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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 11. 1. 주회(안) 제공) <우암집)<김주> 김주 묘표음기(墓表陰記) ※ 목차는 편집자 임의로 적은 것임 1) 선계 공의 휘(諱)는 주(澍), 자(字)는 응림(應霖)이고, 성은 김씨이며 본관은 안동이다.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고조는 승문원 판교(丞文院判校) 휘 환(丸)이고, 증조는 증호조참의(贈戶曹參議) 휘 종손(宗孫)이며, 조부는 증병조참판(贈兵曹參判) 휘 성(城)이고, 부친은 증이조참판(贈吏曹參判) 휘 공량(公亮)이다. 모친은 전주이씨 현감 팽수(彭穗)의 따임이시다.
2) 1531년 진사시, 1539년 장원급제 공은 정덕(正德) 임신년(1512, 중종 7)에 태어나, 가정(嘉靖) 신묘년(1531, 중종 26)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기해년(1539, 중종 34)에 장원급제하였으며, 대각(臺閣)의 직책을 두루 거쳐 지위가 재열(宰列)에 이르렀다.
3) 1563년 종계변무 계해년(1563, 명종 18)에 왕명을 받들어 중국에 사신으로 가서, 왕가의 종계를 변설하매, 천자가 조칙을 내려 수정을 허락하였으나, 공관(公館)에서 고복(皐復)을 하니, 그 해 9월 17일이었다. 향년 52세이다. 을축년(1565, 명종 20) 정월 27일에 여주(驪州) 선영의 곁, 임좌(壬坐) 병향(丙向)의 벌에 장사지냈다.
4) 배위와 자녀 배위는 정부인(貞夫人) 이씨로, 종실 진양수(鎭陽守) 휘 영(渶)의 따님,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금손(尹金孫)의 외손이시다. 부인은 정덕 병자년(1516, 중종 11)에 태어나 만력(萬曆) 경진년(1580, 선조 13) 윤4월 23일에 몰하였으니, 향년 65세였다. 그 해 8월 17일에 공과 합장하였다.
3남 4녀를 낳았는데, 장남은 정남(正男)이고, 차남은 의남(義男)이며, 그 다음은 계남(季男)이다. 장녀는 좌랑 윤엄(尹儼), 둘째는 사인 이세량(李世良), 셋째는 사인 정문승(鄭文昇)에게 시집갔으며, 넷째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정남(正男)은 의빈(儀賓) 구한(具澣)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3남을 낳았으니, 희(憙), 원(愿), 언(언言+心)이다. 의남(義男)은 군수(郡守) 이감(李?)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3녀를 낳았다. 계남(季男)은 사과(司果) 안경무(安景武)의 따님을 아내로 맞아서 1남 2녀를 낳았으니, 아들은 협(협夾+心)이다. 윤엄은 5남 2녀를 낳았다. 아드님들은 민철(民哲), 민헌(民獻), 민준(民俊), 민일(民逸), 민각(民覺)이고, 따님들 가운데 장녀는 도사(都事) 황혁(黃赫)에게 시집갔다. 이세량은 3남 2녀를 낳았다. 아드님들은 심(심?+深), 화(화?+화), 번(藩)이다. 정문승은 2남 1녀를 낳았다.
만력 11년 계미(1583, 선조16), 5월 아무 날에 세웠다.
<호음집>(정사룡)
김공량 묘갈명(墓碣銘) 三남一녀를 두시니 장남은 완(浣)이요 차남은 척(滌)이니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하고 三남은 주(澍)이니 기해년 문과(己亥年 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여 지금 훙문관 교리(弘文館 校理)로 있는데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뛰어나서 한 세상을 울리고 女는 별제(別?) 이직(李직)에게 출가하니라.
완(浣)은 첨사 강석경(僉使 姜碩卿)의 딸에게 장가 들어 二남幾녀를 낳으니 남에는 충남(忠男) 효남(孝男)인데 모두 어리고 녀는 장중제(張仲悌)에 출가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리니라. 척(滌)은 박양근(朴養根)의 딸에게 장가 들어 一남을 낳으니 이름이 인남(仁男)이요, 주(澍)는 종실 진양수 영(宗室 鎭陽守 渶)의 딸에게 장가들어 二남一녀를 낳으니 이름이 순남(順男) 정남(正男)이요 모두 어리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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