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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려실 기술내 각종 자료 소개> (2003. 11. 13. 윤만(문), 항용(제) 소개)
1) ▣ 연려실기술 별집 제4권 사전전고(祀典典故) 서원(書院) ▣
○ 괴산(槐山) 화암서원(花巖書院) 천계 임술년에 세웠다. : 이황(李滉)ㆍ이문건(李文楗)호는 검재(黔齋)며 승지를 지냈다. ㆍ노수신(盧守愼)ㆍ김제갑(金悌甲)목사를 지냈고, 영상을 증직하였다. 호는 의재(毅齋)이다. ㆍ유근(柳根)광해조의 문형(文衡) ㆍ이신의(李愼儀)ㆍ허후(許詡)이상(貳相)을 지냈고 시호는 정간공(貞簡公)이다. ㆍ박세무(朴世茂)헌납을 지냈고, 호는 소요당(逍遙堂)이다. ㆍ전유형(全有亨)호는 학송(鶴松)이며 형조 참판을 지냈다.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 현종 무신년에 세웠고, 사액하였다. : 원충갑(元冲甲)호는 응양(鷹揚), 상호군(上護軍)이다. 시호는 충숙공(忠肅公)이다. ㆍ김제갑(金悌甲)ㆍ원호(元豪)
2) ▣ 연려실기술 제13권 선조조 고사본말(宣祖朝故事本末) 이이(李珥)가 졸서(卒逝)하다 이제신(李濟臣)의 귀양간 사실을 붙임 ▣
○ 태학생 유공신(柳拱辰) 등 462명이 상소하여 이이가 무함(誣陷)을 입었다고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이 상소의 사연을 보니 충성스럽고 곧으며 격렬하다. 그대들의 의기가 이러하니 내가 어찌 나랏일을 근심하겠는가.”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유생들이 상소할 때에 사사로이 서로 지휘하고 사주하여 유인하기도 하고 을러서 제어하기도 하였는데, 따르지 않는 자 또한 많았습니다. 상소하는자들은 그들이 자기들과 다른 것을 분히 여겨 큰 소리로 꾸짖으며 조아가서 소매를 잡고 끌고 들어가니, 명륜당이 싸움터가 되어 더러는 무리를 줄이고 명부에서 삭제하고야 맙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이렇듯 극도로 패란(悖亂)한데 전하께서는 도리어 칭찬하고 권장하셨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 출근한 승지를 모두 내보내라주D-015.” 하고, 또 이르기를, “입직한 위장(衛將)권벽(權擘)ㆍ정복시(鄭復始)를 가승지(假承旨)에 차임하고, 승지 박근원(朴謹元)ㆍ김제갑(金悌甲)ㆍ이원익(李元翼)ㆍ성락(成洛)은 모두 체직하며, 이식(李栻)ㆍ이인(李訒)ㆍ박숭원(朴崇元)ㆍ 영립(柳永立)ㆍ김우옹(金宇顒)을 승지에 임명하라.” 하였다. 《계갑일록(癸甲日錄)》
3) ▣ 연려실기술 제17권 선조조 고사본말(宣朝朝故事本末)-김제갑 ▣
<난중(亂中)의 시사(時事) 총록(總錄)>
○ 왜적의 괴수 길성중륭(吉盛重隆)이 철령(鐵嶺)에서 길을 나누어 관동(關東)을 향하여 돌아오면서, 영서(嶺西)를 넘어 여러 고을을 짓밟고, 장차 원주(原州)를 핍박하려 하였다. 목사 깁제갑(金悌甲)은 부임한 지 겨우 1년이었는데 군졸을 모두 내어서 영원산성(鈴原山城)으로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사면이 다 절벽이고 앞에 한 가닥 길만이 통해 있었다. 적은 글을 써서 장대에 걸고 항복하기를 달래면서협박하였으나, 제갑은 손수 그 사자를 베어 죽이고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적이 이르는 것을 기다려 태평소를 불게 하였다. 날이 밝자 다섯 곳에서 태평소가 일제히 알리므로, 보니 왜의 창과 칼날이 산을 덮고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땅을 울리었다. 적군이 비탈을 타고 몰래 전진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적이 제갑을 협박하여 절하게 하였으나 제갑은 굽히지 않고 그 처자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제갑의 본관은 안동이었는데, 얼굴은 희고 키가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과거에 올라서 수령과 방백(方伯)을 지냈는데, 백성들에게 잊지 못할 은혜가 있었다. 《조야첨재》
4)<원주시사>(역사편. 원주시사편찬위원회. 2000년 간) (2002. 6. 24. 윤만(문) 제공) ▣ 김제갑(金悌甲, 1525~1592) pp710~712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안동,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진사 김석(金錫)이다.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병조 좌랑. 정언을 거쳐 1581년(선조 14) 충청 관찰사를 역임하고 1583년 우승지로 있으면서 도승지 박근원과 함께 이이. 박순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원주목사로 있었는데, 왜장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주민을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군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자 부인 이씨. 아들 김시백(金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1592년 이조판서 겸 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하였다. 원주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1711년(숙종 37) 문숙(文肅)이라는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애족부활위원회에 의하여 원주역 광장에 그의 충렬탑이 세워졌다. 이곳에 있는 1670년에 세워진 충렬비의 비문을 보면
“원주의 목사로서 의리에 분발하여 슬픔을 딛고 일어서 군병을 규합하는 한편 군량미를 거두어 영원산성에 들어가서 결사 사수할 것을 계획하고 충성과 의리로 이 고을 선비와 백성들을 격려하였다. 이 고을에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날쌔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이 있어 공이 이 선비에게 함께 고을을 지키자고 하였더니 정씨가 대답하기를 ‘적세가 날카로우니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다시 기회를 도모하여도 늦지 않을 것이다.’고 하기에 공이 이를 크게 꾸짖고 이르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과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꾸짖고 하늘을 우러러 이르기를 ‘나는 한번 죽기를 결심하였다.’고 다짐하였다. 전쟁의 준비를 힘써 갖추고 밤낮없이 성안을 몸소 순시하니 고을 백성들이 동요가 없었다.왜적이 쳐들어와 멀리서 지키고 있는 성을 바라보고 사자 한사람을 보내어 항복하라는 적장의 뜻을 밝히니 사자의 목을 베어 군중들에게 보이자 군사들이 그 위세에 경탄하여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군중들이 이르기를 오늘 사자를 죽었으니 내일은 적이 몰려와 그 분풀이를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기에 공이 ‘나라를 지키는 관리가 피한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피하자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형하겠다.’고 하여 여러 사람들의 의견이 싸우자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다음날 아침 적이 사방에서 밀려오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성을 지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한낮이 지나자 화살도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자 힘이 장사인 군관 오항이라는 사람이 공을 업고 피하고자 하였다. 이때 공이 ‘내 평생동안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왔는데 국난을 당하여 어찌 한 몸만 살겠다고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피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조복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등에 화살을 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아니하였다. 적이 쳐들어와 공을 붙잡고 절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공은 꼿꼿이 서서 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화를 당하였다. 작은 아들도 처음부터 공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공과 함께 죽고 부인 이씨도 엎어져 자결하였는데 이때 부인은 임신중이었다.고 한다.
〔김호길(金鎬吉)〕 5) <원주시사>(민속.문화재편. 원주시사편찬위원회. 2000년) (2002. 6. 24. 윤만(문) 제공)
▣ 충렬사지(忠烈祠址) pp924~925 - 충렬사는 고려시대 원주 영원산성 전투에서 합단과 싸워 승전한 응양상호군 원충갑(元冲甲)을 주향(主享)하고,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역시 영원산성 전투에서 전사한 원주목사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여주목사 원호(元豪)를 배향한 사우(祠宇)로 현종 10년(1669)에 건립하여 이듬해인 1670년에 사액되었다.
조선말 대원군 집권시기에 서원. 사우가 폐철되면서 없어진 것으로 추정되나 확실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여지도서』등의 기록에 의하면 총 건물 규모는 14칸이며, 관아 북쪽 1리에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모두 시가지로 개발되어 그 유지(遺址)를 찾기 어렵다. 충북 괴산의 김시민 장군을 봉안한 충민사 경내에 사당을 복원하였는데, 이곳에 원주 충렬사 현판이 보관되어 있다.
▣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충렬비(忠烈碑) pp1061~1064 - 조선국(朝鮮國)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議政府) 영의정(領議政) 겸(兼) 경연(經筵) 홍문관(弘文館)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관상감(觀象監) 세자사(世子師)에 증직(贈職)되고 통정대부(通政大夫) 충청도 관찰사(觀察使) 겸 병마수군절도사(兵馬水軍節度使) 순찰사(巡察使)를 지낸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의 충렬비(忠烈碑)이다.
- 만력 임진년(1592)의 난리는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없었던 것이다. 왜적들이 가는 곳마다 여러 고을이 그 기세만 바라보고도 달아나서 모두 무너져 이것을 막아낼 자가 없었다. 대세가 이러한 때에 김공이 원주 목사로 있었는데 의리로 분발하여 슬픔을 딛고 일어나 군사를 규합하는 한편 군량미를 모아 영원산성에 들어가서 목숨을 걸고 지킬 것을 계획하고 충성과 의리로 이 고을선비와 백성들을격려하였다.
이 고을에 정씨 성을 가진 선비가 날세고 용맹스럽다는 소문이 있어 김공이 이 선비에게 함께 고을을 지키자고 하였더니 정씨가 말하기를 “적의 형세가 매우 날카로우니 우선 적의 예봉을 피하였다가 다시 기회를 보아서 도모하여도 늦지 않다.”고 하기에 김공이 이를 꾸짖어 말하기를 “그대와 같은 사람과는 이 일을 함께 도모할 수 없다.”고 하고 군사를 지휘하여 나가면서 하늘을우러러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는 한번 죽기를 결심하였다.”고 다짐하였다. 이에 전쟁의 준비를 힘써 갖추고 밤낮없이 성(城)안을 몸소 순찰하니 고을 백성들이 믿고 두려워 함이 없었다. 왜적이 멀리서도 김공이 굳게 지키는 것을 알고 먼저 한사람의 사자(使者)를 보내어 항복을 권유하고 또한 협박하였다. 김공은 즉시 사자의 목을 베어 군중들에게 보이니 군사들이 그 위세에 경탄하여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여러 사람들이 의논하기를 “오늘 사자를 죽었으니 내일은 반드시 왜적이 몰려와 그 분풀이를 할 것이니 피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라고 하기에 김공이 “나라를 지키는 관리가 피한다니 어디로 피한다는 말인가. 피하자는 말을 하는 자가 있으면 처형하겠다.”고 하니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드디어 싸우자는 방향으로 굳어졌다. - 다음날 아침에 과연 왜적이 사방에서 밀려들고 화살과 돌이 비오듯 하였다. 성을 지켜 죽을 힘을 다하여 싸웠으나 한낮이 지나자 화살이 떨어지고 힘도 다하여 마침내 성이 함락되기에 이르렀다. 힘이 장사인 군관 오항(吳杭)이라는 사람이 김공을 업고 피하고자 하였으나 이때 김공이 “내 평생동안 나라의 후한 은혜를 입어 왔는데 국난을 당하여 어찌 한 몸만을 살겠다고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너희들은 피하도록 하라.”고 말하고 조복(朝服)으로 갈아입고 의자에 앉아 등에 화살을 맞았으나 미동도 하지 아니하였다. 적이 쳐들어와 김공을 붙잡고 절을 하라고 협박하였으나 김공은 꼿꼿이 서서 굽히지 않고 왜적을 꾸짖기를 그치지 아니하다가 마침내 죽음을 당하였다.
- 작은 아들 시백(時伯)도 처음부터 끝까지 김공을 모시고 그의 곁을 떠나지 아니하다가 김공과 함께 죽었고 부인 이씨도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는데 이때 부인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다고 한다. 밤을 틈타 오항(吳杭) 등이 성안에 들어가 세분의 시신을 거두어 가지고 고현(高峴)이라는 선비와 함께 주천현(酒泉縣)에 임시로 장사(葬事)를 지냈다가 왜적이 물러간 뒤에 여주(驪州)에다시 장사를 지냈다 (옮긴이 주(註) : 선조 27년(1594) 충주 홍복동(洪福洞)에 장사지냈다는 기록과는 다른 기록으로 확인을 요함)가 뒤에 충주 복성동(福城盛)으로 이장하였다. 성이 함락되기 20일전에 큰 아들 시헌(時獻)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내가 이제 다시 무엇을 하겠는가. 다만 커다란 절개를 잃지 아니하면 그 뿐이다.”라고 하더니 그 글과 같이 김공은 대의에 순응하였다.
- 처음에 영원산성을 지킬 때에 판서(判書) 이기(李墍)가 호소사(號召使)로서 원주의 서쪽 지경에 있으면서 공에게 글을 보내어 이르기를 “비록 나라를 위해 죽음으로써 지켜 직분을 다하고자 하나 성은 외롭고 형세는 급하니 어떻게 하겠는가. 모름지기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나와 같이 함께 협력하다가 여주와 원주 지경의 왜적의 형세를 보아 나가던지 물러서던지 하는 것이 옳다.”라고하였다. 김공이 다시 답서를 보내어 말하고 반드시 죽더라도 두 마음을 가지지 않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 글을 본 이공(李公)이 다른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의 충성심과 왜적에 대한 분노가 이와 같으니 타인이 어찌 그 충절을 바꿀 수 있겠는가. 아깝구나. 그 죽음이여.”라고 탄식을 금치 못하였다. 서평(西平) 한준겸(韓浚謙)이 원주 목사로 와서 관찰사에게 아뢰기를 “생각컨대 왜란이 일어난 뒤로 죽음으로써 국토를 지킨 자가 없는데 전에 목사로 있던 김공이 홀로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다가 온 집안이 망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으나 그 뜻을 바꾸지 아니하였으므로 조정에서는 그 충절을 가상하게 여겨서 이미 정경(正卿)의직첨을 주었으니 장사 지낼 때에 있어서도 그것에 합당한 대접이 있어야 하겠기에 이 일을 임금께 이뢰기를 청한다.”고 하였다.
- 아. 슬프다. 김공이 스스로 지키려는 의지는 아들에게 부친 편지에서 볼 수 있고, 김공이 다른 사람에게 보인 신뢰는 이공에게 한 말로서 알 수 있다. 김공의 절의가 높은 것은 서평 함준겸의 보고에 증험할 수 있다. 한 성안에서 하룻동안에 아버지는 충성으로 죽고, 아들은 효도에 죽고, 부인은 절의로 죽었으니 이것은 중국 송나라 조묘발(趙昴發) 부부의 쌍절개와 중국 진나라변곤 부자가 함께 죽은 것을 겸하였다 하겠다. 목숨을 버릴지언정 뜻을 굽히지 아니하여 만세토록 삼강(三綱)의 표준이 되었으니 아마 이른바 큰 절개에 임해서 빼앗을 수 없는 자가 아닌가. 아마도 아내에게 모범이 되어 일가를 다스리는 자가 아닌가. 사람들이 영광스러운 이름을 남기는데 어찌 다함이 있으랴.
- 만력 무신년(1608)에 옛 정승 완평(完平). 백사(白沙). 일송(一松)이 김공이 출생한 마을에 정표문려(旌表門閭)를 세우도록 건의를 하여 이제 그 마을에 충신. 효자. 열녀의 정문이 서있고, 원주 사람들이 또 김공을 위하여 사당을 세워 제사를 지내니 이제 나라에서 ‘충렬사(忠烈祠)’라는 액호(額號)를 내리고 예관(禮官)을 보내어 제사지내도록 하였다.
- 공의 이름은 제갑(悌甲)이요, 자는 순초(順初), 성은 김(金)씨니 안동(安東)사람이다. 사람됨이 뛰어나고 절개가 굳고 말이 적고 과묵하며 책읽기를 좋아하며 스스로 의재(毅齋)라고 호(號)하였다. 문과에 급제하여 청요직을 역임하고, 세 번씩이나 두 도의 안렴사(按廉使)를 지냈고 원주 목사가 된 것은 스스로 외직(外職)을 구하였던데서 연유한 것이다. 참판인 시헌(時獻)은 그의맏아들로 후사(後嗣)가 없고, 현재 영월군수 상중(尙重)은 시백(時伯)의 손자이니 김공의 둘째 아들의 맏이다. 지금 좌의정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許秩)은 모두 김공의 외손으로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김공이 끼친 교화를 이었다. 선비와 백성들이 김공을 기려 명(銘)하였다.
-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은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
- 원주 사람 생원 정석형(鄭錫衡)은 삼가 옛 어른들이 전하는 바를 모아서 그 전말(顚末)을 기록하여 경건하게 쓴다. 숭정 병자년 뒤 35년(1670)인 경술년 3월 일에 세우다.
6)<원주시사(역사편)/원주시사편찬위원회/2000년) (2002. 6. 24. 윤만(문) 제공) ▣ 영원산성(令+鳥原山城) 전투와 김제갑(金悌甲)의 항전. pp359~365
(1) 영원산성 전투과정. - 우리나라의 경우 산지가 많은 지형적인 조건과 지역적 특수성 때문에 산성이 발달하였다. 조선시대 각 읍의 인근에 있는 산지에는 대개 1~2개 혹은 그 이상의 산성이 있었는데 성안에는 우물이나 창고 혹은 임시 관아를 두어 유사시에 주변의 주민을 이끌고 성에 웅거하여 적과 대응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산성은 당대에 신축한 것도 있지만 상당수는 고대로부터 존재하는 것이 많았다. 산성은 조선중기에 이르러 200여년에 걸쳐 외침이 없었던 까닭에 정비. 관리를 소홀히 하여 대부분 폐철(廢撤)되거나 퇴락(頹落)하였다. 당사 조선왕조의 방비시설에 대한 관심이 주로 북방의 변경지역과 남방의 연해지역, 특히 왜인들이 자주 왕래하는 곳과 왜적 방비에 요충지가 되는 곳에 집중되어 내륙지방의 방비는 상당히 해이해졌던 것과 맥을 같이한다.
- 임진왜란 직전 조선의 관방시설은 ‘내고외허(內固外虛)’의 방어실태를 보여 주었고 왜란이 일어나자 그 단점이 쉽게 노출되었다. 왜군이 부산진성. 동래읍성을 차례로 함락시키고 주요 교통로에 위치한 읍성류(邑城類)를 무시하다시피 북상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왜란을 겪는 동안 변경을 돌파하여 내지까지 깊숙이 침입한 적을 제압하는 방법으로는 역시 산성에 청야입보(淸野入保)하는 전통적인 방법이효과적임이 인식되었다. 이에 따라 전란중에 수많은 고산성(古山城)들이 수축. 개축되었다. 임진왜란시 강원도의 산성중 삼척 두타산성(頭陀山城), 평창 노성산성(魯城山城), 영원산성에서는 직접 전투가 전개되었다. 이 가운데 영원산성은 원주 동쪽 30리인 치악산 남록에 위치하며, 석축의 길이가 3,749척으로 사방이 모두 절벽으며 전방에 통로가 하나 있어서 겨우 한사람씩 기어올라갈 수 있는 요새였다.
- 김제갑 목사는 원주에서 정사(政事)한 지 1년이 채 안된 시기에 왜란을 만나게 되었다. 인근 충주에서 전투가 벌어졌을 때 신립군(申砬軍)에게 정예병과 이기구(利器驅) 모두를 지원해 주었기 때문에 원주 자체 방어를 위한 무기나 인적자원이 없었던 셈이다. 회양에 진을 친 왜군은 평창, 신림을 거쳐 원주로 쳐들어올 태세였다. 목사 김제갑은 재계(齋戒)한 후 융상(戎床)에 나가 투구. 갑옷. 활. 융복(戎服).화살을 구비하고 “누가 능히 몸이 가볍고 날쌔게 적을 대적할 수 있느냐? 적의 강경한 것은 더하고 우리는 약한 것이 날로 심하여 겁이 나니 싸우면 피만 흘릴 것이요 사람으로 지키자니 꾀가 어렵다. 성은 첩지가 없고 밭도랑도 흐르지 않고 식량이 넉넉하지 않으며 기계가 다하여 우리 고을은 하나도 믿을 것이 없다. 그렇다하여 어찌 속수(束手)하는 것이 편안할 까? 하늘이 원주에 준 것은 오직 영원산성이 있어 가히 웅거할 만하다. 에전 사람이 여기를 얻어 공을 세웠다. 나는 비록 재주가 예전 사람만 못하지만 나의 뜻이야 어찌 예전 사람만 못하리오. 지금에 버리고 지키지 않으면 다만 일이 기회를 잃을 뿐 아니라 하늘이 내몸을 벌줄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 이때 사인(士人) 정사영이 “적의 강성함이 다른 적에 비할 것이 아니요 지금 때가 예전과 다르고 이 병졸로서 적을 대하지 못합니다. 마땅히 나아가 피하였다가 길고 짧은 것을 침착하게 살피고 이해를 강구함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간언하였다. 그러나 김제갑은 “너와 더불어 말할 것이 없다.”라고 하며 목민관으로서 나라 지키는 직분을 다하고자 하며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사사로이 죽는 것보다낫다는 말과 함께 성안으로 이동하였다.
- 관속과 노약자를 비롯한 원주민들 그리고 한성에서 피난온 자들이 포함되어 수일내에 성안이 가득찼다. 성의 사면은 모두 절벽이며 앞에는 길 하나만 통하여 반드시 어관(魚貫)같이 올라가도록 되어 있었다. 깎고 파고 쌓으며, 안에는 양식을 넓게 싸놓고 기계와 나무를 쌓고 샘을 파는 등 여러달 동안 생활할 준비를 하였고 밖으로는 큰 수레를 거듭 난간을 하여 돌을 실어 공중에 달아놓고 왜군이 오기만을기다렸다. 성첩(城堞) 사이에 활과 화살, 화총을 구비하고 낮과 밤이 없이 몸소 순성(巡城)하였다.
- 김제갑은 경장(京將) 박종남(朴宗男)에게 “적은 반드시 가리영(可里嶺)을 지나서 원주로 향하여 북상할 것이다. 이 령은 매우 험하여 말 두필이 동시에 지나지 못할 만큼 길이 좁으니 이 령의 목을 눌러서 병력 천명으로만 지킨다면 비록 백만의 적이라도 날개없이는 통과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그 령을 잃을 때에는 내가 뒤에서 견고히 준비한 것으로 대책을 세우겠으니 힘써 싸우라.”고 명령하였다. 박종남은 가리영까지 나간 후 병사 한 사람을 시켜 적이 근접하는 동정을 살펴 오라고 지시하였다. 그러나 이 병사는 적을 바라볼 수 있는데 까지 가지 않고 도중에서 그대로 돌아와 버리고서 거짓말로 보고하였다. 박종남은 병사의 거짓보고를 그대로 믿고 말안장을 내려놓고 갑옷과 투구를 벗어 제치고 강가에 앉아서 물을 적시며 한가롭게 쉬고 있었다. 이때에 왜군은 이미 아군의 복병이 있는 곳을 몰래 돌아 그 후방으로 나와 있었으며, 복병들은 별안간 왜군이 기습해 오자 도망쳤고 박종남 역시 홀몸으로 겨우 빠져나왔던 것이다.
- 이날에 왜군이 원주목에 이미 들어왔다는 소문이 돌자 성중의 사람들이 모두 두려움에 떨게 되었다. 김제갑은 간절한 말과 엄한 영으로 방수(防戍)에 힘쓸 것을 맹세하면서 민들의 동요를 제지하였다. 원주에 들어온 적은 8월 24일 군사를 성중에 보내어 장대 끝에 항복을 권하는 적장의 편지를 김제갑에게 전하였다. 이후 위엄으로 겁박하여 굴복하도록 하니 김제갑이 허리에서 칼을 빼어 그 사자를직접 베어 죽였다. 김제갑이 평상에 걸터 앉자 사람들은 다 두렵고 떨며 무서워 감히 우러러 보지 못하였다 한다.
- 다음날에는 적이 크게 밀려올 것으로 예상하고 곧 부하 병사들에게 명령하여 산성에서 5리쯤 떨어져 있는 5군데 산봉우리에 한사람씩 숨을 정도로 구멍을 파고 척후병을 파견시키고 적의 내습시 적(笛)을 불도록 했다. 이튿날 25일 아침 5군데의 적(笛)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했다. 창과 검이 산을 뒤덮고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땅을 울렸으나 외부에서는 전혀 도움이 없었던 것이다. 성첩을 지키는 숫자가5천명에 이르지 않아 중과부적의 형세였다. 험준한 지형 및 인화가 넘치는 군율로 무장된 조선군은 저녁까지 왜군과 처절히 맞서 싸웠다. 이후 어둠을 틈타 적군은 수십명의 결사대를 뽑아 절벽의 틈 사이로 기어 올라와서 성벽에 구멍을 뚫고 불시에 고함을 치며 돌격해 오니 적의 본진이 이를 기화로 성으로 쳐들어 왔다. 성중에서 활과 돌을 동원하여 적과 대항하였으나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 김제갑은 군관(軍官) 오항(吳杭)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평생에 나라에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이제 이 격전의 마당에서 어찌 살겠다고 도망갈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마침내 조복을 꺼내어 갑옷위에 입고 호상(胡床)에 걸터 앉아 내려가지 않고 활을 당기어 적을 쏘았다. 적의 화살이 공의 등에 맞추어도 내려가지 않고 다시 명중되어도 내려가지 않자 적의 부장 중 한명이 그에게 호상에서 내려앉아 항복의 뜻으로 무릎을 꿇리게 하였으나 끝내 거부하고 입에서 선혈이 흘러내리면서도 꾸짖는 것이 끊어지지 않았다. 이 때 김제갑의 나이 68세였다.
- 부인 이씨는 그의 죽은 소식을 접하자 뱃속의 태아와 함께 칼을 입에 물고 엎드려 자결하였다. 큰 아들 시헌(時獻)은 무자년(戊子年) 과거에 올라 이부랑(吏部郞)이 되어 관서지방에서 임금을 호종(扈從)하고 있었으나 작은 아들 시백(時伯)은 목사 옆을 떠나지 않고 부모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산성에 남아 최후까지 싸우다가 장렬히 전사하였다. 또한 김제갑이 거느린 아전(衙前)들과 가솔(家率) 백여식구 역시 끝까지 적과 싸우다가 산성과 운명을 같이 하였다. 적이 물러간 후 조문벽(趙文璧)과 고현(高峴)은 성안에 들어가 목사 내외와 시백의 시체를 거두어서 주천에 가매장하였다가 선조 27년(1594) 충주 홍복동(洪福洞)에 장사지냈고, 전란이 끝난 후 선조 35년(1602) 봄에 충주 복성동(福盛洞)에 이장했다. 원주관민들은 영원산성의 사수를 듣고 모두 눈물로써 치제(致祭)하였는데, 그 제문에 “공과 그 부인 그리고 아들 등 세 사람은 충성과 정열(貞烈)과 효도로서 같은 날 같은 장소에서 돌아가셨다니 일우고성(一偶孤城)에 만고삼강(萬古三綱)을 세우셨나이다. 이에 고을 백성들이 이를 흠모하는 나머지 삼가 한잔의 술을 부어 치제를 올리는 바입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왜군은 원주를 완전히 함락하고 횡성을 거쳐 춘천을 점령하여 강원도 전역을 완전히 흽쓴 후 원주에 모리길성(毛利吉成), 금화에 도진의홍(島津義弘). 도진충풍(島津忠豊), 철원에 윤동우병(尹東祐兵) 부대가 주둔하면서 숱한 분탕질 끝에 다음해인 선조 26년(1593) 4월 18일 왜군 전체가 한성을 철수할 때 강원도의 왜군들도 철수하였다.
(2)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의 생애와 정치활동. - 김제갑은 본관이 안동이며 자는 순초(順初) 호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이며 진사 김석(金錫)의 아들이다. 1525년(중종 20) 5월17일 서울 반석방에서 태어났다. 10세 때 부친이 별세한 후 고모부 묵재(?齋) 이문건(李文楗)과 장인인 서파(西坡) 윤상공(尹相公) 개(漑) 밑에서 수학하였다. 19세때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 된 후 1553년(명종 8) 별시문과에 급제하여1555년(명종 10) 홍문관 정자가 되고 3년후 병조좌랑을 거쳐 1573년(선조 6) 정언, 1581년(선조 14) 충청도 관찰사에 올랐다.
- 1589년(선조 22) 창성부사가 되고 다음해 황해도 관찰사가 되었다. 1591년 공조참의로 배명된 후 이조에서 보좌하는데 아들 시헌 역시 정랑으로 있어, 거듭 외읍을 구하다가 원주목사에 부임하게 되었다. 공마관압사(貢馬管押使)로 서울과 연경을 오가며 공마 50필을 제대로 보존한 일과 진주에서 토호들을 잘 다스려 치적을 쌓은 일은 유명하며 모친에게 효도하기 위해 부임지를 지방으로 정한 사례도거듭 나타났다. 원주목사로 임용된지 채 1년이 되지 않아 임진왜란을 맞이하게 되었다.
- 조선왕조는 민들의 생존조건을 개선하여 민심수습에 나서는 한편으로 민에 대한 포장책(??策)을 강구하기에 이르른다. 즉 전시의 충신. 효자. 열녀에 해당하는 사례를 꾸준히 발굴하여 왔던 것이다. 포장작업의 진행과정을 정리하면 그 지방 사족이 지방관에게 선행사례를 상신(上申)하면 지방관이 이를 접수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하고 관찰사는 예조에 실적을 올리고 포상을 의뢰한다.
- 예조는 예에 따라 등급을 나누고 정표(旌表). 상직(賞職). 복호(復戶)하며 상물(賞物)은 그 고하에 따라 선별하여 의정부에 보고하면 의정부는 다시 검토하여 왕에게 보고하므로서 확정짓는 형식이었다.
- 특히 ‘충신’으로 선별된 사례를 보면 전쟁기간 중 유공자였음에도 기왕의 포장에서 누락된 의병장과 그 지역 지방관으로서 전사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조선왕조는 그들의 충성심을 강조함으로서 지방민의 충성심을 견인시키고자 하였다.
- 조선왕조는 김제갑을 선조 39년(1606)에 선무원훈(宣武原勳)으로 녹하였다. 1711년(숙종 37)에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고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의재는 문숙(文肅)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 의재의 형제는 모두 5인이었는데 그 중 3인은 문과에 급제하였고 2인은 진사에 올랐다. 참판을 역임한 시헌은 그의 맏아들인데 후사가 없고 영월군수를 역임한 상중(尙重)은 둘째 시백의 손자이다. 좌의정을 역임한 허적(許積)과 목사 허질(許秩)은 외손이다. 허질 또한 원주목사가 되어 그가 끼친 교화를 이어갔다고 한다. 1670년(현종 11)원주의 생원 정○형(鄭○衡)에 의해 쓰여진 기록에 따르면 ‘죽는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을 곳에서 죽기가 어렵도다. 오직 군자라야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할 수 있으며 위급함을 당하여도 보통으로 보며 충성심을 가다듬기를 시종 옮기지 않나니 신하는 충성에 죽고 부인은 정절에 죽고 아들은 효에 죽어 만고에 삼강과 오륜을 심었도다.“라고 하였다. 끊임없는 학문연구와 수련으로 자질을 갖춘 선비가 인간의 마땅한 도리를 체득하여 실천함을 본연의 모습으로 삼고, 이를 통한 인격의 성취에 목표를 두는 것은 우리가 그려 볼 수 있는 선비상을 집약한 것이라 하겠다. 과거 지난한 역사 속에서 선비는 우리 사회의 양심이자 지성이며 인격의 기준이었다. 그리고 각 시대의 과제에 대해 책임있게 행동으로 대응했다.
- 의재는 지조와 절개를 중히 여긴 선비상의 전형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선비의 입지가 확고하면 정의를 위하여 두려울 것이 없고 공론을 그르칠 염려가 없게 된다. 여기에서 “위급을 당하면 목숨도 바치며 득을 보면 의를 먼저 생각한다.”는 선비정신이 발휘될 수 있으며 의리의 명분은 생명보다 중시된다. 선비는 무엇보다 생명보다 의를 더욱 소중히 여겼으며, 죽음을 택하는 것은 후대에 그러한 사실이알려져서 이름을 빛날 것을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성이 함락되기 20일 전에 아들 시헌에게 부친 글에서 의재는 “내가 지금 무엇을 하겠나. 다만 절개를 잃지 않기를 기약할 뿐이다.”라고 하여 스스로의 의지를 다지고 있었다.
- 처음 영원산성을 지킬 때에 판서 이기(李?)가 호소사(號召使)로서 원주의 서쪽 지경에 있으면서 공에게 보낸 글에 말하기를 “비록 땅을 지키면서 죽기로서 직분을 다하고자 하나 성은 외롭고 일은 급한데 어찌하겠는가. 모름지기 이리로 나와서 나와 더불어 함께 일하고 여주와 원주의 지경에서 형세를 보아서 나아가고 물러가는 것이 옳다.”라고 하자 의재는 답서에서 대의(大義)를 말하며 죽더라도두 마음이 없음을 보였다는 것이다.(2002. 6.23)
7) 강원일보(2004. 2. 2. 문화면) (2004. 04. 21. 윤만(문) 제공) □ [강원의 인물·2월] 조선중기 원주목사 김제갑 <박문성-평원문화연구소장> - 왜적 칼날 앞에 굽히지 않은 충절 -
김제갑(金悌甲)은 조선 중기의 문신(文臣)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순초(順初), 호(號)는 의재(毅齋)이다. 고려의 명장(名將) 김방경(金方慶)의 후손으로 부친은 석(錫)이고, 퇴계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명종 8년(1553) 별시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정자, 병조좌랑·정언을 거쳐 선조 14년(1581) 충청도 관찰사를 역임하였고, 선조 16년(1583) 우승지로 있으면서 이이(李珥)와 박순(朴淳)을 탄핵하다가 벼슬에서 물러났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원주목사(原州牧使)로 있으면서 왜장 삼길성(森吉成)이 거느린 왜군이 관동지방을 휩쓴 뒤에 원주를 침공하여 오자 가족과 고을 백성을 이끌고 영원산성(영原山城)으로 들어가 방어에 임했으나, 왜적의 공격으로 결국 성이 함락되어 부인 이씨(李氏)와 아들 시백(時伯)과 함께 순절하였다. 조정에서 그의 충절을 기려 선조 25년 10월 21일 이조판서 겸 경연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의금부도사 성균관 춘추관사에 추증하였다. 원주의 충렬사(忠烈祠)와 괴산의 화암서원(華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숙종 37년(1711) `문숙(文肅)’이란 시호(諡號)가 내려졌다. 1966년 강원도 애국유족부활위원회에서는 원주역전에 그를 추모하는 충렬탑(忠烈塔)을 현종 11년(1670)에 건립된 충렬비 옆에 세웠다.
충렬비에 기록된 명문(銘文)에는 “죽는 것은 어렵지 않으나 죽어야 할 곳에서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니, 오직 군자라야만 생명을 버리고 의리를 취하는 것이다. 위급함을 당하여도 평소와 같이 보고 충성심과 분개심을 가다듬어 끝과 시작이 다르지 않았도다. 신하는 충성으로 죽고, 부인은 죽어 정절을 지켰으며, 아들은 죽어 효도를 다하였으니 여기 만고(萬古)에 삼강과 오륜을 남겼도다. 치악산이 동쪽에 우뚝 솟고 봉천(鳳川)은 서쪽으로 흐르니 선생의 이름과 함께 길이 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현종 개수실록 11년(1670) 2월 7일 을축 조에 “원주목에 있는 원충갑·김제갑·원호의 사당에 `충렬(忠烈)’이라 사액하였다. 원충갑은 고려 사람으로 일찍이 향병을 모집하여 합단을 격퇴하였는데, 그러한 일은 고려사에 실려 있다. 임진년(1592)의 난리에 김제갑은 원주목사였고, 원호는 방어사 였는데, 모두 힘껏 싸우다가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이때에 이르러 원주의 유생들이 상소하여 묘액(廟額)을 내려주기를 청하였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동국여지지(東國與地志)'원주 조에 이르기를 “김제갑은 소경왕(昭敬王;선조)때 원주목사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왜병 광척(光拓)이 고을 가까이 오니 지키는 병사들이 모두 달아나고 숨었으므로, 김제갑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 땅을 지킬 신하는 난리를 당해서는 오직 한 번의 죽음이 있을 뿐이다.'하고, 홀로 영원산성을 보수하고 기계(器械)를 수리하고 백성을 독려하며 지켰다. 왜적이 크게 이르러 성(城)이 함락되자, 왜적을 꾸짖으며 굴복하지 않고 죽었다. 아들 시백이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사망하였는데 도망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면서, 끝내 시신 곁을 떠나지 않다가 왜적에게 해를 입었다.”(金悌甲昭敬王朝爲原州牧使壬辰之亂倭兵光拓近邑守?皆走竄悌甲歎曰守土之臣臨亂惟有一死獨保?原山城修飭器械勵衆拒守賊大至城陷罵賊不屈死子時伯曰父死不可去終不離父屍傍爲賊所害)라고 기록돼 있다.
`여지도서(與地圖書)'원주목 조에 “산성사(山城寺)는 영원산성 안에 있다. 임진왜란 때 목사 김제갑이 병사를 거느리고 들어가 거점으로 하였으나, 왜적에게 졸지에 함락되어 고을의 군사 및 피난한 백성들 모두가 죽었다. 김제갑이 죽고 그 뒤에 승장(僧將)을 설치하여 영원산성을 수호하였다. 산성은 무너지고 절도 없어져 마침내 승장을 혁파하고 군기와 향곡을 고을 안으로 옮겨 두었다. 산성사 서쪽 연안에 단을 쌓았는데, 가뭄이 들었을 때 관리를 보내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이로써 전쟁에서 죽은 장사를 위로한다.”(山城寺在?原城中壬辰倭亂牧使金悌甲領兵入據賊兵猝陷州軍及避亂人民俱沒悌甲死之厥後設置僧將守護山城矣城?寺廢遂罷僧將移置軍器餉穀於州內寺之西岸築壇天 旱則遣官致祭于此以慰戰亡將士)고 하였다.
`대동지지(大東地志)'원주 조에 “선조 25년에 왜적의 우두머리 길성중융이 철령에서 나누어 관동을 향하여 모든 고을을 유린하며 장차 원주를 핍박하려 하니 원주목사 김제갑과 여주목사 원호(元豪)가 병사를 이끌고 영원산성으로 들어갔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며 앞에 길 하나만이 통하여 적이 낭떠러지를 타고 성에 점차로 들어와 드디어 함락되었으나 김제갑은 굴복하지 않았고, 그의 아내와 아들도 함께 전사하였다.”(宣祖二十五年倭酋吉盛重隆自鐵嶺分向關東蹂躪列邑將迫原州本州牧使金悌甲驪州牧使元豪領兵入翎原山城城四面皆絶壁前通一路賊緣崖潛進城遂陷悌甲不屈與其妻子同死)라고 하였다
또한 선조 수정실록 25년 8월 1일 무자조를 상고하면 “적병이 원주 영원산성을 함락시켜 목사 김제갑이 전사하였다. 이에 앞서 관동(關東)의 주현이 모두 적에게 노략질 당하였으나 원주만은 온전하였다. 적이 이미 원호의 군사를 패배시키고 드디어 곧바로 원주로 침입하니, 원주목사 김제갑이 고을 안의 사대부와 서민 그리고 온 가족을 데리고 산성으로 들어갔는데 험한 지세만 믿고 설비를 하지 않았다. 적이 두세 번 성 밖까지 왔다가 되돌아가므로 성안의 사람들은 더욱 그들을 얕잡아 보았다. 하루는 적이 잠깐 퇴각하는 체하다가 곧바로 군사를 돌려 허점을 틈타 습격하였으므로 성이 금방 함락되었다. 김제갑은 굴하지 않고 전사하였는데, 처자도 모두 따라 죽었으므로 사람들이 한 가문에서 충(忠)·효(孝)·열(烈)이 나왔다고 하였다. 왜적이 드디어 원주에 주둔하고 군영을 지평현까지 연결하여 수도에 이르는 길을 확보하였다.” 라고 기록되었다. 원주 영원산성대첩제 위원회에서는 원충갑 장군의 대첩을 기리고 김제갑목사 등 영원산성에서 나라를 위해 선혈을 뿌리신 많은 순국 선현들의 한 맺힌 원혼을 위무하고 추모하기 위하여 매년 영원산성 대첩제를 봉행하고 있다.
8) <대동야승 내 기록 내용> (2003. 5. 14. 태영(군) 제공)
김제갑(金悌甲) 원주목사(牧使)는 김제갑(金悌甲)이니 자는 순초(順初)요, 본관은 안동이다. 살결이 희고 키가 크고 말과 웃음이 적었다. 가정(嘉靖) 계축년(1553)에 과거에 올라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에 출입하였는데 얼굴빛을 바로 하고 아첨하지 아니하였으며, 여러 번 지방관을 역임하였는데 간 곳마다 교체된 뒤에 백성들이 그를 생각하였다. 원주에 부임한 지 겨우 1년에 일이 아직 자리잡히지 않았는데 적이 충주(忠州)에 들어왔을 때 원주에서 거리가 멀지 아니하므로 정예 군사와 쓸 만한 무기를 다 내어 충주로 구원하러 보냈으므로 성중에는 믿을 것이 없었다. 이때에 이르러 적이 둔마다 진마다 앞뒤에 서로 잇달아서 징소리와 북소리가 서로 닿았다. 김제갑이 이에 기(旗)를 세워 부대(部隊)를 정돈하고 민정(民丁)을 뽑고 군량을 저축하였으나, 다만 통솔할 만한 용맹스런 장수가 없었다. 본 고을에 성이 정(鄭)가인 사람이 날래고 용맹스럽기가 남보다 뛰어났는데 여러 번 고을 사람에게 배척을 받고 억울하게 지낸다는 말을 듣고 불러서 말하기를, “적은 강하고 우리는 약하며 병력의 숫자가 너무 차이가 있고 용감함과 겁내는 것이 매우 다르니, 싸우자니 한갓 백성만 죽이겠고 지키자니 성이 견고하지 못하고 양식도 모자라고 무기도 모자라서 한 가지 믿을 것이 없으나, 어찌 손을 놓고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리랴. 다만 이 지방에 영원산성(鈴原山城)이 있으니 그 곳을 점거하여 지킬 만하다. 옛사람이 이 곳을 가지고 성공하였으니 내 재주는 비록 옛사람만 못하나 뜻은 같은데 이 성을 지키지 아니하면 해볼 도리가 없다. 너는 본래 담력이 있고 용맹이 있다 하니, 이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이 성을 점거하라. 내가 장차 따르겠다.” 하니, 정(鄭)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감히 명령대로 하지 않으리까마는 다만 적세(賊勢)의 강성한 것이 다른 적에 비할 것이 아니며, 지금은 때가 또 옛날과 다르니 이 군사로써 저놈들의 칼날에 저항하자면 세력이 원래 대적할 수 없으니 한갓 지형의 험한 것만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마땅히 조금 나가 피하면서 장단(長短)을 참작하고 이해(利害)를 강구하여 형편을 보아 하는 것이 늦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제갑이 크게 노하여 꾸짖기를, “네놈과는 일을 도모할 수 없구나.” 하고, 인하여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기를, “나는 죽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여러 번 주상을 가까이 모시는 관직에 있으면서 깊은 은혜를 받았으니 입고 먹는 것이 모두 임금이 주신 것이거늘 하물며 지방을 지키는 관원이 되었으니 관직을 또한 버릴 수도 없는 것이다. 살아도 나라와 살고 죽어도 나라와 죽을 것이니 시간이나 끌면서 살기를 구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나는 마땅히 험한 곳을 질러막아 힘을 다하여 항거하다가 하늘의 덕으로 적의 칼날을 꺾을 수 있다면 다행이요, 만일 불행하면 오직 나라를 위한 죽음이 있을 뿐이니 오히려 사적으로 죽는 것보다 낫지 아니한가.” 하고, 드디어 말을 타고 선도(先導)하여 앞장서서 군사들을 거느리니 사람들이 모두 감격하여 즐겁게 달려와서 노약자들이 지거나 이고 벼랑에 붙어서 올라가고, 서울로부터 온 자들도 또 붙들고 이끌고 들어와서 수일이 못 되어 성내가 가득 찼다. 그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요, 앞에만 한 가닥의 길이 통하였는데 사람들이 모두 꿴 물고기처럼 올라왔다. 이에 안으로는 양식과 기계를 저축하고 땔나무를 쌓고 우물을 파서 수개월 준비를 하고 밖으로는 수레를 걸치고 함정을 설치하여 돌을 실어 공중에 달아매어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성첩(城堞) 위에는 굳센 활과 독한 화살을 벌여 놓고 화총(火銃)을 사이에 끼워놓고 밤낮으로 몸소 순시하니 성중에서 믿고 두려움이 없었다. 또 서울에서 온 박(朴)가란 사람과 약속하기를, “적이 반드시 가리령(可里嶺)으로 올 것인데 가리령은 험하여 말이 두 줄로 올 수 없고 사람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없는 곳이니 만일 1천의 군사로서 그 길목을 질러 막으면 적이 비록 백만이라도 날개가 돋치지 않고는 지날 수 없어 버틸 수 있다. 만일 그 험한 곳을 잃더라도 나도 또한 예비할 수 있으니 그대는 힘쓰라.” 하니, 박씨가 승낙하고 가서 한 군사를 시켜 적이 오는가를 정탐하게 하였더니 군사가 가지 아니하고 중로에서 돌아와서 속이기를, “적이 늦게 와서 아직 멀었습니다.” 하였다. 박씨가 그 말을 믿고 안장을 풀고 갑옷을 벗고 냇가에서 쉬면서 적이 이미 그 뒤를 습격할 줄을 몰랐다가 몸만 빠져 나와 달아났다. 적이 이미 본주(本州)에 들어오니 여러 사람이 다 벌벌 떨었으나 김제갑은 요동하지 않고 여러 사람들에게 맹세하여 더욱 가다듬으니 여러 사람이 의기에 감동되어 울었다. 적이 이쪽의 방비가 있는 줄을 알고는 글을 써서 긴 나무끝에 매달아서 들여보내어 이익으로 꼬이고 위엄으로 협박하였다. 김제갑이 칼을 빼어 손수 적의 심부름꾼을 베고 도로 걸상에 걸터앉는데 머리털이 꼿꼿하게 서고 어깨가 솟아 산처럼 높고 무거웠다. 사람들이 다 두려워하였고, 늠름하여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튿날에 적이 반드시 크게 덮쳐올 것을 알고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5리쯤 되는 다섯 봉우리 위에다 각기 군사 한 사람씩 벌여 세워 망을 보아서 적이 오면 각(角)을 불게 하였더니 날이 밝을 무렵에 다섯 군데의 각이 다 불어서 보고하는데 적의 창과 칼날이 산을 덮고 북을 두드리고 부르짖는 소리가 땅을 진동하였다. 밖에서는 미미한 구원병조차 믿을 데가 없고 성첩을 지키는 군사는 5천을 넘지 않으니 성중이 위태롭고 두려워하였다. 이날 저녁에 왜적이 결사대 수십 명을 풀어서 절벽의 틈으로 기어올라 몰래 나와서 성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고함을 지르며 돌진하고 대병을 지휘하여 성을 넘으니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김제갑이 오히려 군복을 입고 걸상에 앉아 내려오지 아니하고 활을 당겨 장차 적을 쏘려하니 적이 먼저 쏘아 맞추어 화살이 등에 꽂혔으나 오히려 내려오지 않았다. 적이 김제갑을 협박하여 걸상에서 내려 절하게 하니 김제갑이 끝내 무릎을 꿇지 않고 꾸짖는 소리가 입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고 드디어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죽었다. 적이 그의 굴종하지 않는 것을 의롭게 여겨서 슬퍼하고 감탄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의 막하사(幕下士) 조문벽(趙文璧)이 죽지 않고 벗어났다가 김제갑 및 부인과 아들의 시체를 수습하여 산기슭에 매장하였는데, 지금까지 길가는 사람이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김제갑의 나이 68세였다. 이때에 왜적이 팔도에 가득 차고 서울 부근의 적병이 사방으로 나가 약탈하고 심지어 선릉(宣陵 성종(成宗)의 능(陵))ㆍ정릉(靖陵 중종(中宗)의 능(陵))을 파헤쳐 다른 사람의 시체에다 비단옷을 입혀서 섞어 놓아 분별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국세가 위태로워 화가 신(神)과 사람에게 미쳤다. 다행히 왜적이 순안(順安 평양 서쪽의 고을)에서 한 걸음도 전진하지 못하였으니 천운이 우리 나라를 아주 망치지 않은 것이다. 증명한 시가 있다. 國勢若綴旒 / 국세는 위태하여 園陵禍乃纏 / 능(陵)에 화가 미쳤네 堂堂三韓土 / 당당한 삼한의 국토가 盡化爲腥羶 / 모두 오랑캐 냄새에 물들었네 蕭蕭松柏路 / 쓸쓸한 송백 길이요 慘慘齋宮邊 / 처참한 재궁 가이로다 千秋遺恨在 / 천 추에 여한이 있으니 無路問蒼天 / 푸른 하늘에 물을 길이 없구나.
(재조번방지),<대동야승>에서 옮김.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신경(申炅) [1613 ~ 1653]-본관 평산(平山). 자 용회(用晦). 호 화은(華隱). 선조의 외손(外孫). 1635년(인조 13) 사마시에 급제했으나 이듬해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벼슬을 단념, 태안현(泰安縣) 백화산(白華山)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강릉(江陵)에서 죽었다. 경사(經史)에 능하고 복술(卜術) ·성력(星曆) ·산수에 이르기까지 박학했으며 패관문학(稗官文學)에도 높은 식견을 가지고 있었다. 집의(執義)에 추증되었으며, 저서에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가 있다.
9) <김제갑 전기문>-- 김원성전(金原城傳)> (2003. 5. 31. 태영(군) 제공)
황명(皇明) 만력(萬曆) 20년 임진에 섬나라 왜적 풍신수길(豊臣秀吉)이 난리를 일으켜, 우리나라 땅 팔도중 일곱이 저들의 수중에 들어가고 말았다. 적의 흉포한 예봉이 돌진해 오자 누구도 감히 막지 못하여 강하고 큰 번진(藩鎭)들이 여지없이 꺽이고 무너졌으며, 심지어는 도성을 비워둔채 떠나기까지 하였으니, 당시의 일이 어떠했겠는가, 적이 길을 나누어 밀고 올라올 때, 길성중륭(吉盛重隆)은 관동(關東)으로 삐쳐 올라와 열읍(列邑)을 짓밟은 다음 이내 흡곡(강원도통천(通川)에 있던 현(縣) 으로 방향을 돌려 동쪽을 따라 내려와 평해(平海)에 이르고 다시 재를 넘어 서쪽으로 향했는데, 그의 군대가 지나는 곳마다 경계(境界)에는 사람이 없고 관문에는 빗장이 없어 탄탄대로를 마구 치달림에 주먹만한 돌, 짧은 막대기 하나라도 말발굽 사이에 거치적거리는 것이 없었다. 이에 도망쳐 숨는 자들은 깊이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이요 저들에 빌붙는 자들은 남보다 뒤질까 걱정이라, 관동을 둘러싼 20여 고을에 남자가 없었으니, 당시의 일이 또 어떠하였겠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진실로 원주목사(原州牧使) 김공(金公)이 삶을 터럭처럼 가벼이 보고 죽음을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편안히 여겨 오직 의(義)를 따랐던 일이 있지 않았다면, 나라의 명맥을 어떻게 부지했겠으며, 적의 간담을 어떻게 서늘하게 했겠으며,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윤리를 어떻게 알수 있었겠으며, 만세에 충성된 신하가 어떤 사람인지를 어떻게 알수 있었겠는가, 아아! 충성스럽도다. 아아! 충성스럽도다.
왜란이 막 일어났을 때에는 곧 공이 원주에 부임한지 채 일년이 되기전 이었으며 원주는 충주(忠州)와 거리가 가까웠다. 처음 전란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그는 온 경내(境內)의 장정과 온 고을의 병기를 모두 거두어 말과 수레에 실어다 군중(軍中)에 소속시켰는데, 끝내 발길 하나 화살촉 하나 돌아가지 못했으니 고을은 그저 텅빈 땅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적이 북쪽으로 길을 잡아 철령(鐵嶺)을 넘고 곧바로 회주(淮州)로 쳐들어 옴에 진영(陣營)이 전후로 줄을 잇고 인근 고을까지 휩쓸어 북소리가 끝없이 들리고 기치가 끝없이 이어졌다.
이에 사방의 고을들이 모조리 흉포한 적도들의 소굴이 되었고 저들의 칼날이 미치지 않은곳은 오직 원주뿐이었으니, 마치 한덩이 고기를 호시탐탐 입맛을 다시는 굶주린 맹수들 사이에 놓아둔 격이라, 아침 저녂사이에 잡아 먹히고 말 매우 위급한 상황이었다. 그런대도 공은 안정된 마음으로 기색이 평상시 처럼 변함이 없었으며, 단지 눈물을 흘리면서 팔뚝을 걷어부치고 말하기를, “이제 뜻있는 일을 할때가 왔다. 그대들은 감히 나를 따르지 않겠는가?”하니, 백성들은 그 의기에 감화되고 선비들은 그 충성에 감동하여 오직 공의 명령을 따를뿐 어기는 자가 없었다. 하루는 공이 재숙(齋宿)하고 일어나 융상(戎床)에 않아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쓰고 활집과 전통을 갖추고 창검과 기치를 세우고 군졸들의 대오를 정비 해놓은 다음 좌우에 시립한 사람들을 앞으로 나오라 하여 묻기를, “누가 몸이 날래고 용감하며 무에가 뛰어나고 미더워 함께 일할만한가?” 하자, 대답하기를, “일찍이 듣건대, 이곳 사람으로 정씨(鄭氏)성을 가진자가 있는데 효용(驍勇)은 전륜하지만 사람들에게 배척을 당하여 향리에 살고있다 합니다.” 하였다. 공이 말하기를, “과연 그러하다면 천리마의 발길질하고, 물어뜯는 사나움이야 무슨 해 될게 있겠는가, 내가 그를 군관(軍官)에 임명 하겠다.”하고는 그를 불러와 계획을 말하기를, “적의 강함은 날로 더하고 우리의 약함은 날로 심해지니, 숫자의 많고, 적음이 현격히 다르고 군사의 용감함과 겁약(怯弱)함이 배로 차이가 난다. 따라서 나가 싸우자니 속절없이 사람들의 피만 흘리겠고 그렇다고 앉아서 지키자니 마땅한 계책을 찾기 어렵구나, 성에는 성가퀴가 없고 참호엔 도랑이 없으며, 군량이 넉넉하지 않고 무기조차 부족하니, 우리고을이 한가지라도 믿고 든든히 여길 것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우리가 어찌 속수무책으로 그냥 있을수 있겠느냐, 하늘이 원주에 내려준 요새라고는 오직 영원성(鈴原城)이 있으니, 이곳이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 옛사람이 이성을 얻고서 공훈(功勳)을 세운적이 있으니, 우리의 재주야 비록 옛사람만 못하겠지만 우리의 뜻이야 어찌 옛사람만 못하겠는가, 그런데 지금은 이곳을 버려두고 지키지 않으니, 이는 매우 중요한 기회를 잃는것일뿐만 아니라 하늘이 장차 우리를 벌하게 될것이다. 나는 너를 의지할 터이니, 너는 힘써주기 바란다.” 하니, 그 정씨가 무릎을 꿇고 대답하기를, “왜적은 너무도 기세가 대단하여 다른 적들에 비길수 없으며 게다가 지금은 옛날과 형편이 다릅니다. 이정도의 병력으로 저들의 예봉에 대항한다는 것은 도저히 형세상 상대가 되지 않으니, 한갖 험준한 요새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모쪼록 잠시 다른 곳으로 가서 피했다가 장단(長短)과 이해를 잘 따져서 우리쪽에 유리한 틈을 얻어 일을 도모해도 아마 늦지 않을 것 입니다.” 하였다. 이말을 들은 공은 불끈 노하여 꾸짖기를, “네놈과는 일을 도모 할수없다.” 하고, 물리쳐 내쫒은 다음 하늘을 우러러 탄식 하기를, “계책은 이미 결정되었으니, 내가 한번죽으면 족할것이다, 내가 누차 청환근신(淸宦近臣)의 자리에 올라 크나큰 성은(聖恩)을 입었음에 옷을걸치고 밥을 먹음이 하나같이 주상(主上)의 은택이 아님이 없다. 게다가 고을을 맡은 사람은 분수상 당연히 그 땅을 지켜야하니, 삶은 나라와 함께 살아 놓고서 죽음은 나라와 함께 하지않아 경각이라도 구차히 살기를 도모한다면 심히 부끄러운 일일뿐더러 사람이 바라는 바와 싫어 하는바 중에는 이보다 더 중대한 것이 있다. 내가 이제 굳건하고 험준한 요새를 점거하여 힘을 다해 막다가 행여 하늘의 은덕을 입어 저들의 예봉을 꺽을수 있다면 기쁜일이려니와 만약 불행한 사태를 만난다면 오직 죽음이 있을뿐이다.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일신(一身)을 위해 죽는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고는 마침내 말에 올라 선구가 되어서 관아(官衙)의 식솔들을 되리고 사졸(士卒)들을 창도(唱導)하니 사람들 가운데 감격하여 기꺼이 달려오지 않는이가 없었다. 이에 영원성으로 짐을 이고 진 노약자들이 줄을이어 더위잡고 올라갔으며 경성(京城)에서 온 사람들도 서로 부축하고 이끌면서 나아가 불일간에 성안이 사람으로 가득찼다.
성은 사면이 모두 절벽이고 전면에 길이 하나 뚫려있어 반드시 꼬챙이에 꿰인 생선처럼 한줄로 올라가야 했으며 파놓은 참호와 쌓아놓은 성벽은 사람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룰수없을정도의 요새였다. 성안에는 양식과 무기를 비축해두는 한편 땔감을 쌓아놓고 우물을 쳐내어 여러달을 농성(籠城)할 준비를 갖추었으며 성밖에는 큰수레와 무거운 목책(木柵)을 밧줄로 묶어서 설치하고 돌을 실어 공중에 매달아두고서 적이오면 밧줄을 끊을 태세를 갖추었다.
게다가 성가퀴에는 강한 활과 독한 화살을 벌여 놓는 동시에 간간히 화총(火銃)을 섞어 놓고 밤낮없이 공이 몸소 순찰하니 , 그제야 성안의 사람들이 든든히 믿어 두려움이 없게 되었다. 당초에 공이 박씨(朴氏)성을 가진 경성의 장수와 약조하기를, “적이 원주로 오려면 반드시 가리현(可里峴)고개를 지나야 하는데, 이고개는 천연의 험한 요새라 말 두필이 나란히 가지 못하고 사람 둘이 어깨를 나란히 하여 다니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천명의 병력으로 그 길목을 막는다면 백만의 적이라도 날개가 없이는 지날수없을 터이니, 이렇게 하면 거의 적과 대등하게 버틸수 있을것이다. 그리고 만일 불리한 상태가 생기면 내가 미리 튼튼한 대비를 할수있을 것이니, 그대는 힘써주기 바란다.” 하였다. 그런데 막상 적이 처들어올 때 박씨는 졸개 한명을 보내 정탐하게 하고서 적이 멀리서 천천히 오고 있다는 그 졸개의 보고만 믿은채 안장을 풀고 갑옷을 벗고 시냇가에서 쉬고 있다가 뜻하지 않게 배후로부터 적의 기습을 받아 간신히 알몸으로 빠져 나왔으니, 아! 가리현의 요새를 그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날 적이 원주로 밀려들어오자 뭇사람들은 그 소문을 듣고 가리현이 함락된 일로 영원성을 걱정하였으나, 공은 동요하지 않고 오히려 말이 더욱 단호하고 명령이 더욱 엄하니, 사람들은 모두 공의 충의(忠義)에 감복하고 성(城)의 외로움을 걱정한 나머지, 심지어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며 밥을 삼키지 못하는 이들조차 있었다.
적들은 공이 성을 사수(死守)하리라는 것을 알고서 긴 장대에 글을 매달아 이익으로 유혹하기도 하고 위엄으로 협박하기도 하며 공을 굴복시키려 했다. 그러나 공이 허리의 칼을 뽑아 손수 적의 사자(使者)를 참수하고 다시 의자에 걸터앉음에 머리털이 곤두서고 어깨가 쫑긋 솟아 우뚝하기가 마치 무거운 산과 같으니 사람들이 모두 두렵고 떨려 감히 우러러보지 못하였다. 이튿날 적이 반드시 대거 침공해 올것임을 안 공은, 성앞 골짜기를 따라 5리 거리로 늘어선 다섯 봉우리에 초소를 두고 초소마다 측후병(測候兵)한명씩을 잠복시켜 적이 오면 즉시 작은 뿔피리를 불게 하였다. 날이 밝자 다섯 초소에서 뿔피리가 차례로 울리더니 창칼이 산을 뒤덮고 북소리가 땅을 울리며 적들이 밀려왔는데, 성밖에는 의지할 원군이라곤 개미 한마리 없고 성책을 지키는 사람은 오천명도 채안되어 천근의 무거운 쇠뇌를 한가닥 머리털로 당기는 격이라 그 형세가 도저히 비교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적들이 곧바로 유린해 들어오지 못한 것은 성안에 인화(人和)가 잘되고 대비가 엄하여 명령이 분명하고 위엄이 숙연하여 쉽사리 공략할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날이 저물무렵 적이 풀어놓은 결사대 수십명이 벼랑틈으로 잠입하여 성벽에 구멍을 뚫고 올라와 큰소리로 어지럽게 고함치면서 대군을 지휘하여 성을 넘어오게 하였다. 성이 이미 함락되었는데도 공은 여전히 전투복을 입고 호상(胡床)에 걸터앉은 채 내려오지 않고 활을 당겨 적을 쏘려하던 차에 적의 화살이 먼저 공을 맞히고 말았다. 공은 화살이 등에 꽃혔는데도 여전히 걸상에서 내려오지 않았고 다시 화살 한대를 맞고도 내려오지 않았다. 이에 적이 공을 핍박하여 내려와 절을 하게하자, 공은 상처가 심하여 의식이 없는듯한 상태에서도 끝내 무릎을 꿇지않고 입으로는 욕설을 계속하다가 결국 부인 및 한 아들과 함께 처형을 당하니 적들도 그 불굴의 기개를 의롭게 여겼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공을 포획한 것을 기뻐하여 공의 머리를 저들의 진영(陣營)으로 보냈다. 당시 성에 있다가 요행히 살아난 조생문벽(趙生文璧)이 공과 공의부인과 아들의 시신을 거두어 원주의 산기슭에 임시로 안장해 두었는데 지금도 그곳을 지나는 행인들은 눈물을 흘리지 않는이가 없다. 내가 당시 영동(嶺東)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의 전말을 자세히 들을수 있었다.
아아! 병화(兵火)가 일어난 이래로 성을 버리고서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몸을 깊이 숨기고 있다가 적이오면 달아나고 적이 물러가면 되돌아간 자들이 일일이 헤아릴수 조차 없을 정도이다. 그 사이에 혹 나라를 위해 죽었다고 불리는 이들도 있지만 장수의 자리를 맡아 진지(陣地)에 나아가 지휘함에 승패가 자기의 손에 달려있는 경우엔, 싸움에 패하면 으레 죽을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그리고 경솔한 생각으로 망녕되이 움직여 갑작스레 진격하기만 하고 상황을 고려할줄 몰라 곤경을 자초한 경우엔 죽지 않으려 해도 어쩔수 없는것이며 뜻밖에 변고를 당하여 황망히 위급한 상황에 처한 경우엔 나아가도 죽고, 물러나도 죽을것이니 오직 한번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평소 스스로 정력(定力)을 쌓아 창졸간의 변고에도 조용히 흔들리지 않고 시종 그 직분을 지키다 죽은 사람으로는 공 같은이가 있겠는가, 사관(史官)이 믿을만 하다면은, 반드시 “임진란(壬辰亂)에 우뚝이 죽음으로 절의를 지킨 이는 오직 원주목사 김 아무개 한사람 뿐이다.” 라고 쓰리라.
공의 휘(諱)는 제갑(悌甲)이요 자(字)는 순초(順初)인데, 얼굴이 희고 신장이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계축년 과거에 올라 두 조정에 걸쳐 벼슬 하였는데 대성(臺省)에 출입함에 안색을 엄숙히 하여 아부하지 않았고 항상 강직한 몸가짐을 견지 하였으며 지방수령이나 방백(方伯)으로 나가서는 임기를 마치고 돌아올 때 백성들의 칭송이 자자하였다.
순절(殉節)하였을때 향년이 예순여덟이었다. 한 아들 시헌(時獻)은 무자년 과거에 급제 하였는데 당시 이부랑(吏部郞)이 되어 어가를 호종하며 관서(關西)에 있었다. <아계유고(鵝溪遺稿)>
이산해 (李山海) [1539~1609] 조선 중기의 문신.정치 본관: 한산(韓山). 자 여수(汝受). 호 아계(鵝溪)·종남수옹(綜南睡翁). 시호 문충(文忠). 진사를 거쳐 1561년(명종 l6) 문과에 급제, 1578년(선조 11) 대사간에 이르러 서인(西人) 윤두수(尹斗壽) ·윤근수(尹根壽) 등의 죄를 탄핵하여 파직시켰다. 1590년 영의정에 올라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光國)공신에 책록되었고 이듬해 정철이 건저문제(建儲問題)를 일으키자 아들 경전(慶全)으로 하여금 정철(鄭澈)을 탄핵하게 하여 유배시켰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양사(兩司)로부터 국정(國政)을 그르치고 왜적(倭敵)을 들어오게 하였다는 죄목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 백의(白衣)로 평양에서 다시 탄핵을 받아 강원도에 귀양갔다가 돈령부영사(敦寧府領事)로 복관되고 대제학을 겸임하였다. 1600년 영의정에 재임(再任), 아성부원군(鵝城府院君)에 봉해졌다. 6세 때 글씨를 잘 써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고 서화(書畵)에 능하여 대자(大字)와 산수묵도(山水墨圖)에 뛰어났다. 조 때 문장 8가(文章八家)라 일컬었다. 조정에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으나 다시 북인(北人)에 속하였다가 마지막에는 대북(大北)의 영수가 되었다. 저서로 《아계유고(鵝溪遺稿)》가 있고, 글씨에 《조정암광조묘비(趙靜庵光祖墓碑)(용인)가 있다.
10) 난중의 시사총록(김제갑 조) (출전 : 연려실기술). (2003. 3. 17. 은회(익) 제공) ○ 왜적의 괴수 길성중륭(吉盛重隆)이 철령(鐵嶺)에서 길을 나누어 관동(關東)을 향하여 돌아오면서, 영서(嶺西)를 넘어 여러 고을을 짓밟고, 장차 원주(原州)를 핍박하려 하였다. 목사 깁제갑(金悌甲)은 부임한 지 겨우 1년이었는데 군졸을 모두 내어서 영원산성(鈴原山城)으로 들어갔다. 영원산성은 사면이 다 절벽이고 앞에 한 가닥 길만이 통해 있었다. 적은 글을 써서 장대에 걸고 항복하기를 달래면서 협박하였나, 제갑은 손수 그 사자를 베어 죽이고 아랫사람에게 명하여 적이 이르는 것을 기다려 태평소를 불게 하였다. 날이 밝자 다섯 곳에서 태평소가 일제히 알리므로, 보니 왜의 창과 칼날이 산을 덮고 북소리와 고함소리가 땅을 울리었다. 적군이 비탈을 타고 몰래 전진하여 성이 드디어 함락되었다. 적이 제갑을 협박하여 절하게 하였으나 제갑은 굽히지 않고 그 의처자와 함께 죽음을 당하였다. 제갑의 본관은 안동이었는데, 얼굴은 희고 키가 컸으며 말과 웃음이 적었다. 과거에 올라서 수령과 방백(方伯)을 지냈는데, 백성들에게 잊지 못할 은혜가 있었다. 《조야첨재》
10) <퇴계 문인록 기록내용> (2006. 12. 29. 태영(군) 제공) 의재(毅齋) 김제갑(金悌甲) 선조(宣祖)때의 문신(文臣)인 김제갑(金悌甲)의 자(字)는 순초(順初)요 호는 의재(毅齋)이며 본관이 안동(安東)이니 명종(明宗) 즉위 초에 일어난 을사사화(乙巳士禍)때 희생당한 명신(名臣) 김충갑(金忠甲)의 아우이다.
중종(中宗) 19年(1525년) 서울에서 출생한 그는 어려서 서울에서 공부를 하다가 19세때에 선향(先鄕)인 안동(安東)으로 내려와 퇴계선생(退溪先生)의 훈적(薰炙)를 받았으며 사마시(司馬試)를 거쳐서 29세 때인 명종(明宗) 8年(1553년)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여 관직(官職)에 나가게 되었다.
홍문관(弘文館)과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성균관(成均館)의 정자(正字), 수찬(修撰), 전적(典籍), 사서(司書), 직강(直講), 사성(司成)등 여러 관직을 거쳐서 원주목사(原州牧使)에 올랐던 의재(毅齋)는 선조(宣祖) 25年(1592년) 원주성(原州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순직하니 향년이 68세였다.
선조(宣祖)가 세자(世子)로 있을때, 왕자사전(王子師傳)을 역임한 바도 있는 그가 원주성을 지키다가 순절(殉節)했다는 소식이 조정(朝廷)에 알려지자 선조(宣祖)는 ‘일우고성만고삼강(一隅孤城萬古三綱)’이란 글을 내려 애도(哀悼)하고 충절(忠節)을 찬양하는 한편 영의정(領議政)의 증직과 문숙공(文肅公)의 시호를 내렸다.
그후 현종(顯宗)때에는 고려때 무신(武臣) 원충갑(元冲甲) 상장군(上將軍)과 함께 원주(原州) 충렬사(忠烈祠)에 제향 되었다.
출전: 퇴계문인록(退溪門人錄) (1983년 李熙大 編著)
11) <문숙공 의재 김제갑 에게 주는 시> (2007. 2. 11. 항용(제) 제공) 출전 : 知退堂集. 知退堂集卷之一 (이정형(李廷馨) 편저) 送晉牧金順初悌甲。次朴君沃啓賢韻。 漢北人愁臥。江南客倚樓。交情同萬里。離恨隔三秋。好善優爲魯。勝强要在柔。菁川一區勝。天遣?遊。與金同朝京。且時晉有豪石。難治之故云云。
* 이정형(李廷馨) (디지털 한국학 자료) 1549(명종 4)~1607(선조 4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또는 동각(東閣). 사직서령(社稷署令) 탕(宕)의 아들이며,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정암(廷#암26)의 아우이다. 정윤희(丁胤禧)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별시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여 평시서직장(平市署直長)이 되었다. 1570년(선조 3)형조좌랑․전적에 이어 이듬해 호조좌랑 겸 춘추관기사관․형조정랑을 거쳐, 1574년 사간원정언과 경성판관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사간원헌납과 예조정랑이 되고, 1576년 개성부경력이 되었는데, 전곡(錢#곡15)․사송(詞訟)의 처리를 잘하여 부민(府民)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1578년 하지사서장관(賀至使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장령․성균관사성․함경도순무어사․광주목사(廣州牧使)․홍문관부수찬․의정부검상․승정원좌부승지․대사성을 거쳐 1589년에는 형조참의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우승지로 왕을 호종하였다. 개성유수가 되었으나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병을 규합하여 성거산(聖居山)을 거점으로 왜적과 항전하였으며, 장단․삭녕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왜적을 물리쳐 그 공으로 경기도관찰사 겸 병마수군절도사가 되었다. 1593년 장례원판결사가 되고 다음해 고급사(告急使)로 요동(遼東)에 다녀와 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승문원부제조․비변사당상을 역임하고, 1595년 대사헌에 이어 4도도체찰부사(四道都體察副使)가 되었다. 1600년 강원도관찰사가 되었고, 1602년 예조참판이 되어 성절사(聖節使)로 다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뒤 북인이 정권을 잡고 정계가 어지러워지자 양주 송산 두천리(松山杜川里)로 퇴거하여 대사성․호조참판 등의 직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06년 삼척부사로 나갔다가 다음해 임지에서 죽었다. 성리학에 밝았고, 제자백가서(諸子百家書)․성력(星曆)․복서(卜筮)․술수(術數)에도 통달하였다. 이원익(李元翼)․이호민(李好民)․이수광(李#수51光) 등과 가깝게 지냈다. 1617년(광해군 9)에 춘천의 문암서원(文巖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 《동각잡기》․《황토기사》․《용사기사 龍蛇記事》․《수춘잡기 壽春雜記》․《지퇴당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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