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4) 신도비명 소개 (2003. 4, 항용(제) 제공)
(1)<원문>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충민사 경내 소재)
毅齋公碑文
公姓金, 諱悌甲, 字順初, 號毅齋. 安東人, 新羅敬順王之后高麗名臣忠烈公諱方慶之十一代孫也. 上洛之後有判三事上洛君, 文英公諱恂, 左政丞上洛府院君諱永暾, 號筠軒, 上洛伯諱縝三世事蹟, 俱載麗史. 寶文閣直提諱益達, 是生諱顧, 事我太宗歷揚淸顯左司諫大夫. 是生諱孟廉司憲府察, 是生諱哲鈞典農寺主簿, 是生諱壽亨掌隸院司議 贈承政院左承旨, 寔公之曾王考也. 祖諱彦默, 力學尙氣節, 隱不仕, 贈吏曹參判考諱錫進士與外從奇服齋遵爲道義交( )離己卯禍遯世而終 贈議政府領議政, 三歲推恩以公貴也. 贈貞敬夫人辛州奇氏司憲府持平 贈都承旨 之女. 以嘉靖四年中宗二十一年乙酉五月十七日乙亥丑時, 生公于漢都南郭外盤石坊. 公生而奇俊秀 , 異凡兒. 七歲時見前山有黃牛, 賦詩曰黃牛繫靑山, 靑山一點黃, 聞者異之. 未幾議政公歸槐山鄕舍以歿, 時公年甫十歲. 母夫人爲敎諸孤 還京第. 公旣幼孤失學, 至是始受學於舅氏奇公大復·姑夫李默齋文楗, 歲未周, 學業日就. 十八西坡尹相國漑, 因默齋求見公甚奇之, 請以女妻之. 母夫人辭曰 "寡婦之子, 不學昧禮, 豈合贄賢門耶?" 拒之甚確. 尹公固要成婚. 自是受業于尹公, 日夜硏究至忘寢食. 嘗讀論語十遍, 過數年試誦不錯一字, 其聰明强記如此. 十九與伯兄龜巖公, 往陶山謁退溪李先生, 遂師事之. 二十一, 魁發解, 由槐院例薦爲博士, 陞典籍. 壬戌爲養乞, 外補沃川君. 解歸爲開城經歷. 乙丑入爲軍器寺僉正司宰監副正司導寺掌樂院正. 丙寅受命宣慰倭使于釜山, 還拜成均館司藝, 丁卯爲南陽府使. 歲適凶 而母夫人篤于 睦宗黨, 無不歸仰. 公承順親意, 悉皆周恤. 大司憲金公德龍言於臺中曰孝哉金某, 人孰無父母, 承志色養, 未有如斯人者也. 瓜滿入爲宗薄司正司憲府持平, 歷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正司諫院正言司 署令承文院判校戊. 寅秋陞堂上爲僉樞, 以貢馬管押使, 赴燕京. 前此管以貢馬多道斃, 連被譴旦有道死未還, 人皆憚行. 是歲奉使者, 發行有日而忽告病, 當路者擧公以代人, 皆爲公憂公. 毅然無難色, 行到遼廣站上, 以布爲槽, 親檢飼, 貢馬五十匹, 皆無故入都. 太僕奬異之, 別爲題請 皇帝特命引見欽賜綵繒四段廐馬一匹象笏一隻己. 卯春復命 上特賜官 賜皐比以褒之, 除同副承旨, 尋拜海州牧使, 卽換晋州. 晋嶺之巨邑, 素多豪猾難治公判決如流, 威德竝施, 吏民愛之歌而誦之. 公之姪時敏爲晋州判官. 距公之歸己踰一紀. 人聞其至喜曰金使君之姪也. 一境翕悠令行禁止不勞而政成. 冬拜兵曹參知禮曹參議, 辛巳春復由右副承旨承左副遷司諫院大司諫遞附西樞, 夏拜忠淸道觀察使, 冬辭遞復拜大司諫, 遞歸西樞. 癸未拜左副承旨以事遞家居有年丁亥秋敍授昌城府使. 己丑爲廣州牧使, 庚寅復拜黃海道觀察使, 辛卯遞處西班拜大司諫, 遞授工曹參議. 時公屢擬天官, 子時獻亦擬銓郞, 公 不安, 懇求乞外爲原州牧使.
翌年壬辰島夷之亂作, 原之丁鈗器粮盡屬于申砬軍, 州徒徒擁虛名, 諸屬吏皆曰寇至可去. 公泣涕奮臂以義曉之, 遂招集逃竄之老弱, 收拾民間之粮機, 爲死守計. 及聞 輿播越宗杜邱虛, 西望通哭日夜涕泣人莫不感激. 賊將淸正分遣其將吉盛重, 蹂躪關東, 循海而南踰嶺而西所過列邑無一人, 逆其鋒而 禦者. 賊鋒朝夕互至, 人皆恐慄, 公終不變色, 惟以忠義, 激勵士民, 感激皆願爲公一死.一日公就戎床具甲胄竪旌 , 整行伍以爲樹計. 聞土人姓鄭(士榮)者驍勇絶倫, 乃召使前曰賊强吾弱, 且城池兵食器機皆缺, 戰守無策, 其將束手待亡乎? 今獨 原城可據而守也. 汝素有勇可, 領此卒, 前往據之, 吾當繼之. 鄭曰賊盛未可當宜出之仰. 天歎曰吾一死決矣. 久受國恩衣食皆主之賜, 況爲吏守土, 固當死職晷刻偸生可羞也. 策馬先導 衙口, 自隨爲士卒倡人, 皆感激歡趨老弱, 負戴攀附, 以 京城避亂士女, 亦扶携以前, 不數日城內盈滿, 於是內則峙粮儲器積柴疏井爲數月備, 外則架車設檻載石懸空以待寇, 至堞上又列强弓利簇, 間以大鈗, 日夜躬自巡飭城中恃以無懼時李判書 以左尹號召使在原州興原倉, 貽書於公曰 縱欲守土死職奈城孤事急何? 須來就我驪原之境, 隨勢進退可也. 公復書陳大義示以必死無變計. 李公謂人曰此人忠憤如此豈人所移易耶? 惜乎其死矣, 嗟歎久之. 長子時獻扈駕行在爲書與之曰余今復何爲哉? 所冀不失一節也. 蓋公必死之志己決矣. 又書曰大駕如或遠行上國則到鴨綠必多落後者, 汝則以委質爲重. 又書曰賊勢日熾, 無一人城守, 無一將力戰至使 君父播越而視若尋常謂禮義之邦若是耶? 君臣義重, 父子恩輕, 汝勿生來, 此之意, 晝夜不離, 上前一步地保護 聖躬, 則五雖死瞑目於地下矣. 蓋自勉之餘又勉於子也. 有京城武人朴宗男者在城中, 公進而戒之曰賊必由加里嶺. 嶺之險是天作, 馬不兩肩人不竝行, 若以千兵控其扼賊, 雖衆不能飛過也. 汝亦勉之. 宗男應諾而去. 乃遣一卒偵賊, 其卒憚行中路而還, 報曰賊遠而緩, 宗男信之, 解鞍脫甲臨川息, 不知賊之己襲其後. 僅脫身自免賊, 遂踰嶺城中人惶惶無人色. 公自若, 如平昔, 言益切, 令益嚴, 以忠義激衆, 衆感泣賊進薄城下知公之以死守, 乃爲書誘劫之. 公大怒拔 斬使者踞胡床髮竪肩聳屹如山, 衆人皆服慄, 莫敢仰視. 乃以賊循于軍中督諸軍力戰却之. 賊退左右曰賊今不利而去, 明日必大擧而來, 以肆其忿, 五處峯頭各伏一卒, 若見敵至吹角以報. 翌日天明五角齊鳴, 日適大霧咫尺不分. 遣軍探候 出門賊鋒已迫, 鼓 震天地, 公大呼軍, 以禦之, 軍不滿數千而盡. 是不習兵之老弱, 千鈞一髮勢, 不相敵. 四面矢石雨集,城中亦殊戰, 相持日旦夕. 矢盡力竭, 賊縱卒抵死, 而緣崖隙, 潛進穴城, 而升 喊突入, 揮大軍以越越旣陷. 軍官吳抗有臂力, 欲負公而走公曰 吾豈臨亂偸生者, 若等避之. 亦可踞戎床不動, 彎弓將射賊, 賊矢先中公背, 着二簇, 猶不 , 賊令公下拜. 公終不屈膝, 罵不絶口遂被害. 夫人季氏聞公被害, 顧謂侍婢曰令公 已死, 吾縱欲偸活, 徒取汚辱而已不死何爲? 遂投城下而死. 少子時伯, 隨公入城, 持弓矢竭力, 禦城, 旣陷以弓矢授其奴曰 汝等以此脫死, 吾則父母已死, 子無可去之義. 扶公屍終始不離, 亦爲賊所斫身首俱分, 公家有口皆盡于賊刀. 是壬辰八月二十五日也. 公年六十八, 夫人年四十六, 少子年二十一.
賊懸公元於鍾路街上樹上, 樹丈餘木白而書之曰朝鮮烈士金某之頭. 數十日顔色不變若生. 公庶子時傑, 夜入城 得公及夫人與子之屍, 權 子州東酒泉縣山麓, 行路無不流涕, 州人多操文說祖有曰一隅孤城萬古三綱. 宣廟命旌閭, 以一隅孤城萬古三綱八字, 親命刻揭于門楣. 觀察使姜紳狀啓褒贈崇爵贈諡文肅. 顯宗十一年庚戌, 遣禮官致祭刻碑樹立. 湖西章甫又以公配享于槐山之翠屛書院, 今花巖書院. 肅廟己丑以子時獻 扈聖勳, 贈領議政有兼職. 公狀貌魁偉而白儼然有不可犯之色, 氣度凝遠確呼, 有不可奪之節. 稟性仁厚, 律身簡靜, 事親極孝, 奉職竭其謹恪, 和而不流, 恭而有威. 平居端坐, 未嘗有情, 容飮酒未嘗有過. 居官 政, 皆有聲績, 待人接物, 盡其忠款, 不喜繁華, 恬於進取, 其避朋黨權勢, 若將逸焉. 對人喜談, 山水禽魚之樂, 田野棄麻之趣, 雖官 要顯, 蕭然若寒士也. 當時平無事之日, 人但知其爲守靜和厚之長者, 及乎變亂而其樹立之卓然如彼, 則於是公之平生所養益者而人始服其爲全德之君子也. 竊想公是一隅孤城萬古三綱, 而孰能述其微於數百載之下哉. 神道無刻, 路人皆嗟諮. 其從後孫相馨囑. 不 甚固不獲己敢爲之銘.
銘曰
見靑山繫黃牛, 賦以靑山一點黃. 聞者莫不異之, 自七歲時如斯彰. 及就學而究道, 潛心涵泳忘寢食. 徒步往于陶山, 師事之而盡其職. 順親意而無違, 値歲凶 盡周恤. 宗黨感而歸仰, 孝哉之歎憲府出. 羌 官而廉平, 晋本嶠南巨邑是. 多豪猾而難治, 剖決如流威德施. 島夷寇之猖獗, 壬辰年何如斯惡. 惟忠義之由衷, 奮臂切欲長退却. 儲器粮而疏井, 旦能說檻石懸空. 旣自誓而死守, 不忍一刻暫忘忠. 長子時己扈駕, 戒以不可失一節. 其自勉而勉子, 守職偸生於心節. 雖劃奇以命軍, 賊强吾弱其柰何. 欲射賊而着晩, 先被中背猶不 . 國有典而褒之, 贈爵贈諡又命旌. 章甫立祠以享, 忠烈翠屛兩墻羹.
安東 權容稷 謹撰. 傍十一代孫 金相馨 謹書
2) <번역문>
공(公)의 성(姓)은 김(金)이요 휘는 제갑(悌甲)이요, 자(字)는 순초(順初)요, 호(號) 의재(毅齋)라. 안동인(安東人)이니,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손으로 고려(高麗)의 명신 충렬공(忠烈公) 휘(諱) 방경(方慶)의 11대손이다. 상락(上洛)의 후손으로 판삼사(判三事) 상락군(上洛君) 문영공(文英公) 휘(諱) 순(恂), 좌정승 상락부원군(左政丞上洛府院君) 휘(諱) 영돈(永暾), 호(號) 균헌(筠軒), 상락백(上洛伯) 휘(諱) 진(縝)이 있으니, 삼세(三世)의 사적은(事蹟), 고려사(高麗史)에 갖추어 실려있다. 보문각직제(寶文閣直提) 휘(諱) 익달(益達)이 휘(諱) 고(顧)를 낳으니, 아조(我朝) 태종(太宗) 때 청현(淸顯)에 올라 좌사간대부(左司諫大夫)를 지내셨다. 이 분이 휘(諱) 맹렴(孟廉)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낳고, 이 분이 휘(諱) 철균(哲鈞)을 낳으니, 철균(哲鈞) 이 전농시주부(典農寺主簿)가 되고, 이 분이 휘 수형(壽亨) 장예원사의(掌隸院司議)를 낳으셧는데 승정원좌승지(承政院左承旨)에 증직(贈職)되니, 이 분이 공(公)의 증조(曾祖)이다. 할아버지는 휘(諱) 언묵(彦默)으로 학문에 힘쓰고 기개(氣槪) 와 절개(節槪)를 숭상(崇尙)하여 은둔(隱遁)하고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는데 증이조참판이시다. 아버지 휘 석(錫)은 진사로서 외종인 기복재(奇服齋)와 더불어 도의를 받들고 서로 교류하다가 기묘사화를 당하여 세상에서 물러나 은거하다가 마쳤는데 의정부영의정(議政府領議政)에 추증(追贈)되니, 이는 삼세의 추은을 입었는데 공이 귀하게 됐기 때문이다. 비( )는 정경부인(貞敬夫人)이니, 신주기씨(辛州奇氏)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추증(追贈) 도승지(都承旨) 형( )의 딸이다.
가정4년(嘉靖四年:1525년) 중종(中宗) 20년 을유(乙酉) 5월17일 을해축시(乙亥丑時)에 한성(漢城) 남쪽 성곽 밖 반석방(盤石坊)에서 공(公을) 낳았다. 공(公) 태어날 때 기이(奇異)하고 준수(俊秀)하고 빼어나서 보통아이들과 달랐다. 7세에 앞산의 황소를 보고 시(詩)를 읊기를 "황소가 청산에 매어 있는데, 청산에 한 점이 누르구나."라고 하니,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남다르게 여겼다. 머지않아 의정공(議政公)이 괴산 고향집으로 돌아와 돌아가시니, 이때 공(公)의 나이 겨우 10세였다.
어머니가 교육을 위해 모든 고아들을 이끌고 서울집으로 돌아갔다. 공(公)이 이미 어리고 고아라서 배울 때를 잃었으나, 이 때에 이르러 비로소 외삼촌 기대복(奇大復)공과 고모부 묵재(默齋) 이문건에게 수학하는데, 1년도 못되어 학업이 날로 나아갔다. 18세에 재상 서파(西坡) 윤개(尹漑)가 묵재(默齋)로 인하여 공(公)을 보고 매우 기특하게 여겨 딸을 아내로 삼을 수 있도록 청했다. 어머니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과부의 아들이 배우지 못해 예의에 어두운데 어찌 어진 가문과 혼인을 하겠습니까?" 하고 거절하는 것이 매우 확실했다. 윤공(尹公)이 진실로 요청하여 혼인을 했다. 장인 윤공앞에 나가 수업(受業)을 하는데 일야(日夜)로 침식(寢食)을 잊어버리면서 연구(硏究)하였다. 일찍이 불과 10번 논어(論語)를 읽었는데, 수년(數年)이 지난 후에도 외는 것을 시험하였는데 한 자도 착오가 없었으니 총명강기(聰明强記)가 이와 같았다. 나이 19세에 백형 구암공(伯兄 龜巖公)을 따라 도산(陶山)에 가서 퇴계 이선생(退溪李先生)을 뵈옵고 드디어 사사(師事)하였다.
21세에 장원급제(壯元及第)하시어 괴원(槐院)의 예에 따라 박사전적(博士典籍)으로 승진했다. 임술년(壬戌年)에 봉양(奉養)하기 위해 빌어서 옥천군수(沃川郡守)를 보직(補職) 받았다. 개성경력(開城經歷)을 지내시고 을축년(乙丑年)에 군기시첨정사재감부정 사도시장락원정(軍器寺僉正 司宰監副正 司導寺 掌樂院正)을 지내셨다. 병인년(丙寅年)에 선위왜사(宣慰倭使)로 부산에 갔다 온 후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제수받고, 정묘년(丁卯年)에 남양부사(南陽府使)로 가시었다. 이 해에 마침 대흉년(大凶年)을 당하였는데 모부인(母夫人)이 친목(親睦)에 진력(盡力)하니 종당(宗黨) 누구든지 귀앙(歸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공께서는 친의(親意)를 이어 순종(順從)하더니 일반이 다 구제(救濟)를 입었다. 당시 대사헌 김덕용(大司憲 金德龍)이 대궐안 각반에서 말하기를, "효도여 김모로다. 사람이 부모가 없으리오마는 뜻을 이어받아 효성을 다해 봉양하니(色養) 이와 동등한 사람은 보지 못하였다." 하니라. 임기를 채우고 들어와 종부사정 사헌부지평(宗簿司正 司憲府持平)이 되고, 성균관전적직강사성군기사사정 사간원정언 사온서령 승문원판교(成均館典籍直講司成軍器寺正 司諫院正言 司署令 承文院判校)를 지냈다.
무인년(戊寅年) 가을에 당상(堂上)에 진급(進級)하여 첨추(僉樞)가 되어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燕京)에 가게 되었다. 전의 관압사(菅押使)가 많은 공마(貢馬)를 도로(道路)에서 병으로 말려 죽게하여 양국으로부터 견책(譴責)을 엄하게 당했을뿐만아니라 도사(道死)하는 자도 있어 사람들이 모두 가기를 꺼리었었다. 이 해에도 봉사자(奉使者)가 출발일(發行日)을 앞두고 홀연히 병보(病報)를 하여 담당자(當路者)를 공으로 대행케 하자 사람들이 공(公)을 위하여 근심하되 공(公)은 의연(毅然)하게 아무 근심도 아니하고 요동(遼東)에 이르는데, 삼베로 물통을 만들어 친히 점검하여 공마를 먹여 50필이 모두 무고히 황성까지 들어갔다. 태복(太僕)이 칭찬을 별다르게 하면서 황제께 주달(奏達)하였다. 황제가 보시고 특히 명하여 보시고 비단 4필, 말 1필, 상홀(象笏) 1척을 하사(下賜)하시었다. 그 이듬해 기묘(己卯)봄에 돌아와 복명(復命)하였다. 임금께서 관온(官 )과 호피담요를 특사하시고 동부승지를 제수하셨으며 곧 해주목사(海州牧使)로 보냈다가 다시 불러 진주목사로 바꾸었다.
진주(晉州)는 영남(嶺南)의 거읍(巨邑)일 뿐만아니라 호활(豪猾)한 자가 많아서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나 공(公)께서 판결이 물 흐르는 것같이 하여 위엄과 덕(德)이 아울러 시행되니 백성들이 서로 사랑하며 노래하고 외었다. 그 후 공(公)의 집안 조카인 시민(舍姪時敏)이 진주판관(晉州判官)이 되었다. 공(公)이 관리에서 바꾸어 간지(轉官後) 12년만이었다. 진주 백성(晉民)이 다 이 말을 듣고 기뻐 전하는 말이, "김사군(金使君)의 조카라네."하며, 한 지역이 다 흐뭇한 상태였다. 이런 까닭으로 영을 행하고 금하는데(令行禁止) 수고롭게 여기지 않고 선정(善政)을 이루었었다. 그 해 겨울에 병조참지 예조참의(兵曹參知禮曹參議)를 지내고 신사년(辛巳) 봄에 우부승지(右副丞旨)와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지내고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으로 역임타가 여름에 충청도관찰사(觀察使)를 거치어 겨울에 사임했다. 다시로 대사간(大司諫)으로 역임(歷任)하다가 임기가 되어 다시 서추(西樞)가 되었다. 임오년 봄(壬午春)에 우부승지(右副承旨)로 여름에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를 지내고 계미(癸未)년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제수받았으나 일로 인하여 사직하고 집에 와서 몇 해 수양하다가 정해(丁亥) 가을에 창성부사(昌城副使)로, 기축(己丑)에 광주목사(廣州牧使), 경인(庚寅)에 다시 황해도(黃海道) 관찰사(觀察使)로, 신묘(辛卯)에 대사간(大司諫)을 제수 받았다가 공조참의(工曹參議)로 전보되었다. 이때에 공(公)이 여러번 천관(天官)에 있고 또 공의 장자 시헌(長子 時獻)이 역시 전랑(銓郞)으로 있는 관계상 마음이 항상 불안하여 사직을 간구(懇求)하였으나 원주목사(原州牧使)를 제수(際授)하였다.
그 다음 해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났는데, 원주(原州)의 관군, 총과 무기, 식량(銃機械食糧) 등은 모두 신립(申砬)군에 속해 있어서 고을은 다만 비어 있고 아무 능력(能力)이 없었다. 고을의 이속배(吏屬輩)들이 모두 말하기를 "도적들이 들어오면 도망하는 것이 상책이올시다."라고 했다. 공이 눈물을 흘리고 팔꿈치를 떨치며, 의로서 그들을 깨우치었다. 그리고 도망하는 노약자(老弱)을 불러 모집하고 민간의 양식과 무기를 수습하여 사수(死守)할 계책을 세웠다. 주상께서 의주로 파천(播遷)하시었다는 말을 들으시고 서쪽을 바라보고 통곡하며 밤낮으로 울부짖으니 사람들이 감격하지 않는 이 없었다. 적장 청정(淸正)이 그 부하장 길성중융(部下將 吉盛重隆)을 두 길로 나누어 보내여 관동(關東)을 짓밟고 바다로 돌아 남으로부터 고개를 넘어 서쪽으로 오는데 지나는 곳마다 열읍(列邑)들이 한 사람도 그 적병을 막을 자 없었다. 아침 저녁으로 다다르자 사람이 다 무서워하되 공(公)은 끝까지 안색이 변치않고 충의(忠義)로만 사민(士民)을 격려(激勵)하니 모두 다 공을 위하여 한번 죽기를 원하였다.
하루는 공이 융상(戎床)에 나가 갑주(甲胄)를 갖추고 정기(旌旗)를 세우고 군율을 정비했다. 지방 사람 정사영(土人 鄭士榮)이란 자가 효용(驍勇)이 절륜(絶倫)하다는 것을 듣고 불러다가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며 또한 성지 군량 기계(城池 兵食 器械)가 다 결핍이 되어 싸워서 지키는 것이 대책이 없으니 그 장차 손을 묶고 죽기를 기다리랴. 지금 홀로 영원성(영原城)에 웅거(雄據)하여 지키는 것이 좋다. 네가 본래 용맹이 남보다 뛰어나니 이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막으면 내가 뒤를 이어 가겠다."라고 했다. 정(鄭)이 말하기를 "적이 강성(强盛)하니 마땅히 나가 피하였다가 승편하여 도모(圖謀)하는 것이 늦지 않습니다."라고 했다. 공(公)이 꾸짖어 말하기를, "네놈으로 더불어 꾀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휘둘러 쫓고, 하늘을 우러러보며 탄식하기를, "나는 한 번 죽을 결단을 했다. 오래도록 국은(國恩)을 받고 옷입고 밥먹은 것이 주상께서 준 것인데, 하물며 벼슬아치가 되어 지방을 지키는데 마땅히 직(職)에 죽어야 하는데 잠시나마 구차하게 사는 것은 만고에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며 드디어 말을 채찍질하여 먼저 나가니 관아에 있던 사람들이 자연 따라 나가 사졸(士卒)과 창인(倡人)이 다 감격하여 기뻐하며 쫓아가는데 노약(老弱)이 지고 이고 받들어 올라가니 경성피난민들도 서로 끌고 앞서니 수일이 아니되어 성안에 가득 차는 지라, 안으로는 식량이 쌓이고 병장기(兵仗器)가 저장되며 나무가 쌓이고 샘물을 치고 수 개월의 준비가 되고 밖으로는 수레를 가설하고 함거를 설치하여 돌을 실어 공중에 매달아 적군이 오기를 기다리고 성위에는 또 강한 활(强弓)과 날카로운 화살(利簇)을 벌여놓고 그 사이에는 큰 총으로 비치하여 밤낮으로 몸소 순칙(巡飭)하니 성중이 믿고 무서워하는 빛이 없었다.
이때에 이판서개(李判書개)가 좌윤(左尹)으로 호소사(號召使)가되어 원주흥원창(原州興原倉)에 있다가 서찰(書札)을 공(公)에게 보내 말하기를 "비록 직분에 죽으려하나 땅을 지키고자 하나 성을 외롭고 일은 급하니 어찌하리오?. 잠깐 여주 원주의 경계(驪原之境)에 나가 형세에 따라 진퇴(進退)가 옳다." 하였더니, 공(公)의 답장에, "대의를 베풀어 반드시 죽는 것이 변함이 없다."하였다. 이공이 사람에게 말하기를 " 이 사람은 충분(忠憤)이 이러하니 누가 그 대의(大義)를 옮기고 바꾸겠느냐? 아깝다 그 죽음이."하면서 오래 탄식했다. 장자 시헌(長子 時獻)이 선조대왕(宣祖大王)을 모시고 의주(義州)에 있을 때, 편지를 써서 그에게 주면서 말하기를, "나는 지금 다시 어찌 될지 모르나 하나의 절개를 잃지 않는다."라고 하니, 공(公)이 필사의 의지를 이미 결단한 것이다. 또 편지에 대가(大駕)가 멀리 상국(上國)에 까지 가시게 되면 압록강(鴨綠江)에 가서 낙오자가 많을 것이다. 너는 위질(委質)로 중한 것을 삼어라. 또 편지에 적세(賊勢)가 날로 치열함을 따라 성을 지킬 자가 한 사람도 없고 한 장수도 역전(力戰)할 자 없어 군부(君父)로 하여금 파월(播越)하시는 것을 심상(尋常)하게 아니 일찍이 예의의 나라(禮義之邦)에 이르는 것이 이러하냐. 군신(君臣)은 의가 중하고 부자(父子)는 은혜(恩惠)가 가벼우니 너는 살아오지 말라. 이런 뜻을 주야로 떠나가게 하지말고, 주상 앞 한 걸음의 땅에서 성궁(聖躬)을 보호하면 내가 비록 죽어도 지하에 가 눈을 감겠다. 라고 했다. 대개 이것은 충의(忠義)를 아들에게까지 권면(勸勉)한 것이다.
경성(京城)서 온 사람중 무인 박종남(武人 朴宗男)이란 자가 성중에 있어 공(公)이 나가 경계하여 말하기를, "적이 반드시 가리령(加里嶺)을 넘을 것이다. 이 고개의 험한 것은 하늘이 만든 것으로, 말이라도 둘이 서로 통래(通來)를 못하고 사람도 두 사람이 나란히 갈 수 없어, 만약 천병(千兵)일지라도 그 요새지를 장악(掌握)하고 있으면 적이 아무리 수가 많아도 여기는 능히 지나지 못할 것이니 너 또한 힘써라."했다. 종남(宗男)이 응낙(應諾)하고 가서 한 군사를 보내여 적을 정탐(偵探)하였다. 그 군사가 가기를 꺼려 중로(中路)에서 돌아와 보고하기를 "적이 아직 멀리 있으니 천천히 하여도 늦지 않습니다."라 했다. 종남(宗男)이 이 말을 믿고 안장(鞍裝)을 내리고 갑옷을 벗고 강에서 쉬다가 적이 뒤로 역습하여 들어오는지 모르고 있었다. 겨우 이 사람은 몸을 빠져나와 죽음을 면하였지만 적은 드디어 고개를 넘었다. 성중 사람은 황황하여 사람의 얼굴빛이 없었다. 그러나 공(公)은 보통때나 다름없이 말은 더욱 간절하고 영(令)은 더욱 엄하게 하며 충의로서 대중을 격려(激勵)하니 대중이 충심으로 감동되어 울었다.
적이 성 아래에 이르러 공(公)이 사수(死守)한다는 굳은 결심을 알고서 글을 써서 꾀이고 겁을 주었다. 공(公)이 대노(大怒)하여 칼을 빼어 사자(使者)를 베어 죽이고 평상에 걸터앉았는데 모발(毛髮)이 서고 어깨가 솟는 것이 산 같으니 사람이 다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이에 적의 머리를 들고 군중에 순회(巡廻)하며 제군을 독려하여 힘껏 싸워 물리쳤다. 좌우에서 말하기를 "적이 지금 불리하게 갔으나 명일(明日)에는 반드시 크게 침입해와서 그 분함을 펼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까합니다."했다. 공(公)의 말하기를 " 국토를 지키는 신하가 가면 어디로 가느냐? 감히 피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죽이리라." 하니 많은 사람들이 드디어 편안했다.
공(公)이 명령하여 성에서 5리쯤에 다섯 군데 산봉우리에 각각 군사 일명씩 매복(埋伏)하여 놓고 적이 오는 것을 보면 서로 나팔을 불어 소식을 알리라고 하였다. 그 이튿날 하늘이 밝자 다섯 군데서 호각이 일제히 울렸는데 마침 안개가 많이 끼여 지척(咫尺)을 분별치 못하였다. 적정을 조사하려고 군을 보내어 성문에 나가니 벌써 적이 성문에 도착하여 들어오려고 북을 치며 소란하게 하니 천지가 진동하는지라, 공(公)이 급히 군을 호령하여 막으라 하니 군졸이 수천명에 지나지 못한 것보다도 전부가 교련이 없는 노약(老弱)이라 쇠 천근에 털 한개 힘이라 기세(氣勢)가 서로 대적할 수 없었다. 사면에 시석(矢石)이 비오듯 하고, 성중에서도 또한 자못 싸움이 서로 지속되어 날이 저물었다. 화살도 다하고 힘도 다하였다. 이때 적이 군사를 놓아 죽기를 각오하고 언덕틈으로 숨어 돌진하여 성으로 올라오며 함성지르며 돌입하여 군사를 지휘하니 성(城)이 이미 함락(陷落)되었다. 군관에 오항(吳抗)이라는 용력이 있어 공(公)을 업고 달아나려 하니 공이 말하기를, " 내가 어찌 난을 당하여 구차하게 살려하랴. 너희들은 피하여 살길을 취하라."하고 융상(戎床)에 걸터앉아 움직이지 않고 활만 잡고 적을 쏘는데 적의 화살이 먼저 공(公)의 등을 맞추어 화살 두 개가 박히었는데도 오히려 쓰러지지 아니하니 적이 공(公)으로 항복(降服)을 권유하였다. 공(公)이 죽을 때까지 무릎을 꿇지 않고 입으로 꾸짖기를 끊이지 않다가 해를 입었다.
부인 이(李)씨가 공(公)이 피해(被害)함을 듣고 시비(侍婢)를 돌아다보며 말하기를, "공께서 이미 돌아가셨는데 내가 구차하게 살아서 적에게 욕을 당할 것인데 죽지 않고 어쩌랴?"하고 성에서 떨어져 명을 마쳤다. 소자(小子) 시백(時伯)은 공(公)을 따라 성에 들어가 궁시(弓矢)를 잡고 힘을 다해 강하게 막다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궁시(弓矢)를 그 종에게 주며 말하기를 "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살길을 취하라. 나는 부모가 다 돌아가셨는데 도망갈 뜻이 없다."하고 하직(下職)하고 공(公)의 시체를 붙들고 잠시도 떠나지 않다가 적의 칼에 몸과 머리가 두 조각이 나니 공(公)의 집에 소속된 식구가 다 적(賊)의 칼날에 죽었다. 이것은 임진(壬辰) 8月 25일이었다. 이때 공(公)의 나이 68세이고 부인 56세이고 소자(小子)는 21세였다.
적이 공(公)의 머리를 종로거리의 나무 위에 매달아놓고 한 길되는 흰나무에 조선열사 김제갑(金悌甲)의 머리라 써 회시(廻屍)하였다. 공(公)은 수십일이 되어도 안색이 변치않고 생시(生時)와 같았다. 공(公)의 서자(庶子) 시걸(時傑)이 밤에 성에 들어가 부모형의 시체를 모시어 권조자(權 子) 고을 동쪽 주천현(酒泉縣) 산록(山麓)에 장사하였다. 다니는 길의 누구든지 눈물을 흘리지 않는 자 없었다. 고을 사람들이 많이 제문(祭文)과 만사(挽詞)를 지어 조상하는데, "한 모퉁이 외로운 성에 만고의 삼강일세." 이란 축문을 읽었다.
선조께서 정문에 "일우고성만고삼강(一隅孤城萬古三綱)." 8자를 친히 명하여 문미(門楣)에 달게 하였다. 관찰사(觀察使) 강신(姜紳)이 장계(狀啓)로 인하야 높은 벼슬을 증직(贈職)하고 시호를 문숙(文肅)이라 했다. 현종(顯宗)11년 경술(庚戌)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시고 비(碑)를 세웠다. 호서(湖西)의 선비들이 또 괴산(槐山)의 취병서원(翠屛書院)에 배향(配享)하니, 지금의 화암서원(花巖書院)이다. 숙묘기축(肅廟己丑)에 아들 시헌(時獻)이 임금을 호종(護從)한 공(功)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증직(贈職)되고 겸직(兼職)이 있었다.
공(公)의 모습은 매우 위엄있어 스스로 엄숙하여 범할 수 없는 기색이었다. 기개(氣槪)와 절도(節度)가 뭉치고 원대(遠大)하고 확실하여 빼앗을 수 없는 절개가 있다. 품성은 어질고 후하며 처신이 간정(簡靜)했으며, 어버이 섬기기를 지극히 효성스럽게 했으며 봉직(奉職)할 때는 그 정성을 다하여 화합하되 분파(分派)를 만들지 않았다. 공손(恭遜)하되 위엄이 있었다. 평소에 단정하게 앉아있어 일찍이 정이 있지 않았다. 술을 마실 때도 일찍이 지나침이 없었다. 벼슬에 있어 정사(政事)를 할 때도 모두 성적(聲績)이 있으며, 사람을 대접하고 만물을 접할 때 충성스럽고 정성을 다 했으며, 번화한 것을 기뻐하지 않고, 나아갈 때도 조용히 하여, 붕당권세(朋黨權勢)를 피하여 은일(隱逸)할 것 같았다. 사람을 대할 때 담화하기를 좋아하고 산수 새 물고기(山水禽魚)의 즐거움, 전야(田野)의 상마(桑麻)의 정취를 누렸으며, 비록 관직이 요직(要職)에 올랐으나 소연(蕭然)하여 한사(寒士)같았다. 당시 평소 일이 없는 날에 사람들이 다만 고요함을 지키고 화후(和厚)한 장자(長者)인줄 알고 있다가 변란(變亂)을 당하여 그 수립(樹立)한 것이 높기가 저와 같으니 즉 이에 고이 평생 배양(培養)하고 더한 것이니 사람들이 비로소 그 덕을 완전히 갖춘 군자라는데 감복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공(公)은 "일우고성만고삼강(一隅孤城萬古三綱)"인데 누가 수 백년 후에 그 아름다움을 기술해주겠는가? 신도(神道)에 새긴 비(碑)가 없으니 길가는 사람이 모두 탄식(歎息)한다. 그 종후손(宗後孫) 상형(相馨)이 부탁는데 내가 진실로 잘 하지 못하나 감히 그 명(銘)을 지었다.
명(銘)에 말한다.
청산(靑山)에 소 매놓은 것을 보고, 청산(靑山)에 한 점 누른 빛 띠었네 라고 지었네. 듣는 사람이 그것을 남다르다 여기지 않음이 없었으며, 7세부터 이와 같이 빛났네. 배움에 나아가서는 도(道)를 궁구(窮究) 하고, 잠심(潛心)하고 함영(涵泳)하여 침식을 잊었네. 다만 도산(陶山)에 가서, 그를 사사하여 그 직분(職分)을 다했네. 어버이의 뜻을 어기지 않았으며 흉년을 당해서는 두루 구휼(救恤)했네. 종친이 감동하여 추앙이 돌아가고 효성이 사헌부(司憲府)에 전해갔네. 오랑캐나라에 갔을 때 청렴(淸廉)하고 화평(和平)하게 하였으며, 진주는 영남의 큰 읍일세. 호걸(豪傑)하고 사나운 사람이 많아 다스리기 어려운데, 결단하기를 물 흐르듯 하게하고 위엄있게 덕을 베풀었네. 섬 오랑캐가 창궐(猖獗)하니, 임진년 이 악(惡)을 어찌하리. 오직 충의가 속으로부터 말미암아, 팔꿈치를 떨치고 간절히 하고자했으나 오래되어 퇴각(退却)했네. 병기와 식량을 저장하고 샘을 치며, 아침에 함거를 설치하고 돌을 공중에 매달았네. 이미 스스로 맹서하기를 죽음으로 지키고자하니, 일각(一刻)을 참을 수 없으며 잠시도 충성을 잊지 않았네 큰 아들이 이때 어가를 호종하는데, 경계하여 절개를 잃지 말라 했네. 그 스스로 힘쓰고 아들에게 힘쓰라하니, 직책을 지키고 심절에 구차하게 살으랴. 비록 기이(奇異)함을 계획하여 군대에게 명령했으나,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했으니 어찌하랴. 적에게 활을 쏘려했으나 시기가 늦어, 먼저 등에 맞았으나 오히려 엎으러 지지 않았네. 나라에서 은정(恩政)이 있어 그를 포상하고, 벼슬을 추증(追增)하고 시호(諡號)를 주고 정문(旌門)을 내렸네. 선비들이 사당을 세우고 제향(祭享)하니, 충렬사 취병서원(翠屛書院)에 양쪽에 제향(祭享)받네.
安東 權容稷 謹撰. 傍十一代孫 金相馨 謹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