽으로 향하며, 진시가 되면 남쪽으로 향하고, 사시가 되면 도로 서쪽으로 향하는데, 주작이 다시 동쪽으로 향하여 차례로 그 방위로 향하는 것은 앞의 것과 같다. 산의 남쪽 기슭에 높은 대(臺)가 있고, 사신(司辰) 한 사람은 붉은 공복(公服)을 입고 산을 등지고 서있으며, 무사(武士) 세 사람은 다 갑옷과 투구를 갖추었는데, 한 사람은 종 방망이를 들고서 서쪽을 향해 동쪽에 서 있고, 한 사람은 북채를 들고서 동쪽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북쪽에 가까우며, 한 사람은 징채를 들고서 역시 동쪽을 향해 서쪽에 서 있는데 남쪽에 가깝다. 시간이 이를 때마다 사신(司辰)이 종인(鍾人)을 돌아보면 종인도 사신을 돌아보면서 종을 치고, 경(更)마다 고인(鼓人)은 북을 치며, 점(點)마다 징인(鉦人)은 징을 치는데, 그(들이) 서로 돌아보는 것도 그와 같으며,경(更)ㆍ점(點)ㆍ징(鉦)ㆍ북의 수는 모두 항상 같은 법칙이다. 또 그 밑의 평지에는 (열두) 신(神)이 각기 그 위치에 엎드려 있고, 신 뒤에는 각각 구멍이 있는데 항상 닫겨 있다.
자시(子時)가 되면 쥐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玉女)가 시패(時牌)를 들고 나오면 쥐가 그 앞에서 일어나며, 자시가 끝나면 옥녀는 도로 들어가고 그 구멍은 저절로 닫혀지며 쥐는 다시 엎드린다. 축시가 되면 소 뒤의 구멍이 저절로 열리고 옥녀가 나오면 소도 또 일어나는데, (열두) 시(時)가 다 그렇다. 오위(牛位)의 앞에 또 대(臺)가 있고 대 위에는 의기(?器)가있으며 의기 북쪽에는 관인(官人)이 있어 금병을 들고 물을 붓는데, 누수(漏水)의 남은 물을 계속 흘려 끊어지지 않는다. 의기가 비면 기울고 알맞으면 바르며 가득 차면 엎어지나니, 다 옛날의 교훈(제도)과 같다. 또 산 동쪽에는 봄 석 달의 경치를 만들고, 남쪽에는 여름 석 달의 경치요, 가을과 겨울도 또한 그렇다. 빈풍(?風;55)의 그림에 의하여 나무에다 사람 짐승 초목의 형상을 새기고, 절후(節候)를 따라 나열하여 놓아 <7월> 한 편의 일이 모두 다 갖추어져 있다.
각(閣)의 이름을 '흠경(欽敬)'이라 한 것은 <요전(堯典;56)>의 하늘에공경히 순응하여, 공경히 백성에게 시절(농사철)을 알려준다."[銘若昊天敬授民時]는 뜻을 따온 것입니다. 대개 당우(唐虞)로부터 측후(測候)하는 기구는 그 대(代)에 따라 각각 제도가 있다. 당송(唐宋) 이래로 그 법이 모두 갖추어져 있었으니, 마치 당(唐)의 황도유의(黃道遊儀)ㆍ수운혼천(水運渾天)과 송(宋)의 부루(浮漏)ㆍ표영(表影)ㆍ혼천의상(渾天儀象)과 같고, 원조(元朝)에 이르러서는 앙의(仰儀)와 간의(簡儀)는 모두 정묘하다고 일컬었다. 그러나 대개 각각 한 시대의 제도를 이루었으므로 모두를 상고할 수는 없으나, 그 운용하는 기틀은 사람의 힘을 많이 빌렸었다. 지금은 하늘의 해의 도수와 귀루(晷漏)의 시각은, 저 4신과 12신과 고인ㆍ종인ㆍ사신(司辰)ㆍ옥녀와 더불어, 온갖 기관이 차례차례로 함께 만들어졌으되, 사람의 힘을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가고[行] 스스로 치는 것은, 마치 귀신이 시키는 것 같아서 보는 사람은 놀라고 괴상히 여겨, 그 까닭을 헤아리지 못하는데, 위로는 하늘의 운행과 호리(毫釐;조금도)도 틀리지 않으니, 그 만든 법은 참으로 묘하다 할 만하다. 또 누수(漏水)에 쓴 남은 물로 의기(?器;57)를 만들어 천도(天道)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58)를 관찰하고, 산의 사방에 빈풍(?風)을 나열하여 백성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볼 수 있게 하니, 이것은 또 전대(前代)에 없던 아름다운 뜻이다. 이것을 항상 좌우에 두어 매양 마음에 경계하고, 또한 근심하며, 부지런히 정사를 해야 하는 뜻을 붙이니, 어찌 다만 성탕(成湯)의 목욕의 반(盤;59)과 무왕(武王)의 호유(戶?)의 명(銘)일 뿐이겠는가? 그 하늘을 본받고 시절을 따르는 흠경(欽敬)의 뜻이 지극하고 극진하며, 백성을 사랑하고 농사를 소중히 여기는 어질고 후덕한 덕은, 마땅히 주 나라와 더불어아름다워 무궁토록 전해질 것입니다. 각(閣)이 이미 이루어지매 신에게 명령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시므로 삼가 대강을 서술하여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올리나이다." 하였다.
(주54) : 기형(璣衡) - 순(舜)이 선기옥형(璿璣玉衡)이라는 천문기계를 만들었다. (주55) : 빈풍(?風) - 시경(詩經)에 빈풍(?風) 7월편이 있는데, 그것은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에게 농사짓는 어려움을 알리기 위하여 읊은 시인데, 철따라 초목과 짐승을 많이 인용하고 철 맞추어 농사짓는 것을 읊조린 시다. (주56) : 요전(堯典) - 요전은 요(堯)임금의 사적을 적은 것인데 서경(書經)의 첫편이다. (주57) : 의기(?器) - 의기는 비어 있을 때에는 한 쪽으로 기울어 있다가 물을 반쯤 부으면 반반하게 일어서고 물을 가득 부으면 엎어져 버리는 그릇이다. (주58) : 「주역」겸괘(謙卦)에, “천도(天道)는 가득찬 것을 이지러지게 하고 겸손한 것에는 복을 준다.” 하였다. (주59) : 반(盤) - 은(殷)나라 임금 성탕(成湯)이 목욕하는 반(盤)에 글을 새기기를, “날마다 새롭게 하고 또 날마다 새롭게 한다.” 하였다.
▣ 제1권 p57-p61<경도 상 궁전(宮殿)> 보루각(報漏閣) : 경회루 남쪽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임금님께서 옛 누기(漏器)는 그다지 정밀하지 못하기 때문에 누기를 다시 만들어라고 명하였다. 파수호(播水壺)는 서쪽에는 크고 작은 차이가 있는 수수호(受水壺) 두 개가 있는데, 물을 갈[更] 때에 쓰는 것이며, 길이는 11척 2촌이고 원의 직경은 1척 8촌이며, 두 개의 화살은 길이가 10척 2촌이다. 그 면(面)은 12시(時)로 나누고, 시(時)마다 8각(刻)으로 나누어 초정(初正)의 나머지를 백 각으로 나누고 한 각을 12분(分)으로 만들었다. 야전(夜箭)은 옛날에는 21개였는데, 한갓 갈아 쓰기에 번거로워서 다시 수시력(授時曆)에 의거하여 밤과 낮에 오르고 내림으로 나누고, 대략 두 기운이 화살 한 개와 맞먹게 하였으니, 화살은 무릇 13개이다. 간의를 참고했더니 호리(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또 임금님은 때를 알리는 자가 틀림을 면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여, 호군(護軍) 신 장영실(蔣英實)에게 명령하여, 사신(司辰)의 나무 사람을 만들어 때를 따라 저절로 알리게 하고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았다. 그 제도는 먼저 전각 세 채를 짓고 동쪽 채 사이에 2층의 자리를 만들고, 윗 층에 3 신을 세워 하나는 시(時)를 맡아 종을 울리고, 하나는 경(更)을 맡아 북을 울리며, 하나는 점(點)을 맡아 징을 울린다. 가운데 층 아래에는 평륜(平輪)을 설치하고, 윤(輪)을 조아 12신을 벌여 각각 쇠줄로 간(幹)을 삼아 오르내리며 각각 시패(時牌)를 잡고 번갈아가며 때를 알린다. 그 기계 운전하는 법은 가운데 채 안에 다락을 만들고, 그 다락 위에는 파수호(播水壺)를 벌여 놓고, 밑에는 수수호(受水壺)를 두었으며, 수수호 위에는 모가난 나무를 꽂되 속도 비고 겉도 비었는데, 길이는 11척 4촌이고, 너비는 6촌이며, 두께는 8푼(分)이고, 깊이는 4촌이다.
빈 속에는 격(隔)이 있으며 면(面)에서 1촌쯤 들어가서 왼쪽에 동판(銅版)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비는 2촌이다. 판면에 구멍 열두 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데, 알의 크기는 탄환과 같으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장치되어 열리고 닫히게 할 수 있는데, 12시를 맡았다. 오른쪽에도 동판을 설치했는데, 길이는 화살과 같고 너비는 2촌 5푼이며, 동판 면에는 구멍 25개를 뚫어 조그만 구리 알을 받는 것을 왼쪽동판과 같게 하고, 화살은 12개를 썼는데, 모두 12개의 동판은 절기에 따라 갈아 쓴다. 경(更)과 점(點)을 주장하는 수수호에 화살을 띄워 화살 머리에 가로지른 쇠를 받쳐 놓은 것이 젓가락 같은데, 길이가 4촌 5푼이다. 호 앞에는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안에는 넓은 동판을 비스듬히 설치했는데, 그 머리는 모가 나면서 속이 빈 나무 밑에 이어져 있고 꼬리는 동쪽 채에 이어졌다.
자리 밑에는 네 개의 격을 용도상(甬道狀)처럼 설치하고, 격 위에는 큰 철환(鐵丸)을 설치했는데 크기는 달걀만하며, 왼쪽의 열두 개는 시(時)를 맡고, 가운데 다섯 개는경(更)과 경마다의 첫점을 맡았으며, 오른쪽 20개는 점을 맡고 있다. 그 철환을 설치한 곳에는 모두 고리가 있어서 열고 닫힌다. 또 횡기(橫機)를 설치하였으니, 그 기계의 모양은 숟가락 같은데, 그 한 끝은 굽어서 고리를 걸 수 있고 한 끝은 둥글어 철환을 받을 수 있으며, 가운데 허리에는 모두 둥근 축이 있어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그 둥근 끝은 동통(銅筒)의 구멍에 당했는데, 동통은 두 개로서 비스듬히 격 위에 장치되어 있고, 왼쪽 것의 길이는 4척 5촌이고, 원의 직경은 1촌 5푼이며, 시(時)를 맡고 있다. 그 아래 면에는 12개의 구멍이 뚫려있는데, 오른쪽 것의 길이는 8척이고, 원의 직경은 왼쪽의 통과 같으며 경과 점을 맡고 있다. 하면에는 25개의 구멍을 뚫었는데, 구멍에는 모두 기계가 있어서 처음으로 그 구멍이 모두 열려 동판의 조그만 알들이 밑으로 떨어져 기계에 닿으면, 기계는 저절로 그 구멍을 막아 다음 알이 굴러 지나가는 길을 만드는데, 차례차례로 모두 그렇게 된다. 동쪽 채 자리의 윗 층 밑의 왼쪽에는 두 개의 짧은 동통을 달아, 하나는 철환을 받고 하나는 그 안에 숟가락 같은 기계를 장치하여, 숟가락의 둥근 끝이 반쯤 나와 철환을 받게 되어 있다.
통 밑 오른쪽에는둥근 기둥과 모난 기둥이 각각 두 개씩 있다. 둥근 기둥은 속이 비어 그 안에 기계를 장치하였는데, 모양은 숟갈과 같은데 반은 나오고 반은 들어갔다. 왼쪽 기둥에는 다섯 개이고, 오른쪽 기둥에는 열 개이다. 모난 기둥에는 비스듬히 작은 통을 꿰어 기둥마다 네 개씩 설치했는데, 한 끝은 연잎 모양이고, 한 끝은 용의 입 모양인데, 연 잎은 철환을 받고 용의 입은 철환을 토한다. 용의 입과 연잎은 위 아래로 서로 마주보고, 그 위에는 따로 짧은 통 두 개가 달려 있어서, 하나는 경(更)의 철환을 받고 하나는 점(點)의 철환을 받는다. 오른쪽 모난기둥에는 연잎 밑마다 각각 세로로 된 짧은 통 두 개와 가로로 된 짧은 통 하나씩을 붙여, 그 가로로 된 짧은 통 한 개는 왼쪽 모난 기둥의 연잎 밑에 이어져 있고, 왼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과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각각 용의 입과 옆잎 사이에 당해 있고, 오른쪽 둥근 기둥의 다섯 개 숟가락은 그 둥근 끝이 곧은 통 안에 반만 들어간다.
누수가 밑으로 수수호에 닿으면 떠 있던 화살이 점점 올라가, 때에 응하여 곧 왼쪽 동판의 구멍의 기계를 건드리며, 작은 철환이 밑으로 떨어져 동통으로 굴러 들어가 구명에서떨어지면서 그 기계를 건드리면 그 기계가 열리고, 큰 철환이 떨어져 자리 밑으로 굴러 들어가 달아 놓은 짧은 통에 떨어진다. 기계의 숟가락을 움직이면 기계의 한 끝이 통 안에서 올라와 시를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닿아 곧 종을 울리는데, 경과 점도 그와 같다. 다만 경의 철환은 달아 놓은 짧은 통으로 들어가 떨어지면서 기계 숟가락을 건드리면 왼쪽 둥근 기둥 속으로부터 위로 올라가 경을 맡은 신(神)의 팔꿈치에 부딪쳐 북을 울리고는 점통으로 굴러 들어가 거기서 다시 첫 점(點)의 기계를 건드리고, 오른쪽 기둥 속에서 올라와 점을 맡은 신을 부딪쳐 징을 울리고는 연잎 밑의 곧은 작은 통에서 멎는데,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곳에 기계를 장치하였다. 처음에 경의 철환의 길과 그것이 굴러 들어가는 길을 닫으면 그것이 들어갔던 길은 닫히고 경의 길이 열리는데, 나머지 경도 다 그와 같아서 오경(五更)이 끝남을 기다려서 빗장을 빼고 낸다. 경마다 두 점 이하의 철환이 아래에 달린 짧은 통에 닿아 연잎으로 굴러 들어가서,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그치면 다음 점의 철환이 굴러서 또 그 점의 기계를 건드리고서 멈춘다. 그 철환을 멈추게 하는 통에는 구멍이 있어서 빗장을 걸고 닫게 하고,다섯 개의 철환이 떨어지면서 가장 밑에 있는 기계를 움직이면 기계에 연결된 쇠줄이 차례로 모든 빗장이 빠져 먼저의 세 점의 철환과 한꺼번에 내려온다. 시를 맡은 큰 철환은 달아 놓은 짧은 통에 굴러 떨어져 둥근 기둥에 붙은 통에 굴러 들어가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을 누른다.
나무 길이는 6척 6촌이고, 너비는 1촌 5푼이며, 두께는 1촌 7푼이다. 가로지른 나무 가운데에 즉 심을 맞추어 짧은 기둥을 세우고, 가로지른 나무를 끼우고 둥근 축으로 받아 아래위로 내리고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에 손가락만한 둥근 나무를 세웠으니길이는 2척 2촌인데, 때를 알리는 신(神)의 발 밑에 해당한다. 발 끝에 조그만 윤축(輪軸)이 있어서, 큰 철환이 떨어지면서 그 북쪽 끝을 누르면 남쪽 끝이 치켜올라가 신(神)의 발을 쳐들어 자리 가운데층의 위로 오르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북쪽 끝에는 조그만 판자를 세워 열고 닫게 하였으며, 판자에는 쇠줄이 있어서 위로 시를 맡은 달린 통의 기계 숟가락에 이어져 있는데, 숟가락이 움직이면 판자가 열리어 앞의 철환을 나오게 한다. 가로지른 나무의 남쪽 끝이 낮아지면 시를 알리는 신은 바퀴의 면(面)으로 돌아오고, 다음 시를 맡은 신이 곧 대신 돌아온다. 그 윤전(輪轉)의 제도는 바퀴 겉에 조그만 판자를 가로질러 놓았는데, 길이는 1척쯤 되고 그 중간은 4ㆍ5촌쯤 되며, 동판(銅板)을 그 위에 가로로 걸쳐 놓았는데 그 형세는 비스듬히 기울어져 있고, 한 끝에는 굴대를 장치하여 열리고 닫히게 하였다. 시를 알리는 발은 처음에 동판 밑으로 반치쯤 들어가 있는데, 올리면 동판을 열고서 올라오고, 올라오면 도로 닫힌다. 시가 다 되어 바퀴 면으로 돌아오면 발 끝의 쇠바퀴는 순하게 동판을 굴러 내려가 잠시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 다음의 시를 맡은 신도 그와 같다. 모든 기계가 다 감추어져 있어 드러나지 않고, 보이는 것은 관(冠)과 띠를 갖춘 나무로 만든 사람뿐이다. 이것이 그 대략이다." 하였다.
▣ 제1권 p63-p67<경도 상 궁전(宮殿)>
○ 김돈(金墩)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과 그 서문에, "의상(儀像)이 있은 지는 옛날부터이다. 요순(堯舜)으로부터 한당(漢唐)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 소중히 여겼다. 그 글은 경사(經史)에 자세히 나타나지만, 지금은 그때와 시대가 매우 멀어서 그 법이 자세하지 않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신성(神聖)하여 고금에 으뜸가는 자질로써, 모든 정사를 보시는 여가에 마음을 천문법상(天文法象)의 이치에 두시어 옛날의 이른바 혼의(渾儀)ㆍ혼상(渾象)ㆍ규표(圭表)ㆍ간의(簡儀)와 자격루(自擊漏)ㆍ소간의(小簡儀)ㆍ앙부천평(仰釜天平)ㆍ현주일구(懸珠日晷) 등의 기구를 만들어 빠뜨림이 없었으니, 그 하늘에 공경히 순응하여 물건을 개발하여 실효를 거두는 뜻이 지극하였다. 그러나 해가 도는 데에는 백 시각이 있어서 낮과 밤이 그 반을 차지한다. 낮에는 해 그림자를 측량하여 때를 알게 되니 그 기구는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밤에 있어서는 《주례(周禮)》에, 별로 밤을 분별한다는 글이 있고, 《원사(元史)》에는, '별로써 밤을 측정한다.'는 말은 있어도, 그 별을 측정하여 활용하는 기술은 말하지 않았다. 이에 명하여 밤낮의 시각을 아는 기구를 만들게 하고, 그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그것을 만드는 제도는 구리를 써서 만드는데, 먼저 바퀴를 만들어 그 형세는 적도(赤道)에 표준했는데, 자루가 있고 바퀴의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4푼이며 너비는 3촌이다. 가운데에 십자(十字)의 거(距)가 있는데, 너비는 1촌 5푼이고, 두께는 바퀴와 같으며, 십자 속에는 축이 있는데, 길이는 5푼 반이고 직경은 2촌이다. 북쪽 면에는 그 중심을 깎아 파서 1리(厘)의 두께로 만들었으며,가운데에는 겨자씨만한 둥근 구멍을 만들고, 축(軸)으로 계형(界衡)을 꿰고 구멍으로 별을 본다. 밑에는 서려 있는 용이 있어서 바퀴 자루를 물고 있는데, 자루의 두께는 1촌 8푼으로 용의 입에 들어간 것이 1척 1촌이고, 밖으로 나온 것이 3촌 6푼이다.
용 밑에는 대(臺)가 있는데 너비는 2척이고, 길이는 3척 2촌이다. 거기에 도랑이 있고 못이 있으니, 그 까닭은 판판하기를 취하려고 한 까닭이다. 바퀴 윗면의 대에 세 개의 고리가 있으니, 주천도분환(周天度分環)과 일구백각환(日晷百刻環)과 성구백각환(星晷百刻環)이다. 주천도분환은 밖에서 운전하는데,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2척이고, 두께는 3푼이며 너비는 8푼이다. 일구백각환은 가운데에 있으면 돌지 않는데, 직경은 1척 8촌 4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바깥의 고리와 같다. 성구백각환은 안에서 운전하는데, 두 개의 귀가 있으며 직경은 1척 6촌 8푼이고, 너비와 두께는 가운데와 바깥 고리와 같다. 귀를 만든 것은 운전하기 위함이다. 세 개의 고리 위에 계형(界衡)이 있는데, 길이는 2척 1촌이고, 너비는 3촌이며 두께는 5푼이다. 두 머리 속은 비었는데, 길이는 2촌 2푼이고 너비는 1촌 8푼이니, 그 때문에 세 개의 고리에 그어 놓은 것을 가리우는것이다. 허리와 좌우에는 각각 용 한 마리씩이 있으니, 길이는 1척으로 모두 정극환(定極環)을 받치고 있다. 고리 두 개가 있는데, 바깥 고리와 안 고리 사이에는 구진대성(句陳大星)이 보이고, 안 고리의 안에는 천추성(天樞星)이 보이는데, 이는 남북과 적도를 정한 것이다.
바깥 고리는 그 직경이 2촌 3푼이고 너비는 3푼이며, 안 고리는 직경이 1촌 4푼 반이고 너비는 4리이며, 두께는 모두 2푼이 조금 모자라는데 서로 십자(十字)처럼 이어져 있다. 계형의 양쪽 끝은 비었고 안팎에는 각각 조그만 구멍이 있으며, 정극외환(定極外環) 양쪽에도 조그만구멍이 있는데, 가는 노끈으로 여섯 개의 구멍을 꿰어 계형의 양쪽 끝에 매었는데, 그것은 위로는 해와 별을 살피고 아래로는 시각을 상고하려는 것이다. 주천환(周天環)에는 주천도(周天度)를 새겼는데, 매 도(度)를 4푼으로 만들었으며, 일구환에는 백 각을 새겼는데 매 각을 6푼으로 만들며, 성구환에도 일구환과 같이 새겼는데, 자정(子正)이 새벽 전 자정을 지나는 것이 주천의 1도를 지난 것과 같은 것이 다를 뿐이다. 주천환을 사용하는 방법은 먼저 수루(水漏)를 내리어, 동지(冬至)의 새벽 전 자정이 되면 계형으로 북극의 두 번째 별이 있는 곳을측후해서 바퀴 옆에 기록하고 주천의 첫 도수의 시초에 맞춘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하늘의 해도 반드시 어긋나니, 수시력(授時曆)으로 상고하면 16년이 조금 지나면 1분이 퇴각하고, 66년이 조금 지나면 1도가 퇴각한다. 이렇게 되면 다시 측후하여 바로잡아야 한다. 북극의 두 번째 별은 북극성에 가까워서 가장 붉고 밝아서 누구나 보기 쉽다. 그러므로 그것으로써 기후를 측정하는 것이다. 일구환을 쓰는 방법은 간의에 성구환을 쓰는 법과 같다. 첫해 동지 첫날 새벽 전의 밤중 자정을 처음으로 하여 주천의 첫 도수의 처음에 맞춘다.
1일에 1도,2일에 2도, 3일에 3도, 이리하여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4도가 된다. 다음 해의 동지 첫날 자정이 3백 6십 5도가 되는데, 1일에는 영도(零度) 3분, 2일에는 1도 3분이며,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3도 3분이 된다. 또 다음 해의 동지 첫날에 3백 64도 3분이 되면 1일은 영도 2분, 2일은 1도 2분이며, 3백 6십 4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3도 2분이 된다. 또 다음 해 동지 첫날에 3백 6십 4도 2분이 되고, 1일은 영도 1분이고 2일은 1도 1분이며, 3백 6십 5일이 되면 바로 3백 6십 4도 1분이니, 이것을 일진(一盡)이라 하고, 한 바퀴가 다하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대개 사람의 동정(動靜)의 기틀은 실로 해와 별의 운행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해와 별의 운행은 의상 속에 밝게 나타나 있다. 옛날의 성인들은 반드시 이로써 다스리는 방법의 첫째 임무로 삼았으니, 요(堯)의 역상(曆象)과 순(舜)의 선기(璿璣)가 바로 이것이다. 우리 전하의 이것을 만든 아름다운 뜻은 바로 요순과 그 규모를 같이하는 것으로, 우리 동방의 천고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다. 아, 지극하여라. 이것을 마땅히 새겨 후세에 밝게 보여 주어야 하리라. 신 김돈은 감히 절하고 머리를 조아리며 명(銘)을 올리나이다." 하였다.
그 글에 요 임금은 역상을 공경히 정하였고 순 임금은 기형(璣衡)을 사용했다. 대대로 서로 전하니 만든 솜씨가 더욱 정묘해졌다. 의(儀)이니 상(象)이니 하여 그 이름은 같지 않으나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철을 알려 주었는데, 시대가 멀어지자 제도가 더욱 폐해졌다. 그것을 기록한 책이 남아 있다 하지만 누가 그 참뜻을 알리? 우리 성신(聖神) 세종대왕이 시기에 응해 요와 순 두 임금 이어받아 만들었나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네. 시에는 백 각이 있어 낮과 밤으로 나누어지니, 해를 측정하는데 갖추지 못한 기계가 없다. 또 밤까지 측후하고자 하여 새로운 의(儀)를 만드니 그 이름은 무엇이던가? 그것은 바로 일성정시(日星定時)이다. 그 쓰임새는 어떠한고? 별을 보고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인데 만든 솜씨는 견줄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만들고 거(距)가 서로 설치되었다. 남북이 높고 낮은 것은 적도(赤道)의 법을 본떴네. 용이 그 대에 도사리고 있어 입으로 바퀴의 자루를물었고, 도랑이 있어 못에 잇대었으니 그 물이 지극히 수평을 이루었도다. 바퀴 위의 세 개의 고리가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고리는 주천으로서 도(度)와 분(分)을 벌여 놓았다. 그 안에 있는 두 개의 고리는 일환과 성환이 그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의 도수와 같은데, 안팎의 것은 움직이고 가운데 것만은 꼼짝하지 않는다. 저울대는 그 면(面)에 가로질러 있고 굴대는 그 가운데를 꿰었다. 굴대를 파서 구멍을 만드니 마치 바늘과 겨자씨 같은데, 속이 빈 저울대의 끝에는 도(度)와 각(刻)이 선명하고 뚜렸하도다. 한 쌍의 용이굴대를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고, 고리에는 거죽과 속이 있어서 별이 그 사이로 보인다. 보이는 별은 무엇인가? 구진(勾陳)과 천추(天樞)로 남쪽과 북쪽을 정하였으매 묘(卯)와 유(酉)가 서로 기다린다. 그것을 어떻게 관찰하는가? 선(線)으로 그것을 살펴보나니, 바로 고리의 위에 걸치고 밑으로는 저울대의 끝을 꿰었다. 해를 측량하려면 그 두 가지를 쓰고 별을 살펴보려면 한 가지를 쓴다. 제왕의 자리는 붉고 빛나서 저 북극성에 가까이 있나니 선으로 그것을 엿보면 때와 시각을 알 수 있도다. 먼저 수루(水漏)를 내려놓으면 자정을 바로 거기서 볼 수 있고, 바퀴와 고리에 기록해 표시하나니 천주(天周)가 처음 시작되는 곳이다. 밤마다 지나고 돌고 할 때에 도와 분이 함께 한다. 기계는 간단하나 정묘하며 작용은 두루하고 또 세밀하네. 몇 번이나 선철(先哲)들이 지나갔지만 그래도 이 제도 결함이 있도다. 우리 임금님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일찍이 만들어서 저 천문을 맡은 관리에게 주시니 만세에 보배 되리로다." 하였다.
▣ 제1권 p67-p71<경도 상 궁전(宮殿)> 간의대(簡儀臺) : 궁성(宮城)의 서북쪽 모퉁이에 있다. ○ 김돈(金墩)의 기문(記文)에, "선덕(宣德) 임자년 가을 7월 어느 날, 임금님께서 경연에서 역상(曆象)의 이치를 논하다가, 이내 예문관 제학 신 정인지(鄭麟趾)에게 이르시기를, '우리 동방은 멀리 바다 밖에 있어서 모든 하는 일이 한결같이 중화(中華)를 따르는데 오직 하늘을 관측하는 기계는 없다. 그대는 이미 역산(曆算)의 제조(提調)로있으니, 대제학 정초(鄭招)와 고전을 상고하고 의표(儀表)를 창제(創制)하여 측험(測驗)하는 데에 쓰이도록 하라. 그러나 중요한 일은 북극성이 나온 땅에 높낮이를 정하는 데에 있다. 그러므로 먼저 간의(簡儀)를 만들어 올려라.' 하였다. 이리하여 신 정초와 신 정인지는 옛날 제도를 상고하는 것을 맡고, 중추원사(中樞院使) 신 이천(李?)은 공사를 감독하는 것을 맡았다.
먼저 목양(木樣)을 만들어 북극성이 땅에 나온 36도를 정하니, 원사(元史)의 측정한 바와 대략 부합하였다. 드디어 구리쇠로 의(儀)를 만들어 그것이 장차 이루어지려 하자, 호조판서 신 안순(安純)에게 명하여 후원에 있는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돌을 쌓아 대를 만들었는데, 높이가 31척이고 길이는 47척이며, 너비는 32척이었다. 돌 난간으로 두르고 그 꼭대기에 간의를 두고 네모반듯한 상을 펴고, 그 남쪽 대의 서쪽에 구리로 된 표를 세우니, 높이는 8척의 얼(?)의 다섯 배이고 푸른 돌을 깎아서 규(圭)를 만들고, 규의 면(面)에는 장(丈)ㆍ척(尺)ㆍ촌(寸)ㆍ분(分)을 새겼으며, 영부(影符)로써 한낮의 그림자를 취하여 음과 양 이기(二氣)의 차고 줄어드는 단서를 추측하여 알았다. 표의 서쪽에 조그만 집을 짓고 혼의(渾儀)와 혼상(渾象)을 두니, 의는 동쪽에 있고, 상은 서쪽에 있다. 혼의의 제도는 역대에 같지 않지만, 지금은 원 나라 오씨(吳氏 오징(吳澄))가 편찬한 글에 의해서 옻칠한 나무로 의를 만들었다. 혼상의 제도는 옻칠한 베로 본체를 만들어 둥글기가 탄환 같은데 둘레는 10척 8촌 6푼이다. 세로와 가로로 주천(周天)의 도수를 그었는데, 적도는 가운데에 있고, 황도(黃道)는 적도(赤道)의 안팎에 나왔다 들어갔다 한 것이 각각 24도가 조금 모자라고 중외(中外)의 관성(官星)을 두루 나열하였다. 하루에 한 번씩 돌아 1도를 지나는데, 노끈으로 해를 묶어 황도에 매어 두었다. 날마다 1도씩 뒤로 물러가는 것이 하늘의 운행과 부합한다. 그 물을 치는 기계의 운행은 매우 교묘하여 깊이 감추어져 보이지 않는다. 이 다섯 가지는 옛날 역사책에 자세히 적혀 있다.
경회루 남쪽에 집 세 채를 세우고 거기에 누기(漏器)를 두었는데, 이름을 보루각(報漏閣)이라 하였다. 동쪽 채 안에 2층으로 된 자리를 설치하고 그 위에 세 신이 있는데, 시를 맡은 자는 종을 치며, 경을 맡은 자는 북을 치며, 점을 맡은 자는 징을 친다. 자리 밑에 있는 열두 신은 각각 신패(辰牌)를 잡고서, 사람의 힘을 빌지 않고 때에 따라 스스로 알린다. 천추전(千秋殿) 서쪽에 조그만 집을 세우고, 이름을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다. 종이를 발라 산을 만들었으니 높이는 7척쯤 된다. 그것을 그 집안에 두고 또 그 안에 기륜(機輪)을 설치하고 옥루(玉漏)의 물로 치면, 다섯 빛깔의 구름이 해를 싸고 나왔다 사라졌다 하며, 옥녀는 때를 따라 방울을 흔들고, 때를 맡은 무사(武士)들은 서로 돌아보며, 4신(神)과 12신은 차례로 향해 일어났다 엎드렸다 한다. 산의 4면에는 빈풍(?風)의 네 철의 경치를 벌여 놓았으니, 백성들의 의식(衣食)의 어려움을 생각해서이다. 의기(?器)를 두어 누수의 남은 물을 받는데, 그것은 천도의 찼다 비었다 하는 이치를 살피기 위해서이다. 간의(簡儀)가 비록 혼의(渾儀)보다는 간단하지만, 운전해 쓰기가 어렵기 때문에 작은 간의 두 개를 만들었으니, 이는 작은 간의가 비록 지극히 간략하나 그 작용은 간의와 같기 때문이다. 하나는 천추전 서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書雲觀)에 내려 주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들은 시각에 어둡기 때문에 앙부일구(仰釜日晷) 두 개를 만들고 그 안에 시신(時神)을 그렸으니 이는 무지한 사람들도 그것을 굽어보고 때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혜정교(惠政橋) 곁에 두고 하나는 종묘(宗廟) 남쪽 거리에 두었으니 낮에 대한 측후기는이미 갖추어졌다. 그러나 밤이 되면 상고하고 실험할 수 없기 때문에 밤과 낮으로 때를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고, 이름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라 하였다. 모두 네 개를 만들어 하나는 만춘전(萬春殿) 동쪽에 두고, 하나는 서운관에 내려주고, 두 개는 동서 양계(兩界) 원수영(元帥營)에 내려 주었다.
일성정시의는 무거워서 행군할 때에 불편하기 때문에 다시 작은 정시의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비슷비슷하다. 이 여섯 가지에 대해서 각각 그 서문과 명(銘)이 모두 있다. 또 현주일구(懸珠日晷)를 만들었는데 방부(方趺)의 길이는 63푼이다. 부(趺)의북쪽에 기둥을 세우고 부의 남쪽에 못을 파고,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추를 기둥 꼭대기에 달아 십자와 서로 맞게 하니, 꼭 수준(水準)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 평평하고 바르게 되었다. 작은 바퀴에 백 각을 그었으니 바퀴의 직경은 3촌 2푼이고, 자루가 있어서 비스듬히 기둥을 꿰고 있다. 바퀴의 중심에는 구멍이 있는데 한 개의 가는 줄로 꿰어 위로는 기둥 끝에 매고 밑으로는 부의 남쪽에 매어, 줄의 그림자가 있는 곳을 보고 곧 시각을 알게 된다. 그러나 흐린 날에는 때를 알기 어렵기 때문에 행루(行漏)를 만들었으니, 몸체는 작고 제도는 간단하다.파수호와 수수호가 각각 하나씩인데 쏟고는 갈오(渴烏)로써 물을 붓고, 물을 가는 때에는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시를 쓰고, 작은 정시의와 현주행루(懸珠行漏)는 각각 몇 개씩을 만들어 양계(兩界)에 나누어 주고, 남은 것은 서운관에 두었다. 말 위에서도 시각을 알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천평일구(天平日晷)를 만들었는데, 그 제도는 현주일구와 대략 같다. 다만 남북에 못을 파고 부(趺)의 복판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 꼭대기에 노끈을 꿰어 두어서 남쪽을 가리키는 것이 다를 뿐이다.
만일 하늘을 관측하고 시를 알려고 한다면 반드시 정남침(定南針)을써야 한다. 그러나 사람의 힘을 쓰기를 면치 못하므로 정남일구(定南日晷)를 만든 것이다. 이는 비록 정남침을 쓰지 않으나 남북이 저절로 정해져 있는 것이다. 부(趺)의 길이는 1척 2촌 5푼이고, 두 머리의 너비는 4촌이고, 그 길이는 2촌이며, 허리의 너비는 1촌이고, 그 길이는 8촌 5푼이다. 복판에는 둥근 못이 있으니 직경은 2촌 6푼이다. 거기에 수거(水渠)를 두어 두 머리와 통하게 하여 기둥 곁에 두었는데, 북쪽 기둥의 길이는 1척 1촌이고, 남쪽 기둥의 길이는 5촌 9푼이다. 북쪽 기둥의 1촌 1푼 아래와 남쪽 기둥의 3촌 8분 밑에는 각각 굴대가 있어서 사유환(四游環)을 받치고 있다. 동서로 운전하는데 여덟 개의 주천도(周天度)를 새겨 4분으로 만들었는데 북쪽의 16도에서 167도에 이른다. 속은 비어 쌍가락지 모양 같고 나머지는 다 온고리로 되어 있다. 안에는 중심에 한 획을 새겼고 밑에는 모난 구멍이 있는데 가로로 직거(直距)를 설치하였다. 거(距)의 중간은 6촌 7푼으로서 비어서 규형(窺衡)을 받치고 있다. 규형의 위에는 쌍고리를 꿰어 밑으로 온고리에 닿았고, 남북으로 내려갔다 올라갔다 한다. 평평하게 지평환(地平環)을 설치하여 남쪽 기둥 꼭대기와 가지런한데, 오직 하지(夏至)에해가 뜨고 지는 시각에 준하고, 반환(半環)을 지평환 밑에 가로로 설치하고 안에는 획(?)과 각(刻)을 나누어 모난 구멍에 당하게 한다. 부의 북쪽에는 십자를 긋고 북쪽 굴대에 추를 달아 십자와 서로 당하게 하였으니, 이 또한 판판함을 취하기 위해서이다.
규형으로 날마다 태양이 극(極)에서 떨어진 도분(度分)에 당하게 하여, 해의 그림자를 투입시키면 정원(正圓)이 된다. 모난 구멍에 의거하여 반환의 시각을 굽어보면 저절로 남쪽이 정해져 시를 알게 된다. 그 기구는 대략 15종인데 구리로 만든 것이 10종이다. 여러 해를 지나서야 준공하게 되니,그것은 실로 무오년 봄이었다. 유사(有司)가 그 전말을 적어 후세에 밝게 보이기를 청하였다. 이에 신이 그 의논에 참여하였으므로 신에게 명하여 그 일을 기록하라 하였다. 신은 가만히 생각건대, 때를 알려주는 요점은 하늘을 측량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하늘을 측량하는 요점은 의표(儀表)에 있다. 그러므로 요(堯)는 희씨와 화씨에게 명하여,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역상(曆象)을 밝히게 하고, 순(舜)은 기형(機衡)으로 살펴 일월오성(日月五星)인 칠정(七政)을 고르게 하였으니, 진실로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위함을 늦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당(漢唐)으로부터 여러 대로 내려오면서 각각 그 기구가 있었으나 혹은 잘되기도 하고 혹은 잘못 되기도 하여 갑자기 다 헤아리기가 쉽지 않고, 오직 원 나라의 곽수경(郭守敬) 이 만든 간의(簡儀)ㆍ앙의(仰儀)ㆍ규표(圭表) 등의 기구는 정교하다 할 만하다. 그런데 우리 동방에서는 그것을 만들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데, 하늘이 아름다운 운수를 열어 문교(文敎)가 한창 일기 시작하였다. 삼가 생각건대, 우리 전하는 신성(神聖)한 자질과 흠경(欽敬)하는 마음으로 온갖 정사를 하는 여가에 역산(曆算)의 정묘하지 못함을 염려하여 상고하라 시키시고,측험(測驗)의 갖추어지지 못함을 걱정하여 기구를 만들라 하셨다. 비록 요순의 마음씀인들 어찌 여기에 더할 수 있으랴? 그 제작한 기구는 한두 가지가 아니나, 몇 가지에 이르러서는 참고에 대비하였고, 그 규모는 오직 옛것만 본받은 것이 아니라 모두 임금의 마음에 헤아리시어 모두 극히 정묘하니, 비록 원 나라의 곽수경이라 하더라도 그 교묘한 기술을 베풀 수 없으리라. 아, 이미 수시(授時)의 역(曆)을 대조하고 또 하늘을 관측하는 기구를 만드니, 위로는 천시(天時)를 받들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일에 부지런히 하셨다. 우리 전하의 물건을 개발하여 실용을 이룩하는 지극한 인(仁)과 농사에 힘써서 근본을 소중히 여기는 지극한 뜻은 실로 우리 동방에 일찍이 없었던 훌륭한 일이니, 장차 이 높은 대(臺)와 함께 무궁토록 전해질 것이다." 하였다.
▣ 제1권 p172<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 궁전(宮殿)> 흠경각(欽敬閣) : 강녕전 서쪽에 있다. 세종 20년(1438)에 창건하고 천문 의기(儀器)를 두었는데, 후에 화재를 만나 명종 9년(1554)에 중건하였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 제1권 p173<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1권 경도 궁전(宮殿)> 보루각(報漏閣) : 경회루 남쪽에 있는데, 세종 16년(1434)에 창설하였다. 예전의 누기(漏器)가 정밀하지 못하므로 하여, 고쳐 만들었는데. 김돈(金墩)의 기문과 김빈(金?)의 명문과 서문이 있으며, 김돈의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의 명문과 서문이 있다.
▣ 제1권 p173<비고편 동국여지비고 제2권 한성부 교량(橋梁)> 혜정교(惠政橋) :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편에 앙부일영대(仰釜日影臺)가 있다. 《원사(元史)》에 기록된 곽수경(郭守敬)의 법에 의하여 만들었는데, 안에 시각을 새겼으니, 어리석은 백성들이 들여다보고서 시간을 알게 하려한 것이다. 둘이 있는데, 세종 14년에 처음으로 만들어 설치하였다. 하나는 여기 두고 하나는 종묘 앞 거리에 두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김돈(金墩)의 기문이 있다.
▣ 제1권 p314-315<한성부 교량(橋梁)> 혜정교(惠政橋) : 운종가(雲從街 종로)에 있는데, 다리 동쪽에 앙부일구대(仰釜日晷臺)가 있다.
○ 김돈(金暾)의 명문(銘文)에, "모든 시설을 하는 데에는, 시간보다 더 중한 것이 없다.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지만,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로 주조하여 그릇을 만들었는데, 형상이 가마솥 같다. 바르게 둥근 테를 설치하였는데, 자(子)와 오(午)가 마주 선 것이다. 공간이 꺾인 데를 따라 돌아오니, 분각(分刻)을 기록한 것이다. 도수(度數)를 안에 새겼는데, 주천(周天)을 절반한 것이다. 신(神)의 몸을 그렸는데,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하여서이다. 각(刻)과 분(分)이 소상한데, 햇빛에 비친 것이다. 길가에 설치함은, 보는 사람들이 모이게 함이다. 지금부터는, 백성들이 일할 때를 알 것이다." 하였다.
▣ 제2권 p144<수원도호부 누정(樓亭> 누정 운금루(雲錦樓) :--(전략)-- ○ 권제(權?)가 지은 서(序)에, "갑오(甲午)년 봄에 내가 지금 부사(府使) 조극관(趙克寬), 사인(舍人) 권극화(權克和), 장흥부사(長興府使) 김돈(金墩)공과 더불어 과거에 떨어지고(주2)[下禮?] 남방으로 놀러 나와, 여기에 이르러 이 정자 위에 앉았다. 내가 정자의 좋은 경개를 즐거워하여 아름다운 정취를 한껏 말하려 하여 이에 말하기를, '뒷날에 가는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눈이 펄펄 날리며 밝은 달이 발[簾]에 들어오고 연꽃 향기가 자리에 가득한 그 때를 당하여, 내가 한 지방을 맡아 있으면서 두세 사람과 더불어 이 정자 위에서 휘파람 불고 읊으면, 또한 족히 오늘의 <초라한> 걸음에 대한 갚음이 될 것이다.' 하였더니, 제공(諸公)이 웃으며 말하기를, '말이 어찌 그렇게도 이치에 맞지 않는가. 비가 부슬부슬 내리면 눈이 날리지 않을 것이요, 비와 눈이 번갈아 내린다면 달이 밝지 못할 것이다. 연꽃 향기가 또 어찌 눈 속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인가.' 하자, 나 또한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뒤에 제공은 모두 높은 과거에 뽑히어, 내외직을 고루 거쳐 날리고(두루 역임하였고), 나도 또한 재주가 없는 사람으로서 제공의 뒤에 끼어서 혹 때로 모이어 이야기하다가, 전일의 그 말을 하고는 서로 매양 크게 웃었다. 금년 봄에 다는 외람하게 성은(聖恩)을 입어서 감사(監司)가 되었는데, 조공(趙公)이 와서 전송하며 술잔을 잡고 앞으로 나와 말하기를, '수주(水州)의 눈 가운데 연꽃을 이제야 구경할 수 있겠네.' 하고, 서로 웃었다. 두어 달이 못 되어 공은 사재감정(司宰監正)으로 있다가, 나와서 이곳의 부사(府使)가 되었다. 수레에 내린 지 3일 만에 내가 와서 순시하자, 예를 마치고 정자 위에 나가 앉으매 공이 들어와 뵙는데, 마침 연꽃이 성하게 피었다. 돌아보고 서로 눈짓하며 말하지 않고 웃었다. 아, 바야흐로 과거에 낙방(주3)[點額]하여 근심스럽고 울울한 심정으로, 동자 한 명과 말 한 필을 데리고 나그네의 피곤하고 초라한 행색을 하였던 것을 지금도 상상할 수 있는데, 어찌 다시 공이 조관(朝官) 중의 높은 물망으로 특별히 은명(恩命)을 받아, 붉은 깃발과 검은 일산으로 이 부사가 될 줄을 알았겠는가. 또 어찌 내가 고루하고 외람하고 세쇄한 자질로, 감사가 되어 관찰하여 출척(黜陟)의 권리를 전임하여, 다시 공을 여기에서 만날 것을 알았으랴. 이것은 반드시 하늘이 귀신과 함께 어울려서 우리들의 궁한 것을 불쌍히 여기어, 가만히 시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런 말을 하게 한 것이던가. 그 말이 이치에 맞지 않는 것도 또한 반드시 가만히 시키어, 짐짓 우습게 만들어서 오래되어도 잊지 않게 한 것이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이치에 어긋나는 그 말이 실제로 징험되기를 이와 같이 하는가. 이것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주2) : 예위의 위(?)라는 말은 과거 보이는 장소라는 말이다. 워래 과거를 예조에서 맡아 있으므로 예위(禮?)라고 쓴다.
(주3) : 용문(龍門)은 황하(黃河)가 산간지대에서 평야지대로 나오는 것인데, 수세가 매우 험난하다. 잉어가 이 용문을 지나 올라가면 용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용되는 문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과거에 합격한 것을 용에 올랐다.[등용문(登龍門)]고 한다. 여기 점액용문[(點額龍門]이란 말은 겨우 그 용문에 가서, 이마만 대어 보고 올라가지 못하였다는 말이니, 과거를 보기만 하고 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 제3권 p432<안동대도호부 본조> 김돈(金墩) : 방경(方慶)의 후손이다. 어릴 때부터 학문에 힘썼다. 세종(世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돈(墩)이 사양하고 가지 않았더니, 과거에 급제하여 합격증서를 주게 되매, 임금이 인견(引見)하고 위유(慰裕)하기를, “내가 경(卿)을 보고자 하니 경이 문득 나를 피하더니 이제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고 뽑아서 집현전(集賢殿)에 들게 하고 항상 경연(經筵)을 겸직하게 하였다. 돈(墩)이 어머니가 강진(康津)에 있다고 하여 여러 번 지방관직(地方官職)으로 나가기를 요구하니, 임금이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주어서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의하게 하였다. 사림(士林)에서 영광스럽게 여기었다. 돈(墩)이 의상(儀像)을 만드는데 정교(精巧)하였다. 임금이 간의대(簡儀臺)ㆍ보루각(報漏閣)을 제작할 때에 돈(墩)이 김조(金?)와 함께 참여하였다. 승지(承旨)로 있은 지 모두 7년이나 되었더니 병이 들게 되매 승격하여 인수부윤(仁壽府尹)을 임명하였다. 얼마 안 되어서 졸(卒)하였다.
▣ 제5권 p79<강진현 우거 본조> 김돈(金墩) : 자세한 것은 안동부(安東府) 인물 편에 있다.
▣ 제5권 p80<강진현 제영(題詠)> 일구(一區)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 김돈(金墩)의 시에, "-일구(一區;한 구역)의 소나무와 대는 성긴 연기 밖이요, 십리나 펼쳐 있는 뽕과 삼밭은 가는 비 속이로구나." 하였다.
<출전 : 신증동국여지승람/민족문화추진회/1982> 2) <연려실 기술>내의 기록 내용 종합 (2003. 11. 9. 윤만(문) 제공) (1) 연려실기술 별집 제15권 천문전고(天文典故) 의상(儀象)
○ 김돈(金墩)이 앙부일귀(仰釜日晷)에 명을 짓기를, “무릇 베풀어 시행하는 것으로 시간보다 더 큰 것이 없는데, 밤에는 경루(更漏)가 있으나 낮에는 알기 어렵다. 구리를 녹여 그릇을 만들었으니 그 모양이 가마솥과 같다. 원거(圓距)를 가로 설치하였으니 자(子)와 오(午)가 상대되고, 구멍이 굽이를 따라서 도니 점이 개자(芥子)씨 놓은 것만하다. 낮의 도수는 안에 있으니 주천(周天)의 반이다. 신의형상을 그린 것은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함이다. 각(刻)과 분(分)이 또렷하니 해가 투영됨이 분명하다. 길가에 두는 것은 보는 이가 모이기 때문이니, 지금부터 시작하여 백성들이 지을 때를 알겠구나.” 하였다.
○ 김돈(金墩)이 일성정시의에 명을 짓기를, “요임금이 역상(曆象)을 흠정(欽定)하고, 순임금은 기형(璣衡)을 쓰니, 역대로 서로 전해 가며 제작이 더욱 정밀해졌으며, 의(儀)니 상(象)이니 하여 명칭이 한 가지가 아니었다. 굽어 살피고 우러러 관찰하여 백성에게 역서(曆書)를 주었으나 시대가 더욱 내려오자 제도가 폐하여졌다. 책(策)이 비록 있으나 누가 그 뜻을 알 것이냐. 성신(聖神) 세종대왕이때맞춰 나시어 요순의 제도를 계승하시니, 표(表)ㆍ누(漏)ㆍ의(儀)ㆍ상(象)이 모두 옛 제도를 회복하였다. 시(時)가 백각(百刻)이 있어 낮과 밤이 다르니, 해를 측후하는 데는 기계가 갖추어지지 아니함이 없고, 밤을 겸해서 측후하고자 새로 의(儀)를 만들었다. 그 이름이 무엇인고, ‘일성정시(日星定時)’라 하며, 그 사용함이 어떠한고. 별을 보며 해 그림자를 측정한다. 그 바탕은 구리로 만들었는데 제작은 비할 데가 없다. 먼저 둥근 바퀴를 설치하고 거(距)를 가로 설치하니, 남쪽과 북쪽이 낮고 높은 것은 적도의 규모를 모방한 것이다. 대(臺)에 용(龍)이 서리어 입에 바퀴 자루를 머금었으며, 도랑이 있어 못에 연(連)함으로써 수평을 이루게 된다. 바퀴 위에 3환(環)이 스스로 서로 의지해 붙었으니, 바깥 것을 ‘주천(周天)’이라 하여 도(度)와 분(分)이 벌여 있고, 안으로 2환이 있어 일환(日環)과 성환(星環)이 길을 나누었다. 성환의 각(刻)은 하늘 도수와 같이 하였는데, 안팎은 구름이요, 가운데만은 단단하게 굳었다. 형(衡)은 전면을 가로질렀고, 축(軸)은 그 가운데를 꿰었으며, 축을 파서 구멍을 만들었는데 겨자씨 같고 바늘 같다. 형(衡)의 끝을 비워서 도(度)ㆍ각(刻)을 분명히 표시하였고, 두 용이 축을 끼고 정극환(定極環)을 받들었다. 환이 안팎이 있어 별이 둘 사이에 보이는데, 그 별이 무슨 별이냐. 구진(勾陳)ㆍ천추(天樞)로다. 남쪽ㆍ북쪽이 정하여졌고 동쪽ㆍ서쪽이 서로 기다린다. 측후를 하는 데는 줄을 사용하여 관찰하니 바로 환 위에 걸쳐서 아래로 형 끝에 꿰었다. 해 측후에는 둘을 쓰고, 별 측후에는 하나로 한다. 제좌(帝座)는 붉고 밝아서 북극에 가깝다. 줄을 사용하여 엿보니 가히 시각을 알겠다. 먼저 누수(漏水)를 내리니 이에 자정(子正)을 알겠다. 윤(輪)과 환(環)을 표지(表誌)하였음은 천주(天周)의 시작되는 것이다.밤마다 주천(周天)하여 도(度)와 분(分)이 시종(始終)한다. 그릇이 간이하고 정미하여 사용함이 주밀하다. 몇 번이나 선철(先哲)을 겪었어도 이 제작이 오히려 부족하였는데, 우리 임금께서 하늘을 예측하여 이 의(儀)를 비로소 만드셨네. 희화(羲和 벼슬 이름)에게 주셨으니 만대에 보배될 것이다.” 하였다.
(2) 연려실기술 제2권 태종조 고사본말(太宗朝故事本末) 태종조의 명신(名臣) [이숙번(李叔蕃)] 이숙번은, 본관은 안성(安城)이다. 태조 계유(태조 2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좌명공신으로 안성군(安城君)에 봉해졌으며, 벼슬이 우찬성에 이르렀다. 대간의 탄핵으로 함양(咸陽)으로 귀양갔는데, 그곳에서 죽었다.
○ 공은 큰 공을 세운 뒤로 공을 믿고 교만하여 계급이 같은 재상을 하인만도 못하게 여겼을 뿐만 아니라, 임금이 불러도 병이 있다는 핑계로 가지 않았다. 심부름 온 내시가 늘 이어서 끊이지 않았는데, 안방에서는 풍악소리가 떠들썩하였다. 혹 누구에게 벼슬을 시키고 싶으면 작은 종이에 성명을 써서 사람을 보내어 아뢰었기 때문에 친한 친구가 좋은 벼슬자리에 늘어섰었다. 돈의문(敦義門) 안에 크고훌륭한 집을 짓고 지나가는 사람과 말소리를 듣기 싫다고 위에 아뢰어서 돈의문을 막고 사람들이 지나 다니는 것을 금하였으며, 사치와 참람함이 날로 심하다가 죄를 얻어 곤장을 맞고 함양 별장으로 귀양갔다.
세종 때에 순금 띠를 도승지 김돈(金墩)에게 주고 서울로 돌아오게 해 달라고 청하였는데, 김돈은 그 띠를 받고는 싶었으나 그의 청을 아뢰기가 어려워서 조회에 들어갈 때마다 손으로 그 띠를 만졌다. 그때 세종이 용비어천가를 지으라고 유신(儒臣)들에게 명하면서 선조(先朝) 때의 일을 자세하게 아는 사람이 누구냐고 묻자, 김돈이 곧 공을 천거하여 대답하였다. 드디어 역말을 달려서 불러 공이 백의(白衣 관직이 없음을 말함)로 대궐에 들어왔는데, 재상들이 모두 후배로서 다투어 절하고 뵈니, 공은 다만 손을 저어 그치게 하고 말하기를, "누구는 소시에 영특하였고, 모모는 신실하였으므로, 내가 장차 영장(令長)이 될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더니 과연 그렇구나." 하고, 그 거만함을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용재총화》ㆍ《소문쇄록》
○ 공이 서울에 돌아오니, 문하에 있던 사람들이 다 와서 뵈었다. 이징옥(李澄玉)과 조비형(曹備衡)은 이미 재상을 지냈고 한 사람은 정승인데, 공이 의자를 남향으로 설치하여 앉고, 남은 사람은 모두 남쪽에 평좌(平坐)하게 하면서 말하기를, "나의 문하에 있던 사람이다." 하였다. 사위 김모가 보고 놀라 말하기를, "엣 이럴 수가 있습니까, 반드시 패가(敗家)하고 말 것입니다. 정승은임금도 예우하는 터인데 감히 이렇게 하십니까." 하였더니, 그제서야 그들과 마주 평좌하였으니, 귀양살이를 겪고 나서도 오만하기가 오히려 이러하였다.
용비어천가 짓기를 마치고 귀양갔던 곳으로 도로 보내도록 하였는데, 김돈이 아뢰기를, "이미 불러 올렸으니 특별히 그대로 두는 것이 마땅할 듯 합니다." 하니, 세종이 이르기를, "숙번은 선조(先朝) 때에 죄를 얻은 사람이라 내 마음대로 불러서 쓸 수가 없다." 하고, 곧 귀양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을 명령하여, 김돈은 끝내 그 금띠를 감히 받지 못하고 돌려보냈다. 공이 비록 귀양살이를 하였으나 먹고 입고 지내는 것을 사치스럽게 하여 그 첩이, "좀 절약하지 않으면 이 뒤를 잇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더니, 공이 노하여 목을 베라고 하였다. 호기스럽고 사나움이 이와 같았다. 《소문쇄록》
○ 공은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윤자당(尹子當)과 어미는 같고 아비는 다른 형제이다. 자당의 어머니 남씨가 젊었을 적에 과부가 되어 함양에 있었는데, 자당이 일곱 살 때에 어미를 따라 무당 집에 가서 운수를 물었다. 무당이 말하기를,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이 아기는 귀히 될 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아우의 힘으로 귀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남씨가 말하기를, "과부의 자식이어찌 아우가 있을 것이오." 하였더니, 뒤에 남씨가 이씨 집에 가서 아들을 낳은 것이 공이었으며, 자당도 또한 공의 힘으로 공신을 봉하는데 참여하게 되었다. 《용재총화》
(3)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세종조의 명신(名臣)
[김돈(金墩)] 김돈은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참의 김후(金厚)의 손자이다. 태종 정유년(1417)에 생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였고,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인순 부윤(仁順府尹)에 이르렀다.
○ 공은 젊었을 때부터 학문에 힘을 썼다. 세종이 임금이 되기 전에 그의 명성을 듣고 불렀으나 공이 사양하였다. 문과에 오르니 세종이 불러 보고 이르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했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젠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 하였다. ○ 공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외직을 구하였고, 특별히 역말을 내어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서 봉양에 편하게 하니, 선비들이 그를 영광으로 여겼다. ○ 공은 의상(儀象)에 정통하여 세종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참여하였다. ○ 공은 오랫 동안 근시(近侍)로 있으면서 말로 아뢰는 것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므로 승지의 직에 7년이나 있었다.
(4)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찬술(纂述)과 제작(制作)
○ 김돈(金墩)ㆍ김조(金銚)에게 명하여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조그마한 정각 한 간을 짓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 자쯤 되게 하여 정각 가운데에 두고, 그 안에 옥루(玉漏)를 설치하고 바퀴를 달아 물로 돌게 하였다. 또 사신(四神)ㆍ십이신(十二神)ㆍ고인(鼓人)ㆍ종인(鍾人)ㆍ사신(司辰)ㆍ옥녀(玉女) 등을 만들어 모든 기관들이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않고 저절로 치고 저절로 운행하여마치 신이 그렇게 하는 듯 하였다. 하늘과 해의 도수와 구(晷)와 누수(漏水)의 시각이 위로 하늘의 운행과 조금도 차이가 없었다. 또 누수의 남은 물을 이용하여 기기(欹器)를 만들었는데, 기기는 비면 기울고 물이 중간쯤 차면 바르고 가득차면 엎어짐이 모두 옛 말씀과 같아서 이로써 천도(天道)영허(盈虛)의 이치를 살피게 되었다. 산의 사방에는 빈풍(豳風) 칠월시(七月詩)에 의거하여 사시의 경치를 만들고 나무에 인물ㆍ새ㆍ짐승ㆍ초목의 형상을 새겨 만들어 그 절후에 맞게 배포하여 민생의 농사짓기 어려움을 보였다. 그 이름은 흠경각(欽敬閣)이라 하였으니, 이는 곧 《서경》의 '흠약호천(欽若昊天) 경수인시(敬授人時)'의 뜻을 취한 것이었다. 《국조보감》《필원잡기》《대동운옥》
3)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 자료 (2006. 10. 26. 태영(군) 제공) [牌] 패이다. [보시패(報時牌)]: 보루각(報漏閣)에는 12시를 알리는 신(神)을배열하여 각 신이 시패(時牌)를 잡고 번갈아 가며 시각을 알리는데, 그것을 ‘보시패(報時牌)’라 한다. <東文選卷82 ‘金墩의 記’>
[壺] 술병이다. [누호(漏壺)]: 우리 세종께서 명하여 보루각(報漏閣)을 건립 하였는데 위에는 물이 떨어지는 병을 벌여 놓고 아래는 물을 받는 병을 두었다. 그 제도가 지극히 정밀 하였다. <金墩의 記>
보루각(報漏閣): 조선시대 세종의 명에 의해 세운 집으로 물시계에 관한 일을 맡아 보던곳이다. 김돈(金墩)의 記: 김돈(1385~1440)이 쓴 보루각의 기문(記文)이다. 김돈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과학에 해박한 지식을 갖고있던 학자이다. 본관은 안동이다. 1417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도승지에 이르렀다.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을 만들 때 참여 하였다. [辰] 별의 모습(辰象)이다. 또 때(時)이다.
[사신(司辰)]: 고려의 제도에 태사국(太史局)에 설호(설壺), 사신(司辰)등의 관직이 있었다.<高麗史卷76 ‘志’ 第30 ‘百官’ 第1 ‘書雲觀’> 보루각(寶漏閣)에 사신목인(司辰木人)이 있는데 때에 따라 저절로 시간을 알리고 사람의 힘을 빌지 않았다. <東文選倦82 金墩 報漏閣記> 설호(설壺): 호(壺)는 물시계를 가르킨다. 설호는 물시계를 관리하는 관직이다. 사신(司辰): 날이 샘을 알리는 것을 맡아 보는일.
김돈(金墩): 1385~1440 본관은 안동이다. 천문학자이며 벼슬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세종의 명으로 갑인자(甲寅字)의 주조와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드는데 참여 하였다.
[神] 신령스러운(靈) 것이다. [보루삼신(報漏三神)]: 국가에서 물시계를 설치하고 이름하여 삼신각(三神閣)이라 하였다. 자리를 2층으로 마련하고 삼신은 위층에 있다. 시(時)를 알리는 자는 종을 울리고, 경(更)을 알리는 자는 북을 울리며, 점(點)을 알리는 자는 징을 울린다. <東文選卷82 金墩의 報漏閣記>
[墩] 평지에 흙무더기를 쌓아 놓은 것이다. [김돈(金墩)]: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중찬(中贊)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다.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조선 세종(世宗)이 세자(世子)로 있을 때 그 명성을 듣고 부르니 공이 사양 하였다. 과거에 급제하자 임금이 불러서 말하기를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는데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려”라고 하였다. 어머니를 위해서 여러 차례 지방직을 청하자 특별히 역마(驛馬)로 어머니를 서울로 모셔와서 효도로 봉양하기에 편하도록 해주니, 사람들이 영예로 여겼다. 김돈은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임금이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 김돈도 참여하였다. 승지(承旨)의 자리에 있었던 것이 모두 7년이다.
간의대(簡儀臺): 경회루(慶會樓) 북쪽에 설치되었던 천문관측대. 보루각(報漏閣): 물시계에 관한일을 맡아보던 기관.
[榮] 영화(榮華). 풀에 달린꽃. 집의 처마. [사림위영(士林爲榮)]: 김돈(金墩)이 어머니를 위해서 여러 차례 외직에 임명해줄 것을 요청하자 세종(世宗)임금은 특별히 역마(驛馬)를 내려 어머니를 모시고 서울로 와 효성으로 봉양하기에 편하도록 했다. ‘사림에서 영광으로 여겼다’. <行蹟>
[구] 해 그림자(日影). 또 법칙(規)의 뜻이다. (해그림자,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구)]: 김돈(金墩)이 지은 앙부일구명(仰釜日구銘)이 있다.
<東文選 卷50 金墩 ‘仰釜日구銘’> 4) 조선왕조실록에서 (2002. 6. 28. 발용(군) 제공) 22살에 왕위에 오른 세종 대왕은 54살에 하직했으니 32년동안 왕위에 있었던 셈이다. 그러나 늘 격무에 시달리던 세종은 40대에 들어서면서 급속히 건강이 나빠졌다. 그래서 세종은 이미 장성한 왕세자에게 결재권을 넘겨 주고 자신은 일사 업무에서 물러나기를 희망앴다. 마흔 살이 되던 1436년에 왕세자 섭정 문제를 꺼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양보했다. 그러나 세종은 1442년 기어이 신하들을 설득 자신의 뜻을 이루었다. 이는 날로 악화되어 가던 세종의 건강 상태 때문이었다. 세종 21년(1439) 6월 21일 세종이 이야기하는 자신의 병세를 살펴보자. 세종 085 21/06/21(정유) / 강무를 세자에게 위임하도록 하는 논의를 하다 임금이 김돈(金墩)에게 이르기를, “내가 젊어서부터 한쪽 다리가 치우치게 아파서 10여 년에 이르러 조금 나았는데, 또 등에 부종(浮腫)으로 아픈 적이 오래다. 아플 때를 당하면 마음대로 돌아눕지도 못하여 그 고통을 참을 수가 없다. 지난 계축년 봄에 온정(溫井)에 목욕하고자 하였으나, 대간(臺諫)에서 폐가 백성에게 미친다고 말하고, 대신도 그 불가함을 말하는 이가 있었다. 내가 두세 사람의 청하는 바로 인하여 온정에서 목욕하였더니 과연 효험이 있었다. 그 뒤에 간혹 다시 발병할 때가 있으나, 그 아픔은 전보다 덜하다. 또 소갈증(消渴症)이 있어 열 서너 해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역시 조금 나았다. 지난해 여름에 또 임질(淋疾)을 앓아 오래 정사를 보지 못하다가 가을 겨울에 이르러 조금 나았다. 지난봄 강무(講武)한 뒤에는 왼쪽 눈이 아파 안막(眼膜)을 가리는 데 이르고, 오른쪽 눈도 인해 어두워서 한 걸음 사이에서도 사람이 있는 것만 알겠으나 누구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니, 지난봄에 강무한 것을 후회한다. 한 가지 병이 겨우 나으면 한 가지 병이 또 생기매 나의쇠로(衰老)함이 심하다. 나는 큰 일만 처결하고 작은 일은 세자로 하여금 처결하게 하고자 하나, 너희들과 대신들이 모두 말리기에 내가 다시 생각하매, 내가 비록 병이 많을지라도 나이가 아직 늙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가볍게 말을 낸 것을 후회한다. 다만 강무(講武)는 나라의 큰 일이고 조종께서 이미 세우신 법이다. 하물며 이제 동서(東西) 두 국경의 수어(戍禦)를 바야흐로 일으켰으니, 군자의 준비를 늦출 수야 있겠느냐. 내가 지난번에 세자로 하여금 강무하게 하려고 하였더니 대신들이 말리고 너도 역시 말렸는데, 나는 그 옳은 줄을 알지 못하겠다.하물며 이제는 쇠하고 병이 심하여 금년 가을과 내년 봄에는 친히 사냥하지 못할 듯하니, 세자로 하여금 숙위(宿) 군사를 나누어서 강무하게 하고, 군중의 일은 병조의 당상(堂上) 한 사람과 병방 승지(兵房承旨) 한 사람이 같이 의논하여 처결하며, 만일 큰 일이 있거든 세자에게만 고할 뿐이다. 종친은 5, 6명에 지나지 말고, 사복(司僕)도 반(半)으로 나누어서 역마(驛馬) 1백여 필로 하면 강무의 큰 일을 폐지하지 아니하고 폐를 덜 것이니, 너희들은 병조의 당상과 더불어 사목(事目)을 의논하여 아뢰라.” 하니, 김돈(金墩)이 대답하기를, “예로부터 세자는 군부(君父)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였습니다. 신이 지난번에 아뢰기를, ‘현시로써 말하오면, 세자가 비록 삼군(三軍)의 군사를 거느리고 온 나라에 행할지라도 누가 의심하고 다른 마음을 가진 이가 있겠사옵니까마는 후세에서 예사로 삼아 행한다면 반드시 소인(小人)이 있어 이간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하오매, 전하께서 신에게 이르시기를, ‘네 말이 옳다. 나와 태종(太宗) 사이에도 박습(朴習)·이관(李灌) 등의 무리가 있었다.’고 하셨으므로, 신은 생각하기를, 전하께서 이런 의논을 다시 내시지 않으시리라고 하였삽더니, 이제 다시 상교(上敎)를 받자오니 이는 행할 수 없는 일이옵니다.” 하고, 여러 승지가 모두 아뢰기를, “진실로 돈(墩)의 아뢴 바와 같습니다.”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강무는 중대한 일이며 세자는 내 아들인데, 세자로서 강무함이 무엇이 불가함이 있겠느냐. 춘추 시대(春秋時代)에 정벌(征伐)을 회맹(會盟)하였는데, 나라의 임금이 병이 있으면 세자 및 대부(大夫)가 회맹에 참예하였으니, 나의 뜻이 이미 결정되었다. 너희들은 병조 당상관과 더불어 사목을 의논하여 바치어라.”
하니, 돈(墩)이 아뢰기를, “춘추 시대에는 열국(列國) 중에서 만약 회맹에 참예하지 아니하면 열국에서 맹서(盟誓)를 배반하였다고 책하였으므로, 그 세자가 모임에 참예한 것은 부득이한 일이었사오니 나라 안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것과 비교할 것이 아니옵니다. 또 전하께서 나라 안에 계시고 세자가 입조(入朝)하는 예(例)도 아니오며, 이 전에 없는 일이오니 대신에게 알리지 아니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먼저 가부를 의논한 뒤에 그 사목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까 하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말하는 춘추 시대의 일은 그러하나, 속히 사목(事目)을 선택하도록 하라. 내가 장차 사목을 가지고 대신에게 의논하도록 하겠다.” 하였다. 이에 병조 판서 황보인(皇甫仁)·참판 신인손(辛引孫)과 더불어 의논하니, 황보인이 아뢰기를, “태자의 직책은 무군(撫軍)과 감국(監國)이온데, 따르는 것[從]을 무군이라 이르고 지키는 것[守]을 감국이라 하오며, 태자(太子)가 국경안에서 군사를 거느린 것은 있지 아니하였습니다. 원컨대, 먼저 대신들과 그 가부를 의논하옵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을 이미 결정하였는데, 경 등이 옛 글에 없는 바라고 말하니, 재촉하여 집현전으로 하여금 옛 글을 상고해 올리게 하라.”하였다.
【원전】 4 집 220 면 뒷날 문종이 되는 왕세자에게 많은 업무를 이양한 뒤에도 세종의 격무는 계속되었다 이 시절의 업적 가운데 하나가 바로 1443년 창제하고 1446년 반포한 훈민정음이다. 아마도 훈민정음을 창제하기 위해 왕세자에게 일상 업무 권한을 넘겨 준 것이 아닐는지???
5) 김돈의 간의대기· 보루각기· 흠경각기-세종 천문대 -간의대- 건설 보고서 (2002. 6. 28. 발용(군) 제공) 출전 : 글 남문현 건국대 교수, 한국산업기술사학회장
세종은 여러 가지 천체 관측기들과 시간측정 기구들을 제작한 다음 경회루 주변에 배치하였다. 천체 관측기를 설치한 간의대,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 흠경각루를 설치한 흠경각이 그것이며 이들에 대한 기문이 각각 간의대기, 보루각기, 흠경각기이다. 이 건축물들은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대부분 없어져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기문들이 남아있어 해당 건축물의 규모나 구조는 물론 여러 가지 기구와 시설의 구조와 작동원리, 쓰임새, 응용방법들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선인들은 큰 공적을 남긴 인물이나 조상의 업적을 기리는 건축물을 완성한 다음 그것에 대한 내력을 기문(記文)으로 적어놓아 사람들이 알게 하였다. 지금도 궁궐이나 사찰, 정자, 서원, 향교, 사우 등에서 이러한 기문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건축물은 남아있지 않지만 기문이 남아있어 그 건축물에 대하여 알 수 있는 경우도 많은데, 조선 초기에 경복궁에 세웠던 여러 가지 시간측정 시설들이 여기에 속한다. 세종은 여러 가지 천체 관측기들과 시간측정 기구들을 제작한 다음 경회루 주변에 배치하였다. 천체 관측기를 설치한 간의대, 자격루를 설치한 보루각, 흠경각루를 설치한 흠경각이 그것이며 이들에 대한 기문이 각각 간의대기, 보루각기, 흠경각기이다. 이 건축물들은 임진왜란 중에 경복궁이 소실되면서 대부분 없어져 지금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지만 다행히도 기문들이 남아있어 해당 건축물의 규모나 구조는 물론 여러 가지 기구와 시설의 구조와 작동원리, 쓰임새, 응용방법들을 대강이나마 알 수 있다. 이 기문들이 아니었더라면 15세기를 대표하는 세종 시대 과학기술 업적들은 역사 속에 영원히 묻혀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들은 『세종실록』, 『동국여지승람』, 『증보문헌비고』등 조선시대 여러 문헌에 내용이 전해온다. 위에서 언급한 기문들의 개략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자세한 내용은 『세종실록』의 원문이나 번역문을 참고하기 바란다.
간의대기 『세종실록』77권 7~12쪽, 세종 19년 4월 15일 갑술조 당시 조선의 임금은 명나라의 책봉(冊封)을 받았으므로 명나라 황제가 매년 동지절에 각국에 배포하는 대통력(大統曆)이라는 역서(曆書)를 받아다 써야했다. 조선시대에 이 역서를 받으러 중국에 가는 사신이 바로 동지사(冬至使)라는 사신이다. 사신이 역서를 받아 귀국하는데는 몇 달이 걸렸으므로 한양에서는 정월이 지나서야 새해의 책력을 볼 수 있었다. 책력은 연중 날짜와 24절기의 정확한 시각을 비롯하여 기념일이나 농사에 필요한 시기 등 일상생활에 긴요한 내용이 들어 있어 새해가 시작되는 동지절에는 바로 백성들에게 나누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정월이 지나서야 나누어 주게되니 이는 한 나라의 임금으로서는 체통이 서지 않는 일이었음은 물론 받아오는 책력의 부수도 적어(명나라 실록에 따르면 조선에는 황력 10부, 민력 100부 정도가 배정되었다) 대소 신하들에게 나누어주기에도 턱없이 모자라 이것을 다시 인쇄하여 나누어주어야 하는 불편까지 겪어야했다. 더구나 대통력은 북경을 기준을 작성된 역서여서 한양을 기준으로 할 때는 시간의 차이가 생기게 마련이었다. 이에 세종은 한양을 기준으로 하는 역서를 만들어 백성에게 반포하기로 결심하고 역서 교정에 필요한 천문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먼저 한양의 북극출지(위도)에 맞는 천체 관측기와 시계들을 제작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역법 독립을 위해 세종이 착수한 의표창제(儀表創製)사업인데 이 사업에 대한 전말과 성과를 기록한 것이 김돈(金墩, 1385-1440)의 간의대기(簡儀臺記)이다. 이 사업은 세종 14년 초가을에 착수되어 7년 만인 세종 20년 봄까지 계속되었다. 먼저 북극출지를 확정하기 위해 대간의를 제작하고 이것을 설치할 간의대를 축조하였다. 여기서 간의대란 경회루 북쪽 야외에 간의 등을 설치한 축대시설을 말하는데 한편으로는 7년여에 걸쳐 제작한 모든 기구와 시설물을 총칭하는 천문대를 통칭하기도 한다. 간의대기는 천문대 시설과 기구 전부에 대한 기록이다.
여기에 언급된 시설물과 기구들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 1. 천체관측 기구인 간의와 정방안(正方案) 그리고 이것을 설치한 축대시설 2. 소형화시킨 간의 3. 해와 별을 이용하여 시각을 결정하는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와 이것을 소형화시킨 소정시의 4. 동지에 해 그림자의 길이를 측정하여 일 회귀년(回歸年)의 길이를 정하는 동표(銅表) 5. 천체 운동을 모형화한 혼의와 혼상 그리고 이것을 설치한 건물 6. 표준시계와 이것을 설치한 보루각 7. 천문시계와 이것을 설치한 흠경각 8. 해시계인 앙부, 현주, 천평, 정남 일귀 7.도량형의 기본 척도인 주척(周尺) 이다.
보루각기 『세종실록』65권 1~3쪽, 세종 16년 7월 1일 병자조
장영실이 만든 표준시계인 보루각루(흔히 자격루라 부른다)의 원리와 구조, 운영 방법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서와 명은 김조(초명은 김빈)가 짓고, 기는 집현전 학사인 김돈이 지었다. 자격루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기계 기술자인 장영실이 만든 국가 표준시계였다. 보루각기는 자격루의 원리와 구조를 기록한 것으로 단일 기계에 대한 기록으로는 조선조 최초 최대의 것이다. (자격루의 구조에 대하여는 본보 1999년 5월 호「자격루~우리 나라 최초의 디지털 시계」참조) 현재 보루각기를 바탕으로 복원 설계가 끝나 실물제작을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문화재관리청은 경복궁의 경회루 앞 보루각 옛터에 보루각을 짓고 그 안에 자격루를 복원하여 설치할 계획이다.
흠경각기 『세종실록』80권 5~6쪽, 세종 20년 정월 7일 임진조 흠경각루(일명 옥루)는 장영실이 자격루에 이어 만든 또 하나의 자동 물시계로 천체현상과 시각을 동시에 연시(演示)해 주는 천문시계인데 이것의 제작 전말을 적은 것이 흠경각기로서 우승지 김돈이 지었다. 세종은 『서전(書傳)』의 가르침에 따라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에게 시를 알리고 농사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해 침전 가까이 흠경각을 짓고 그 안에 천문시계를 설치하였다. 시계 주변에는 시경(詩經)에 나오는 빈풍도의 모형을 만들어 늘어놓고 백성들의 생활과 농사짓는 어려움을 몸소 느끼며 중농애민(重農愛民)하는 정신과 하늘을 공경하는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장소로 삼았다. 이 시계는 당시 중국은 물론 아라비아의 첨단 시계제작기술을 참고하여 만든 것으로 조선조 천문시계의 최고봉이다. 현재 기문에 나타난 대로 전체 규모와 동작원리를 연구하고 있다.(사진은 10여 년 전 북한 학자들이 제작한 흠경각루 이다)
현재 문화재관리청은 경복궁을 복원하면서 위의 시설과 기구들을 복원하기 위해 1992년부터 기초조사와 아울러 일부 기구를 복원하거나 설계를 해놓은 상태이다. 머지 않아 이들 시설과 기구들이 복원되어 찬란했던 세종 과학의 면모가 우리 앞에 들어 나기를 기대해 본다
6) 부윤공 시문 (2002. 7. 2. 태영(군) 제공) *출전 : 동국여지승람 전라도편 강진현(康津縣)에서
한구역의 소나무(松)와 대(竹)는 성긴 연기(煙氣) 밖이요 십리나 펼쳐있는 뽕(桑)과 삼(麻)밭은 가는비(細雨)속 이로구나
7) 황희선생이 부윤공에게 주는 시 (2007. 1. 8. 영환(문) 제공) 출전 : 방촌 황희선생문집 都承旨 金公 墩에게 붙여준 詩 방촌 황희 乞骸年去未休官 : 벌써 물러날 나이 지났건만 벼슬은 그만두지 않고 伴食都堂幾厚顔 : 都堂에서 밥만 먹고 있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香案從容陣老病 : 조용한 여가 보아 임금께 여쭈어서 須敎白髮對靑山 : 휘날리는 백발로 저 청산이나 대하게 해주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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