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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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숙공 소개 및 연보

2. 주요 사진자료

3. 기타 주요 자료 소개

1) 친필서찰

2) 영원산성

3) 충효열 삼정문

4) 신도비명

5) 충혼비 소개

6) 교지 소개

7) 영원산성 광고물

8) 충렬사 복원

4. 문숙공 시문관련 소개

5. 각종문헌 자료

6. 주요 역사 탐방

1) 영원산성

2) 호국사

 

본문

p11.png 4. 문숙공 시문 관련 소개

1) 題詩刻石 (시를 돌에 새기는 것에 제하여)-忠淸道 觀察使時  (2003. 8. 21. 항용(제) 제공)

  翠壁千層立    비취색 절벽이 천길이나 서 있고

  淸溪九曲流    맑은 시내는 아홉 구비로 흘러 가네

  中間獨偃息    그 가운데 홀로 누워 쉬면서

  嘯咏不知愁    휘파람 불고 시 읊으니 근심을 모르겠도다

  *출전 : <의재유고(毅齋遺稿)>(1992. 11. 의재공종중편찬위원회 간)

 

2) <문숙공 의재 김제갑 에게 주는 시> (2003. 6. 5. 항용(제). 제공)

(1) 출전 : 인터넷 한국역사정보 통합 시스템(http://kh2.koreanhistory.or.kr)의 <한국문집 총간> <知退堂集>  <知退堂集>卷之一  (이정형(李廷馨) 편저)     

(2) 시 소개(원문)

 

   送晉牧金順初悌甲。次朴君沃啓賢韻。

      漢北人愁臥。

      江南客倚樓。

      交情同萬里。

      離恨隔三秋。

      好善優爲魯。

      勝强要在柔。

      菁川一區勝。

      天遣?遊。

     與金同朝京。

     且時晉有豪石。

     難治之故云云。

 

(3) 작자 소개 : 이정형(李廷馨)1549(명종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암(廷#암26)의 아우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년(선조 3)형조좌랑·전적에 이어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형조정랑을 거쳐, 1574년 사간원정언과 경성판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헌납과 예조정랑이 되고,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곡15)·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하여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廣州牧使)·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에는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규합하여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승문원부제조·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퇴거하여 대사성·호조참판 등의 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수51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에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용사기사 龍蛇記事》·《수춘잡기 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3) 연시조, 찬문숙공 의재김제갑 일가삼절 (2007. 4. 7. 정중(도) 제공)

     김진중(도) 작.     출전 : <월간 순국(殉國)>(2006, 8월호. p 110-111)

 

1. 치악산 바람소리 영원산성 함성소리

    금대계곡 옥류마다 그날 적신 홍자혈루

    그날이

    팔월스무닷세

    붉은 꽃잎 흩뿌린 날

 

2. 임진년 왜적 무리 금수강토 유린할 때

    원근각지 수령방백 구차연명 도망갈 때

    어디로

    간단 말이냐

    이 자리가 꽃자린데

 

3. 잔류 사졸 수습하여 산성으로 올라갈 제

    예순 여덟 노구 목사 오직 일념 진충보국

    서릿발

    푸른 안광에

    염제 또한 물렀으리

 

4. 오호라 통탄할사 중과부적 어찌하랴

    밀려드는 적의 무리 온몸으로 막아내다

    마침내

    조복 노목사

    살을 맞고 참수되셔

 

5. 아들은 아빌 안고 울부짖다 목이 베혀

    정경부인 능욕 피해 은장도로 자진하니

    한적한

    일우고성에

    만고삼강 갸륵할사

 

6. 청사엔 불후도 있고 만대의 오명도 있다지만

    가야할 때 떠날 자리를 혜안으로 스스롭나니

    필설로

    어찌 다하랴

    어르신님 그 크신 뜻

 

7. 뉘 있어 님 앞에서 충절을 말하리오

    이 땅에서 어느 누구 효와 정을 논할손가

    이뤘네

    일가 삼절을

    그 해 그 날 한나절에

 

* 2004.5.16. 안동김씨 사이버 학술연구회 영원산성 답사및 문숙공 시제 소견

* '一隅孤城萬古三綱'은 임란 후 선조임금이 "원주땅 한모퉁이 외로운 옛성에서 당시 원주목사이던 지아비는 나라를 위해 죽고 그 아들은 아비를 위해 죽고 정경부인이던 아내는 지아비를 따라 죽었으니 만세에 전할 삼강이라"고 사액을 내린 친필을 말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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