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제갑(金悌甲) 1525(중종20)∼1592(선조25)--(제)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문숙공 소개 및 연보

2. 주요 사진자료

3. 기타 주요 자료 소개

1) 친필서찰

2) 영원산성

3) 충효열 삼정문

4) 신도비명

5) 충혼비 소개

6) 교지 소개

7) 영원산성 광고물

8) 충렬사 복원

4. 문숙공 시문관련 소개

5. 각종문헌 자료

6. 주요 역사 탐방

1) 영원산성

2) 호국사

 

본문

p11.png 2. 주요 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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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소>(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2002. 10.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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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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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충무공이 함께 배향되어 있는 충민사 경내의 구 사당> (2001. 10.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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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 경내의 구사당에 있는 문숙공 위패> (2004. 5. 10. 성수(제) 제공)

 

충민사 경내에 있는 이 구사당은 현 충민사 자리에 조선 선조때부터 있어 온 사당(불천지위)으로 문숙공(휘 제갑)의 위패를 모시고 있던 곳이다. 그런데 고종때 진주의 충민사가 훼철되자 이곳에 충무공(휘 시민)의 위패를 이곳에 함께 합사하였다. 그 후 1977년, 충무공의 묘소를 충주시 살미면 무릉동에서 이곳으로 모셔 오면서 약 20여 호가 살고 있던 가옥을 현 능촌리 마을로 이주시키고 충민사를 새로 중건(1978)하였고, 구사당은 원 위치에서 약간 우측으로 이축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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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대왕 친필>  一隅孤城萬古三綱 (현 괴산 충민사 구사당에 보관)

 

 <구 사당 향사 장면. 2003. 5. 8.> (2004. 5. 9. 성수(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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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탑과 충렬비 앞면-원주역전>  (1992. 1.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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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탑과 충렬비 뒷면-원주역전> (2005. 5. 18.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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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비>(2005. 5. 18.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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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탑 뒷면>(2005. 5. 18. 발용(군) 제공)

 

 <원주 영원산성>

(2007. 4. 8. 항용(제) 제공)

 <영원산성 입구의 해설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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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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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새로 축성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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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 옛돌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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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산성의 성가퀴가 끝난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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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산성의 맨 끝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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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공 제각-괴산읍 능촌리 내>(2002. 5.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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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지> (1711년(숙종 37)에 받은 영의정 추증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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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비-괴산 충민사 경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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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재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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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열.효 삼정문 현액> (2003. 10. 3. 항용 촬영 제공)

 

<삼정문 현액에 대해>

      1) 괴산읍 능촌리 金成銖(문숙공 14대손) 보관중

      2) 1711년(숙종 37)에 영의정에 추증된 후 받은 <충열효 삼정문 현액>을 1787년(정조11)에 중건한 것임.

                   <上十一年丁未重建>이라 기록되어 있음

      3) 원주의 충렬비(1670. 3. 건립. 생원 鄭錫衡 찬)에 의하면 <--만력 무신년(1608)에 옛 정승 完平, 白沙가 김공이 출생한 마을에 정표문려(旌表門閭)를 세우도록 건의하여 이제 그 마을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이 서 있고--> 로 보아 상기의 것과 다른 정려와 현판이 괴산의 능촌리에 있었을 것으로 추측됨)

      4) 원판 재질은 적송인 것 같으며 현재 양호한 상태임.

      5) 상기 현액 촬영 기념 사진, 좌로부터 恒鏞, 永銖, 奎文, 成銖, 相錫

 

<상아 홀(笏)>  

 

1) 소장과정 : 1578년(선조 11. 54세) 공마관압사(貢馬菅押使)로 연경에 갔다 올 때 공이 크므로 명의 神宗皇帝로부터 비단4필, 말 1필과 함께 위 상아 홀을 하사 받으심

2) 현 소장처 : 후손이 보관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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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숙공 묘역 우측에 있는 차자 참의공(휘 시백)의 단소와 배위 묘소>(2002. 10. 항용(제) 촬영 제공)

 

  <참의공(휘 시백) 관련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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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의공(휘 시백) 단소>

 

김시백(金時白) : 자는 자장(子長). 문숙공 김제갑의 차자. 임란때 부친을 따라 원주의 영원산성에서 왜군과의 전투에서 장렬한 전사를 하였다. 호조참의에 추증되었다.

 

 *<문숙공 신도비 기록 내용>

소자(小子) 시백(時伯)은 공(公)을 따라 성에 들어가 궁시(弓矢)를 잡고 힘을 다해 강하게 막다가 성이 함락됨을 보고 궁시(弓矢)를 그 종에게 주며 말하기를 " 너희들은 이것을 가지고 살길을 취하라. 나는 부모가 다 돌아가셨는데 도망갈 뜻이 없다."하고 하직(下職)하고 공(公)의 시체를 붙들고 잠시도 떠나지 않다가 적의 칼에 몸과 머리가 두 조각이 나니 공(公)의 집에 소속된 식구가 다 적(賊)의 칼날에 죽었다. 이것은 임진(壬辰) 8月 25일이었다. 이때 공(公)의 나이 68세이고 부인 56세이고 소자(小子)는 21세였다.

 

  *<삼강록에 기록된 참의공(휘 시백) 자료> (2007. 11. 17. 은회(익) 제공)

(孝子金時伯)

金時伯 贈 參議 字(子長) 悌甲 之子壬辰 毅齋 殉節 之日謂人曰父死子何忍獨生抱父而同死 宣廟 聞而嗟賞曰一門忠孝萬古綱常旌閭出邑誌

 

출전: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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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역 아래에 있는 묘역 조성기>

<공주 공산성의 충청도 관찰사 불망비> (2005. 6. 17. 항용(제) 촬영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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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찰사 不忘碑>-1649년(인조 27년) 경에 충남 공주군 공주 공산성에 세웠던 것인데 훼손 분실됨. 이에 1992년 안동김씨 공주문중회에서 주관하여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문중 역대 선조 4위 관찰사 불망비를 세움. 우로부터-金悌甲, 金億齡, 金時獻, 金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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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입구 비석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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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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