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안풍군 柏谷 金得臣(1604년~1684)의 묘갈은 숙종14년(1688) 증평읍 율리에 있는 그의 묘소 앞에 세웠는데 비문은 游齋 李玄錫이 짓고 글씨는 9촌 조카인 金鳳至가 썼다.
1) 원 문
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安豊君金公墓碣銘幷序 公姓金, 諱得臣. 字子公, 號 栢谷. 安東人, 安興君諱緻之子也. 以萬曆, 甲辰十月十八日生. 其生也, 安興君夢見老子. 故幼名夢聃. 幼而魯, 十歲始就學. 十九, 史略首章僅二十六字, 而三月不能口讀. 安興公猶且勤誨之曰, 是兒命直文曜, 長必大以文鳴於世也. 公亦諄謹不好弄. 讀書不怠九年, 學略, 解其衆. 時作聯語輒警拔. 翌歲, 安興公宰東萊, 行戒之曰, "若勉讀書, 毋要交遊." 公遂閉戶日孜孜講誦. 期而觀, 進所製詩, 安興公喜曰 "文已發 矣. 力攻之遠就也." 公始聞奬賞語, 喜甚而舞. 乙丑, 丁安興君憂. 服 , 而其文益肆, 先輩屈膝, 華聞丕振. 詩甚高潔淸 , 調新而格奇. 澤堂李公植北渚金公 , 競許騷壇第一, 當華使時見推, 以白衣製述官官. 卽權石洲(名 . 進士)舊也. 當華使時見推. 以白衣製迷官官. 卽權石洲(名 . 進士)舊也. 龍湖漢江等作, 至荷宸 , 世以爲榮. 平生讀古書極勤苦. 負 山寺二十年, 有不讀, 讀必數萬遍. 於伯夷傳則至數十萬. 仍名小齋曰, 億萬. 獨其科擧文, 與俗尙詭, 屢進屢屈. 以安興君命, 限六十應擧.
壬午, 中司馬, 壬寅, 登文科. 由成均學諭, 陞典籍, 旣直公館. 出語人曰. 昨吾冒風, 寒冷透骨, 旣直廬煖, 如火欲汗, 此造化也. 人而久擅造化權不祥, 我將歸矣. 識者謂足以警世云. 遂歸槐壤, 築舍于開香山先塋側, 扁曰醉默. 詩酒自娛, 除拜不就. 或强起, 一謝成均之直講·司藝憲府掌令·兵工禮曺負外·濟用·司僕·掌樂·軍資·宗簿·司導寺正·槐院判校·江原都事·豊基洪川旌善登宰. 是公履歷而又預知製敎, 選其得邑也. 朝議以公騷人, 於事沮之. 公少嘗蔭補參奉, 以大夫人在. 故勉赴官, 俄棄之. 辛酉, 用世勳陞通政. 癸亥, 以優老典, 階嘉善, 襲封安豊君. 甲子秋. 患泄痢, 且病疽, 八月卄九, 捐館, 壽八十一. 始公善相人, 多奇驗. 自謂相有兵死法. 惟修飭 可免. 病且革, 昏迷忽曰, "吾頰有刃痕否? 適會家人, 先備殮 衣衾. 有惡少輩夜持兵入劫取之, 公已冥然, 刀過頰而不省. 仍遂屬 , 其前知多類此. 訃聞, 賜祭賻如儀. 葬在淸安縣左龜山壬坐之原, 從先兆也.
公相貌奇古, 天稟淸高, 如方外士, 於世味泊如也. 家居屢空, 晏如也. 無一點塵俗態, 嘗言吾不欺心不欺人. 言必副約必踐. 不作皺眉事, 不走權貴門, 是一生心跡也. 又勉學者, 無以才不猶人, 自晝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已. 若不具不廣, 當致精於一一而成, 勝於博而無成者, 此皆公所自得也. 公質行尤篤. 有庶毋性悖, 公待以至誠, 竟底感化. 鄕先生朽淺黃公宗海, 甚重公而賢之. 久堂 朴尙書長遠, 少學於安興公, 與交至 . 一日値公初度, 却酒食涕泣曰. 吾思久堂, 心忽然若尖, 意者其殆乎及訃至, 果以其日逝. 公之著述甚富, 多散佚於丙子亂, 見存僅千篇. 酷好山水, 遊如金剛山·白馬江及湖西四郡等地, 杖屢 遍. 詩具在可以觀焉. 且嗜草聖, 醉無聊, 必揮灑而遣興焉, 未嘗示人. 故世無知者.
公係出新羅. 有高麗上洛伯方慶, 爲十四代祖. 高祖諱錫. 進士·贈領議政. 愍巳卯士禍, 隱不仕. 曾祖諱忠甲. 持平·贈左贊成. 祖諱時晦. 文富平府使·贈典翰. 考安興公後. 其季上洛府院君. 寔諱時敏. 死節於晋, 戰功殊偉, 錄宣武勳, 贈領議政. 安興君號南峯. 卒官嶺南伯. 以公推冥恩, 贈亞銓. 泗川睦氏. 吏曺參判詹之女. 公配金氏, 籍慶州. 考聲發, 掌令·贈都丞旨. 菴先生諱 四世孫也. 擧三男二女. 男長天柱, 贈吏判, 娶贈吏參柳成厦女. 生四男, 可敎別提, 可訓·可行縣監. 可聲, 一壻朴沔. 次天 娶廣寧君李繼道女. 生五男, 可遠·可近參奉, 可 ·可虔監察. 可尙. 一壻崔 . 次天 , 娶李承淵女. 長適判決事崔渲. 有子起昌,壻典籍權惺. 次適郡守李重輝. 有子 , 內外孫曾合數十人. 銘曰. 無懷葛天之民, 老杜孟郊之詩. 行心八十年兮如一日, 讀書億萬數兮. 奇之又奇, 四尺之墳兮. 千古之名, 九原難作兮. 噫!
2) 번역문
공의 성은 김(金)이요, 휘는 득신(得臣)이라. 자는 자공(子公)이요, 호는 백곡(栢谷)이라. 안동인으로 안흥군(安興君) 휘(諱) 치(緻)의 아들이다. 만력 갑진년(1604년) 10월 18일 생이라. 그 태어날 때 안흥군(安興君)이 꿈에 노자(老子)를 보았다. 그래서 어릴 때의 이름을 몽담(夢聃)이라 했다. 어릴 때 노둔(老鈍)하여 10세에 비로서 학교(學校)에 나갔다. 19세에 사략수장(史略首章) 겨우 26자를 삼 개월이 되어도 입으로 읽지 못했다. 안흥군(安興君)이 오히려 또한 부지런히 그를 깨우쳐 말하기를 "이 아이는 문장의 밝음을 명받았기 때문에, 장성하면 반드시 크게 문장으로 세상을 울릴 것이다." 라고 했다. 공(公)이 또한 정성스럽고 삼가하여 농(弄)을 좋아하지 않았다.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아 9년에 사략(史略)을 배웠는데 그 많은 것을 이해했다. 그 때에 연어(聯語)를 지었는데 문득 놀랄 만큼 뛰어났다. 다음 해에 안흥공(安興公)이 동래(東萊)의 원으로 가면서 행해야할 계율(戒律)을 말하기를 "너는 독서에 힘쓰고 사람을 사귀지 말라." 라고 했다. 드디어 공(公)이 사립문을 닫고 날로 부지런히 강송(講誦)했다. 기약(期約)하고 지은 시가 진척한 것을 보고는 안흥공(安興公)이 말하기를 " 문장력이 이미 발휘되기 시작했도다. 힘써 노력하여 원대하게 성취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공(公)이 비로소 권장 받는 말을 듣고, 기쁨이 심하여 춤을 추었다. 을유년(乙酉年:1625년) 정안흥군(丁安興君)의 상을 당했다. 상을 마친(服 )후에 문장이 더욱 발전하여 선배들이 무릎을 꿇었으며 영화로운 명성이 크게 떨쳤다. 시가 매우 고결(高潔)하고 청아(淸雅)하며 탁 트인 맛이 있었으며, 격조(格調)가 기특하고 새로웠다. 택당(澤堂) 이식공(李植公) 북저(北渚)김류공(金 公)이 다투어 시단(詩壇)의 제일이라 했으며, 화려(華麗)함이 당시에 추앙을 받아 백의(白衣)로 제술관(製述官)의 벼슬을 받았으니, 즉 권석주(權石洲:이름은 필 . 진사進士) 친구라. 호한강(龍湖漢江) 등(等)의 작품에서 하신(荷宸)의 설( )에 이르기까지 대대로 그것을 영광으로 삼았다. 평생 고서를 읽음에 지극히 부지런하며 수고롭게 했다. 책상자를 짊어지고 산사(山寺)에 가서 읽지 못한 책을 반드시 만 번을 읽었다. 백이전(伯夷傳)을 수십만 번을 읽었다. 이로 인해서 작은 서재의 이름을 억만재(億萬齋)라 했다. 유독 과거문과 속세와는 오히려 어긋나서 여러 번 나아갔으나 여러 번 떨어졌다. 안흥군(安興君)이 명령하기를 60에 한하여 과거에 응시하라 했다.
임오년(壬午年:1642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임인년(壬寅年:1662년)에 문과(文科)에 올랐다. 성균관 학유(成均學諭)를 거쳐 전적(典籍)에 승진했으며, 이미 공관에 당직을 섰다. 사람들에게 말을 꺼내기를 " 어제 내가 바람을 무릅쓰고 가는데 차고 싸늘한 기운이 뼛속에 스며들어, 이미 곧바로 집으로 가서 따스하게 하는데 불같은 것이 땀이 날려고 하니 이것이 조화가 일어날 징조(徵兆)이다. 사람들이 이 조화를 오래도록 마음대로 생각하니 권력은 상서(祥瑞)로운 것이 아니니, 나는 장차 돌아 가리라."라고 했다. 지식인들은 일컫기 세상을 경계한 것이라 말한 것이라 했다한다. 드디어 괴산(槐山)으로 돌아가서 개향산(開香山) 선영(先塋) 옆에 집을 짓고 취묵(醉默)이라 편액(扁額)을 붙였다. 시(詩)와 술로 스스로 즐기며, 벼슬을 제수해도 나아가지 않았다. 혹 억지로 일어나 성균지직강(成均之直講)·사예헌부장의(司藝憲府掌令)·병공예조부외(兵工禮曺負外)·제용(濟用)·사복(司僕)·장락(掌樂)·군자(軍資)·종부(宗簿)·사도사정(司導寺正)·괴언판교(槐院判校)·강원도사(江原都事)·풍기홍천정 등재(豊基洪川旌善等宰)을 한결같이 사양했다. 이것이 공의 이력(履歷)이며 지제교(知製敎)에 이르렀으며, 다스릴 읍(邑)을 선택했다. 조정에서 공(公)을 시인(詩人)이라 논의하여, 사무에는 거리가 멀다하여 그것을 저지했다. 공이 소시적에 일찍이 음보(蔭補)로 참봉(參奉)을 했으나 어머니께서 살아 계셨다. 그래서 관직에 나가려했으나 조금 있다가 그만 두었다. 신유년(辛酉年:1681년)에 선세(先世)의 공훈(功勳)으로 통정(通政)에 승진하였다. 계해년(癸亥年:1683년) 우로(優老)로 특전(特典)을 받아 가선(嘉善)으로 승진했으며, 안풍군(安豊君)에 봉(封)해졌다. 갑자년(甲子年:1684년) 가을 이질병을 앓았으며 또한 등창을 앓아 8월 29일 돌아가니 81세였다. 처음 공(公)은 사람의 관상를 잘 보았는데 기이한 체험이 많다. 스스로 말하기를 "관상에는 병사법(兵死法)이 있는데, 오직 칙당(飭 )을 닦으면 면할 수 있다."고 했다. 병이 장차 더 아프게 되어 혼미(昏迷)해졌는데 문득 말하기를 "내 뺨에 칼 자욱이 있는가 없는가?"라고 하는데 마침 집사람들을 모아 먼저 수의를 준비하였다. 악소배(惡少輩)가 밤에 무기를 들고 들어와 겁주며 취하려하니, 공이 이미 혼미(昏迷)하여, 칼이 빰을 지나는 것을 살피지 못했다. 이로 인하여 드디어 숨을 거두시니 그 전에 이와 같은 일이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부음(訃音)을 듣고 제사 부의(賻儀)를 의전(儀典)에 맞추어 하사하였으며, 청안현(淸安縣) 좌구산(左龜山) 임좌(壬坐)의 언덕에 장사지내니, 여기에 선영이 있기 때문이다.
공(公)의 얼굴모습은 기이(奇異)하고 고고(高古)하며 천품(天稟)이 맑고 고아(高雅)하여 방외(方外)의 선비같아 세상 맛이 담박(淡泊)했다. 집안살이가 매번 가난했으나 편안했다. 한 점의 세속적인 자태가 없어 일찍이 말했다." 나는 마음을 속이지도 않고 사람을 속이지도 않는다."라고. 말은 반드시 다음으로 하고 약속은 반드시 실천했다. 얼굴을 찡그리는 일을 하지 않고, 권세가(權勢家)와 부귀가(富貴家)에 나가지 않았었으니, 이것이 일생동안의 마음의 자취였다. 또한 배움에 힘쓰는 사람은 재주가 남과 같지 않음이 없는데 스스로 계획한 것이다. 나보다 노둔한 사람이 없는데, 끝내 또한 성공이 있으니 힘쓰고 강화하는데 있을 뿐이다. 만약 구비하지도 못하고 넓지도 못하면, 마땅히 하나하나 정예하게 하면 이루니, 넓힌 것보다 더 낫게 하고도 성공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 모두 공(公)이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공(公)은 어진 행실이 더욱 돈독(敦篤)했다. 서모(庶母)가 성격이 거스르는 점이 있었으나, 공(公)이 대접할 때 더욱 정성스럽게 하여 마침내 감화하셨다. 향선생(鄕先生)인 후천(朽淺) 황종해공(黃宗海公)이 공(公)을 매우 중히 여기고 어질다 여겼다. 상서(尙書)를 지낸 구당(久堂) 박장원(朴長遠)이 소시적 안흥군(安興君)에게 배울 새 서로 사귀는데 지극히 즐거워했다. 하루는 공(公)의 생일날이 되었는데, 밥을 물리치고 울면서 말하기를 " 내가 구당(久堂)을 생각하니 마음이 문득 뾰족해지는 것 같다. 생각하건데 아마 부고장(訃告章)이 올것 같다."라고했는데, 과연 그 말한 날에 서거(逝去)했다. 공(公)의 저술(著述)은 매우 많으나 병자란(丙子亂) 때 많이 흩어져버려서 겨우 천 편이 남아있다. 산수를 너무 좋아하여, 금강산(金剛山)·백마강(白馬江) 및 호서사군등지(湖西四郡等地)에 놀러다녀, 발길이 두루 이르렀다. 시는 갖추어져 있는데 볼 만하다. 또한 초성(草聖)을 좋아하고 무료할 때 술마시면 붓을 휘둘러 흥(興)을 떨쳤는데 일찍이 사람에게 보여주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에 아는 사람이 없다.
공(公)의 가계(家係)는 신라(新羅)에서 나왔다. 고려 상락백(上洛伯) 방경(方慶)이 14대조 된다. 고조(高祖)의 휘(諱)는 석(錫)이다. 진사(進士)에 합격하고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기묘사화(己卯士禍)를 번민(煩悶)하여 은둔(隱遁)하고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증조(曾祖)의 휘(諱)는 충갑(忠甲)이다. 지평(持平)·증좌찬성(贈左贊成)을 했다. 할아버지의 휘(諱) 시회(時晦)이다. 문부평부사(文富平府使)를 하고 전한(典翰)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아버지는 후에 안흥군(安興君)이됐다. 그 계(季)가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이다. 이의 휘(諱)가 시민(時敏)이다. 진주(晋州)에서 절의(絶義)를 위해 죽었으며, 전공(戰功)이 자못 우대해서 선무훈(宣武勳)에 기록되고, 영의정(領議政)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안흥군(安興君)은 호(號)가 남봉(南峯)이요, 영남백(嶺南伯으)로 관직(官職)을 마쳤다. 공(公)으로 인하여 명계(冥界)에서 은혜를 입어 아전(亞銓:이조참판)에 추증 받았다. 비( )는 사천목씨(泗川睦氏)로, 이조참판첨(吏曺參判詹)의 딸이다. 공(公)의 배필(配匹)은 김씨로 본관이 경주(慶州)이다. 아버지는 성발(聲發)로 장령(掌令)을 지냈으며 도승지(都丞旨)의 증직(贈職)을 받았는데, 충암선생( 菴先生) 휘(諱) 정( )의 사세손(四世孫)이다. 3남2녀를 낳았다. 장남(長男)은 천주(天柱)으로 이판(吏判)의 증직(贈職)을 받았으며 이참(吏參)의 증직(贈職)을 받은 류성하(柳成厦)의 딸에게 장가갔다. 4남(四男)을 낳았으며, 가교(可敎)는 별제(別提). 거훈(可訓)과 가행(可行)은 현감(縣監)을 지냈으며, 가성(可聲)과 한 명의 사위는 박면(朴沔)이다. 다음은 천정(天 )로 광녕군이계도(廣寧君李繼道)의 딸에게 장가갔다. 5남(五男)이 있는데, 가원(可遠)과 가근(可近)은 참봉(參奉)을, 가적(可 )과 가건(可虔)은 감찰(監察)을 했다. 가상(可尙)과 한 명의 사위 최정(崔 )이 있다. 그 다음은 천계(天 )로 이승연(李承淵)의 딸에게 장가갔다. 큰 딸은 판결사최선(適判決事崔渲)에게 시집갔다. 아들 기창(起昌)이 있으며, 사위 전적권성(典籍權惺)이 있다. 다음은 군수이중휘(郡守李重輝)에게 시집갔다. 아들 혐( )이 있으며, 내외손증(內外孫曾)을 합하여 수십인(數十人)이다.
명(銘)에 이른다
"무회(無懷)씨와 갈천(葛天)씨의 백성이요, 두보(杜甫)와 맹교(孟郊)의 시(詩)여. 행동과 마음이 팔십년을 하루 같았고, 책은 억만번을 읽었네. 기이(奇異)하고 또 기이 하도다, 네 자의 무덤이여. 천고의 명성 구원(九原)에서 이루기 어려우리. 아 애통하다.
通政大夫行兵曺參議知製敎李玄錫撰(號遊齋官判書) 九寸侄通訓大夫行司僕寺主簿金鳳至書 기 어려우리. 아 애통하다.
通政大夫行兵曺參議知製敎李玄錫撰(號遊齋官判書) 九寸侄通訓大夫行司僕寺主簿金鳳至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