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 주(金 澍) 1512(중종7)∼1563(명종18)--(안)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문단공 소개

 2. 영정소개

 3. 교지 소개

 4. 연보

 5. 친필소개

 6. 시문소개

 7. 우암유집 소개

 8. 각종 문헌 자료 소개

 9. 영정 봉안기

10. 유물 종합 정리

11. 우암유집 발간 과정 소개

12. 묘표음기

13. 시장

14. 신도비명

15. 국역 우암유집 발간식

16. 춘제 봉행

 

본문

p11.png 9. 화산군 영정 봉안기

        (2004. 7. 13. 주회(안), 발용(군) 제공)

2004년 7월 11일,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화산군 재실에서 화산군종회 태영 회장 등 후손을 비롯하여 안렴사공파종회에서 재택 회장, 회윤 부회장, 재균 종친께서, 그리고 사진촬영 및 기록차 발용(군), 주회(안) 종친이 참석하는 등 4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화산군(휘澍) 영정 봉안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올 1월부터 본격 추진되고 있는 화산군 문집 우암집 국역사업과 병행하여 벌써 오래전부터 화산군 종회의 숙원사업이었던 화산군 신도비를 지난 4월 5일 웅장하게 개수한 바 있고, 이번에는 화산군 영정을 제작 봉안하게 된 것입니다. 우암집 국역사업은 7월 9일 현재 번역 초안이 완료된 상태로 현재 교정 작업도 거의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는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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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군 영정은 지난 5월 중순부터 7월 중순까지 약 2개월에 걸쳐 용주 종친의 오랜 친구이기도 한 僻海 金松培 화백께서 작업을 맡았습니다. 천에 아교칠을 하여 영정을 그리면 쉽기는 하지만 좀이 잘 슬고 벌레가 낀다고 하여, 그리기는 좀 어렵지만 종이에 그렸다고 합니다. 영정을 그리고, 영정 사진을 찍고, 튼튼한 표구를 하여 화산군 재실에 봉안하게 된 것입니다.

 

영정 봉안식은 제례의 절차에 따라 거행하였고 (초헌관 태영, 독축 우진, 아헌관 재택, 종헌관 태호) 영정을 개봉하는 순간 화산군 할아버지를 처음 뵙는 후손들은 놀랍고 감격에 넘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 나왔습니다. 감격적인 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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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안식을 마치고 僻海 金松培 화백의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우암집의 화산군 詩文, 筆跡, 行蹟을 통해 화산군의 인품과 성격을 심리학적, 관상학적으로 상을 떠올려 그린 것이라 합니다. 김 화백은 심리학과 관상학을 따로 공부를 하여 이 계통에도 매우 정통하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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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라서 실제 인물을 보고 영정을 그리거나 영정 진본을 모사하는 경우에는 눈썹이나 수염도 한올 한올 상세하게 그리고 배경도 멋지고 깨끗하게 처리하지만, 화산군 영정과 같이 인품을 떠올려 영정을 그릴 때에는 세밀한 묘사나 깨끗하고 화려한 묘사는 피해야 한다고 합니다.

화산군의 성품은 인자하면서도 강직하시고, 정의와 원칙에 충실하여 불의와 세사에 타협하지 않는 올곧은 성품이라고 합니다. (퇴계의 평 : 미륵같고 하해와 같은 넓은 마음이다. 우암집 연보 :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다.)

영정 제작의 세부 기법은 화백의 숨겨진 노하우이므로 인터넷 공개를 꺼리므로 내용 설명은 생략합니다.

참고로 僻海 金松培 (61세) 화백은 1971년 안동김씨대종회가 대왕코너에 있던 시절에 충렬공 문무영정 두 폭을 그린 화백이시기도 합니다.

 

-1970년대 초 대왕코너 현관 대형그림(전지 7-8장 크기) 제작한 바 있는데, 이에 인연이 되어 대왕코너 내 화랑의 소개로 영정을 그리게 되었다고 함.

-33년 전, 28세 시절, 1971년에 대왕코너 백화점 내 화랑의 소개로 호진(당시 부회장) 의뢰로 충렬공 문무관복 영정 그림 (*사모, 문무관복, 흉배 등을 조선시대의 것으로 그림. 당시는 고려시대 복식 연구가 미흡하여 알 수 없는 시절이었음)

-당시 이당 김은호 화백 등 몇 사람에게 김해부 송악단에 있었던 충렬공 영정(당집에 무당이 그려 모신 장군신 영정이라고 함) 사진을 주면서 참고하여 그리도록 의뢰하였는데, 다른 화백들은 영정 사진과 비슷하게 그려 냈고, 김송배 화백은 좀 다르게 그려 내서 채택되었다 함. 당시 받은 돈 반으로 성북동 쪽에 집 한 채를 샀다고 함.

-충렬공 영정은 대종회 차원에서 현재 다시 제작을 추진중이라고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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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僻海 金松培 화백 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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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주회,  우-僻海 金松培 화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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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정 봉안식 후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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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실에 보관중인 우암유고 필사본

 

영정 봉안식을 마치고 태영 회장, 상진, 용주, 발용, 주회 종친 일행은 귀백리 묘소 답사길에 올랐습니다. 사진 소개를 위하여 간단히 소개하겠습니다.

화산군 묘소에는 새로 세운 신도비가 웅장합니다. 화산군(1512∼1563) 신도비문은 李敦宇(1801∼1884, *사선 외손자)가 撰하였고, 공 몰후 357년(1920년) 庚申 7월에 12대손 장성군수 演夏 書, 13대손 珏卿 追記로 세웠던 것을, 지난 4월 5일 화산군 교지에 의거 1字 수정하고(資憲大夫→正憲大夫) 거북좌대에 용머리갓으로 규모를 크게 하여 개수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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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군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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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산군 묘소의 석물(동자석, 문인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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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주회, 우 발용(會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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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  재택 안렴사공파 회장,  우 주회

 

화산군께서는 봉은사(현 서울 삼성동) 주지 보우와 그의 후원자인 문정왕후 등의 불교세력과 격렬하게 대립하기도 했는데, 현재 화산군 묘역 맞은편에 절이 들어서 있습니다. 인생의 업보인가? 450년만의 화해인가? 어느 쪽일까요?

백양동 마을 뒷산 넘어에는 우리 문중의 묘역이 많이 산재하고 있는데, 편의상 1묘역, 2묘역으로 구분하여 볼 수 있습니다. 1묘역에는 휘 수남(공석 자)---휘 희(화산군 1자 정남의 자, *묘갈 : 성유 사위 조현명 찬, 조명구 서)---종손(환의 자, 성의 부) 묘소가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고 있는데 역장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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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수남(壽男) 묘소

 

김수남(金壽男, 1547년(명종2)∼1605년(선조28))

자仁甫, 안렴사공 9세손. 공은 1574년(선조7, 갑술)에 무과에 급제하고 누진을 거듭하여 남병사(함경남도 병마절도사)에 이르렀고 병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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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희 묘소(화산군 1자 정남의 자, *묘갈 : 성유 사위 조현명 찬, 조명구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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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종손(환의 자, 성의 부) 묘소

 

김종손(金宗孫, 1428∼1478)

 

丸의 아들 宗孫(1428∼1478)은 1447년(丁卯)에 음사로 벼슬에 나가 사헌부감찰에 이르고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宗孫의 아들 城(1451∼1487)은 음직으로 벼슬하여 여러 고을의 군수를 맡았으며, 1487년 홍치황제등극 진하사의 종사관으로 명나라에 가셨다가 통주(通州)에서 졸하시니 병조참판에 증직되시고, 자손들이 귀해짐으로 인하여 여러 번 높은 품계를 추증받았다

2묘역에는 휘 공석(성 2자, *신도비 : 조카 김주 찬, 宋仁 서, 朴詠 전)---휘 탁(공석 자)---휘 성(종손 1자, 공량 공석 부)---휘 공량(성 1자, *묘갈 : 정사룡 찬, 김로 서) 묘소가 이어지고 있는데 역시 역장이 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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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공석(公奭) 묘소

 

김공석(金公奭)

자(字)는 주경(周卿), 1507년(중종2) 무과(武科)에 급제, 호조(戶曹)·공조(工曹)·형조 (刑曹)의 참의(參議)를 거쳐, 강릉부사(江陵府使)·포도대장(捕盜大將)·병마절도사(兵馬 節度使) 등을 역임하고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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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공석 신도비 (조카 김주 찬, 宋仁 서, 朴詠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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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濯(공석 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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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성(공량, 공석 父)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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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공량(公亮) 묘표.  대석은 옛 것이나 비가 파손되어 후에 새로 세운 묘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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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대종회 古 윤회 부회장 幷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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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공량(公亮) 묘갈( 정사룡 찬  김로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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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공량(公亮) 묘소

 

김공량(金公亮, 1472∼1544)

 

城의 아들,   公亮(1472∼1544)은 안렴사공의 7세손으로 자를 필지(弼之) 호를 양곡(楊谷)이라 하였으며 증직으로 이조판서와 양관 대제학을 받았고 보조공신(補祚功臣)에 올라 안원군(安原君)의 군호를 받았다. 공은 묵재(默齋 李深源, 1454∼1504)의 문하에서 글을 배워 학문과 덕행이 순결(純潔)하고 아름다웠는데, 연산조때 절제과로 등제하였으나 스승과 뭇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전시(殿試)에 나가지 않고 세사(世事)에 뜻을 버리고 고향에서 고요히 지내셨다.

묘는 경기 여주군 흥천면 귀백리 백양동에 있고, 묘갈은 호음(湖陰) 정사룡(鄭士龍, 1491∼1570)이 짓고 동고(東皐) 김로(金魯, 1498∼1548)가 썼다. 정사룡의 문집 [호음잡고](湖陰雜稿)에 <유명조선국김군공량묘갈명>(有明朝鮮國金君[公亮]墓碣銘)이 실려 있고, 남계(南溪)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동유사우록](東儒師友錄)에 실었다. 안원군의 묘갈을 書한 로(魯)는 우리 가문의 서운관정공파 희수(希壽)의 아들이며 당대의 명필로서, 이외에도 승지공 김공예(金公藝, 1485∼1537) 묘갈, 아버지 김희수(金希壽, 1475∼1527) 묘비를 書하였다.

 

이어서 맞은편 산자락으로 이동하여 휘 정남(화산군 1자) 묘소와 휘 태기(희의 자, *묘표 사위 조종저 찬, 조상우 서) 묘소를 답사하였습니다. 휘 태기의 묘비는 특이하게도 비신과 이수가 한 몸으로 되어 있고, 청비석이라 하는데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는 돌이라 하는데, 비가 와서 물에 젖으면 푸르스름해 진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일대를 청비석골이라 부른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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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정남(화산군 1자)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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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비석골의 유래를 낳게한 청비석. 400년의 풍화에도 마멸이 거의 진행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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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휘 태기 묘소

 

참고로 화산군 1자 좌랑공(정남)은 단명하여 1591년에 있었던 광국공신회맹식에는 2자 감찰공(의남→후남), 3자 현감공(계남)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화산군 2자 후남의 묘는 광주군 중대면 개농리(현 가락동)에 있다가 양주로 이안하였고, 배위의 묘는 화산군 묘소 아래에 있다고 하고, 화산군 3자 계남의 묘는 세류동에 있었는데 군용지로 편입되어 철거되는 과정에 화장하였다고 합니다.

백양동 일대 보이는 4면의 산 모두가 모두 화산군종회 종산으로 휘성, 휘공량, 화산군 묘의 동자석 장명등 등의 석물을 도난당하였고, 휘수남, 휘정남 묘소 등은 도굴당한 가슴아픈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2003년 10월에 여주군 향토사학계에서 여주의 금석문집 발간 준비를 위하여 백양동 일대 묘비 13기에 대한 탁본을 한 것을 1부씩 복사하여 화산군 재실에 보관하고 있어, 이를 촬영하고 여주 백양동을 뒤로 하였습니다.

 

<글 김주회,  사진 김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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