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제)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문숙공 소개 및 연보

2. 주요 사진자료

3. 기타 주요 자료 소개

1) 친필서찰

2) 영원산성

3) 충효열 삼정문

4) 신도비명

5) 충혼비 소개

6) 교지 소개

7) 영원산성 광고물

8) 충렬사 복원

4. 문숙공 시문관련 소개

5. 각종문헌 자료

6. 주요 역사 탐방

1) 영원산성

2) 호국사

 

본문

p11.png 3. 기타 중요 자료 소개

 2) 영원산성(임란 격전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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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임란격전지>(출전. 상-문화재청 홈페이지.김태서 제공. 하-원주문화원 우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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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2004. 5. 18. 발용(군) 제공)

 

 <2007. 4. 8. 안사연 산행 사진> (2007. 4. 8.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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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입구의 해설비>  (2007. 4. 8.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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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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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새로 축성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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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옛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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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산성의 성가퀴가 끝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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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의 맨 끝 부분>

 

(1) 원주시청 홈페이지 소개

 

시도기념물   27호.  1979.05.30   소재지 :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  

강원도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에 있는 치악산의 남서쪽에 돌로 쌓은 산성이다. 치악산의 서쪽 중턱에 있는 금대산성이나 해미산성과 서로 의지하여 작전을 수행할 수 있도록 되어 있는데, 외적의 침입이 있을 때 원주와 이웃마을 주민들이 이곳에 들어와서 지켰다고 한다.

신라 문무왕 또는 신문왕 때에 쌓았다고 전해온다. 또 신라 후기의 혼란기에 양길과 궁예가 이곳에 거쳐하면서 인근 고을을 차지하게 되었다고도 한다.

 

기록에는 ‘영원성’이라 하여, 둘레는 3749척이며 성 안에 우물 하나와 샘 다섯 개가 있었다고 한다. 현재 산성의 둘레는 4㎞에 달하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고려 충렬왕 17년(1291) 중국 원나라의 군대가 침입하였을 때 향공진사로 별초군을 지휘하던 원충갑이 원주 백성들과 함께 적군을 물리친 유서깊은 전쟁터이다. 또 임진왜란 때에는 원주목사 김제갑이 이곳에서 왜군과 싸우다가 목숨을 잃기도 하였다

*이 산성은 2003. 6. 2일 사적 제447호로 지정됨  (2003. 6. 4. 주회(안) 제공)

 

(2) 문화재청 홈페이지 소개 (2004. 4. 22. 항용(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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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   목   사적   447호

명   칭   원주영원산성

  (原州영原山城)

분   류   성지(성곽)

면   적   175,537㎡

지정일   2003.06.02

소재지   강원 원주시 판부면 금대리 산50-2외 1필

소유자   국유, 영원사

관리자   원주시

 

영원산성은 원주의 치악산(해발 1,288m)에 위치한 돌로 쌓은 산성이다.

 

이 산성은 축조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말 가장 큰 지방세력이었던 북원(北原)의 양길(梁吉)·궁예(弓裔)와 관련되어 있는 사적으로 인식되어 왔다. 또한 고려 충렬왕 17년(1291) 원충갑(元충甲)이 지역의 방위군과 합단(哈丹)의 침략군을 통쾌히 무찌른 곳일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의 지휘 아래 원주 일대의 주민들이 끝까지 항전하다가 함락되어 수많은 장졸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그 후 이 산성은 한강 상류의 요진(要鎭)으로 한동안 경영되다가 폐허가 되었다.  

 

이 성의 전체적인 평면은 삼각형에 가까운 불규칙한 부정타원형으로, 성벽의 총 연장은 약 2.4㎞이며,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차곡차곡 쌓아올린 모습이 비교적 많이 남아 있다. 동북 모서리에서 보다 높은 산봉우리를 이어서 꼬리처럼 된 용도(甬道)를 만들었는데, 이 곳은 다른 지역과의 연락에 유리한 곳일 뿐만 아니라, 남대령(南台嶺) 방면에서 능선을 타고 접근하는 적을 쉽사리 관찰하고 공격할 수 있는 곳이다. 한편 능선상에 성벽이 꺾어지는 곳은 능선을 타고 진입하는 적을 방어하기 위하여 곡성(曲城)을 마련하였는데, 동남쪽 성벽에 4곳, 북쪽 성벽에 4곳, 서쪽 성벽에 4곳이 있다.  

 

옛 기록에 의하면 ‘영원성은 석축성으로 둘레 3,749척, 성내에 우물 1개, 샘이 5곳 있었으나, 지금은 폐하였다’고 한다. 지금 성안에는 남·북·서문터와 성안의 물이 배수되는 수구(水口)가 남아 있는데, 북문의 동쪽에는 치성(雉城)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이고 있다. 또한 성안에는 여러 곳에서 건물터가 확인되었으며, 세 곳에 숯가마가 남아 있다. 수습된 유물들은 고려·조선시대에 사용되었던 도자기와 기와류 등으로 그 종류와 수량은 많지 않다.  

 

이 산성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체성(體城)과 여장(女墻)이 확실히 구분되면서도 성의 외벽에서는 구분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또한 여장에 사혈(射穴)이 없다는 점이다. 아울러 축성의 형식에 있어서도 우리나라 산성 축조방식에 있어서 가장 전형적인 산성의 완전한 모습을 보여 준다. 즉, 위치의 선정, 용도 시설의 활용, 여장의 완전한 잔존, 성문과 치성의 구조 등에서 고려시대 산성의 특징을 가장 잘 알 수 있다.  

 

원주 영원산성은 학술적으로는 중세 산성의 특징(여장, 치성, 성문 등)을 잘 보여주는 산성이며, 역사적으로는 고려·조선시대를 걸쳐 전란시 치열한 격전이 벌어졌던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귀중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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