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시양(金時讓)1581(선조14)∼1643(인조21)--(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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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충익공소개 및 연보

2. 각종 사진

3. 친필 서찰 소개

4. 각종 도서관소장 목록

5. 신도비

6. 묘비문

7. 주요자료 - 1) 하담김시양문집

2) 유배지 영해탐방기

3) 묘비 건립 고유제

4) 신도비 문화재지정

5) 신도비 탁본과 탐방기

8. 각종 문헌 기록 종합 - 1) 조선왕조실록

2) 성소부부고

 3) 한국문헌설화

 4) 기문총화

 5) 연려실기술

 6) 대동기문

 7) 해사록에서

 8) 조선조 청백리

 9) 국가종합서비스

10) 계곡선생집

11) 지봉선생집

12) 택당집

13) 약봉유고

14) 만운집

15) 다시 쓰는 택리지

16) 고산유고에서

17) 성옹유고에서

18) 충익공행장

 

본문

p11.png 1. 충익공 소개 및 연보 1581(선조14)∼1643(인조21)

조선의 문신. 초명은 시언(時言), 자는 자중(子中), 호는 하담(荷潭), 제학공(휘 익달) 후손으로 비안현감(比安縣監) 인갑(仁甲)의 아들. 1605년(선조38)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숭문원 정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주서를 거쳐 예조 좌랑으로 지제교를 겸하다가 1610년 동지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를 다녀왔다.  

 

1611년(광해군3) 전라도 도사(全羅道都事)가 되어 지방향시를 주관할 때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를 출제했다 하여 종성(鍾城)에 유배되었다가 1616년 영해(寧海)로 이배(移配) 되었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으로 풀려나와 예조정랑(禮曹正郞)·병조정랑·수찬 (修撰)·교리(校理)를 역임하였다. 이듬해(16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으로 활약, 난이 평정된 후 응교(應敎)로 문학(文 學)을 겸임, 이어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다.  

 

경상감사로 있을 때 경상좌도와 우도의 전결(田結)이 일치하지 않음을 상소하여 균일하게 정비하였으며,정묘호란(丁卯胡亂:1627) 후 서북 지방의 경비가 중요시 되자 1629년(인조7)에 특히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로 발탁되었다. 1631(인조9) 병조판서에 올라 팔도 도원수(八道都元帥)·사도 체찰사(四道 體察使) 등을 겸임하여 척화(斥和)를 주장했다.

 

그 후 강화 유수(江華留守)·호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634년(인조12)에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거쳐 호조판서, 세자좌부빈객, 강화유수를 거쳐 1641년(인조19)「선조실록(宣祖實錄)」을 개수(改修)할 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 겸 판춘추관사(判春秋館事)로서 이에 참여했다. 그러나 안질(眼疾)로 맹인(盲人)이 되었으므로 중도에 사직하였다. 경사(經史)에 밝았으며, 인조때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다. 1643년(인조 21)에 충주 하담리의 사제에서 별세하였다. 시호는 충익(忠翼), 회령(會寧)의 향사(鄕祠)에 제향(祭享)되었다. 숙종때(1691. 숙종 17년) 忠翼을 시호로 받았다.

 

저서:<忠翼公 荷潭先生 遺稿>(<부溪紀聞>, <荷潭破寂錄>, <紫海筆談> 등이 수록) 

그림 : 하담공의 그림 <高士彈琴圖>가 일본에 있다고 함. 출전-<한국서화가 인명사전> (2000. 한문영. 범우사. 2002. 10. 26. 주회(안) 제공)

 

<충익공 연보> (2000. 10. 항용(제) 작성 제공자)

 

* 1세. 선조14년. 1581 - 충북 괴산에서 출생하였다. 초명(初名)은 시언(時言)이며, 字는 자중(子中)이고 아호는 하담(荷潭)이다. 祖는 영상공 휘 석(錫-領相公)이며, 父는 비안공 휘 인갑(仁甲-比安縣監)이고, 母는 남양홍씨(南陽洪氏)이다. 6남 3녀 중 6남으로 태어났다. 1형은 무사(無嗣)하였고, 2형과 5형은 조졸(早卒)하였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영특하여 주위의 칭송이 자자하였으며 장래에 대한 기대가 지대하였다.

 

* 18세. 선조31년. 1598 - 경주이씨(慶州李氏)와 혼인 후 충북 제천으로 이사하였다.

 

*  25세. 선조38년. 1605 - 문과에 합격하여 홍문관(弘文館)에 들어갔다.

 

* 26세. 선조39년. 1606 - 가주서(假注書)가 되었다.

 

* 27세. 선조40년. 1607 - 여름에 승정원주서 겸춘추관기사관(承政院注書 兼 春秋館 記事官)이 되었다.  

 

* 28세. 선조41년. 1608 - 승문원 주서(承文院 注書)가 되었다.

 

* 29세. 광해 1년. 1609 - 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의랑지제교(義郞知製校)로 승진하였다가 갑자기 병조(兵曹)로 옮겨졌다.

 

* 30세. 광해 2년. 1610 - 8월, 동지사(冬至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중국 연경에 다녀왔다. 이때 역관들의 횡포(장사하는 일)를 철저히 막았다.

 

* 31세. 광해 3년. 1611 - 조정에 돌아와 <견문록(見聞錄)>을 아뢰었다.

 

* 32세. 광해 4년. 1612 - 서장관으로 중국에 다녀온 것에 대한 공으로 반숙마(半熟馬) 1필을 상으로 받았다. 전라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이때 지방 향시를 관장할 때 장시관(掌試官)으로서 임금을 비방하는 시제(試題)를 냈다 하여 의금부에 잡혀갔다. 금부에서는 극형에 처하기를 청하였으나 백사 이항복의 도움으로 감형되었다. 처음에는 전라도 영암으로 유배지가 정해졌으나 다시 함경도 종성으로 바뀌었다.

 

* 38세. 광해10년. 1618 - 영해로 유배지가 옮겨졌다. 이 유배기간에 공은 옛날의 전적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그곳은 육진(․주: 세종 때 김종서가 개척한 여섯 진. 북방의 국방 경비대)으로 文學으로 업을 삼는 이가 없었는데 공이 도착하자 많은 이가 배우러 와서 학문을 성취하였고, 그 이름이 조정에 등재된 자가 이때부터 계속 이어졌다. 후에 이곳 사람들은 공(公)이 몰(歿)하자 공(公)을 추모하기를 그치지  않아 공(公)을 현인(賢人)에 끼어 제사 지냈는데, 이는 조주(潮州․주: 지 금 중국의 廣東省潮安縣) 사람들이 한문공(韓文公)1)을 사당에 모셨던 것과 같은 도리였다고 한다.  

 

* 43세. 인조 1년. 1623 - 인조반정이 일어난 후 유배에서 풀려 예조․병조의 정랑이 되었다가 유장들이 추천하여 홍문관으로 올라갔다.  부수찬을 거쳐 수찬관(修撰官)이 되었고, 8월에는 의주부윤을 배명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9월에는 교리(校理)로서 암행어사가 되어 관북지방을 안찰(按察)하다가 순무사(巡撫使)까지 겸하였다.

 

* 44세. 인조 2년. 1624 -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오리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부찰사 이시발(李時發)과 더불어 반란을 진압하였다. 이로써 공은 이등공신(二等功臣)에 올랐고, 난이 평정된 후 교리로 돌아왔으며, 그 공으로 말 1필을 하사 받았다. 사간원(死諫院)의 헌납(獻納)을 거쳐 시독관(侍讀官)으로 중국사신  행차에 따라가는 상인들의 폐단을 아뢰어 바로잡게 하였다. 홍문관 교리를 거쳐 수은어사(搜銀御史)가 되었으며, 10월에 이조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吏曹佐郞 兼 春秋館 記事官)이 되었다.

 

* 45세. 인조 3년. 1625 - 7월에 이조정랑 겸춘추관기주관 교서관세자시강원사서(吏曹正郞 兼春秋館記注官 校書館世子侍講院司書)가 되었고, 12월에 홍문관응교 겸시강원문학(弘文館應敎 兼侍講院文學)에 올랐다.

 

* 46세. 인조 4년. 1626 - 사간원의 정언(正言)이 되어 대사간 정온의 잘못을 상소하였다. 이에 대사간 정온이 공의 파직을 요청하자 임금은 거부하였다. 그 후 사간원에서의 요청으로 인헌왕후 예장도청(仁獻王后 禮葬都廳)으로 직이 바뀌었다. 그 도청을 준공한 사유로 사도시정(司導寺正)에 통정 대부로 가계(加階) 되었다.  중국 명나라의 모문룡이 모반계획을 세우자 공을 평안도 관찰사로 위촉하자는 논의가 있었으나 임명되지 않았다.  이 해 6월에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으며, 표피(豹皮)와 궁전(弓箭-활과 화살)을 하사 받았다. 이 때 안동에 있는 중시조이신 충렬공(휘 方慶)의 묘역을 정비하고 상석을 마련하였다.

 

* 47세. 인조 5년. 1627 - 안동의 판관 혁파, 경상도내 전결 측량 불균등 문제, 왜와의 외교문제 등을 잘 해결하였다.

 

* 48세. 인조 6년. 1628 - 경상도내의 힘있는 이들에게 면역의 상을 내리는 불가함, 흉년으로 인한 감세요청 등을 처리하였다. 12월에 동부승지로 입궐하였다.

 

* 49세. 인조7년. 1629 - 1월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특진하여 평안도 관찰사 겸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었다. 중국으로 가는 사신의 행차시 사신들은 육로로 가고 종사원과 방물은 수로를 이용하도록(석다산까지 감) 하였다. 흉년으로 청천 이북에서 바치는 곡식 중 일부의 면제를 요청하였다. 청나라의 중남(仲男)이란 자가 평양에 들어와 온갖 공갈 협박을 하며 인삼 1천 7백 근을 요구하자 공이 관향(官餉)으로 비축해 둔 것을 주는 등 온건하게 대하였다.  농번기에 변방을 지키는 병사의 수를 줄여 주길 요청하여 임금의 윤허를 받았다. 명의 유흥치(劉興治)가 오랑캐와 내통하는 것에 대한 경계의 장계를 보냈고, 해서지방의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다.  가도에 주둔하고 있는 유흥치를 공격할 것을 요청하였다.  10월에 겸비국당상(兼備局堂上)으로 조정에 돌아왔다가 12월에 병조참판을 제수 받았다.

 

* 51세. 인조9년. 1631 - 4월에 병조판서에 오르고, 6월에 오랑캐 군사가 강을 건너와 곽산에 가득하므로 공을 겸 팔도도원수(八道都元帥)로 삼았다.  11월에 사도체찰사(四道體察使-함경,강원,황해,평안)가 되었다2)

 

* 52세. 인조10년. 1632 - 3월에 병조판서, 4도체찰사에 지경연판의금부사(知經筵判義禁府事-從一品)를 겸하였다.

 

* 53세. 인조11년. 1633 - 1월에 체찰사에서 병조로 돌아왔으며, 1월 6일 형조판서가 되었다.

2월 6일. 사도도원수(四道都元帥)가 되었다. 북도의 병마를 조발하여 전투에 대비하였다.

2월 9일. 임금이 상방검(尙方劍)과 내구마(內廐馬)를 하사하였다.  

2월 11일. 청나라 사신(所胡)의 과잉 요구에 ‘국교를 끊는다’는 임금의명을 받고 회답하러 가는 회답사(回答使) 김대건을 사사로이 의주에 머물게 하고 부원수 정충신과 연명하여 상소(국교를 끊으면 바로 전쟁이 일어나니 그들의 뜻을 들어 주자는 내용)를 올렸다. 이로 인해 임금의 노여움을 사 영월로 귀양갔다가 곧 공의 말이 옳음을 알고 6월에 곧 풀려났다.  

 

* 54세. 인조12년. 1634 - 1월에 서용(敍用)되어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한성판윤(漢城判尹)이 되었다. 경주부윤(慶州府尹)으로 옮겼다가 또  4월에 호조판서 겸동지춘추관사(戶曹判書 兼 同知 春秋館事)를, 8월에는 겸세자좌부빈객(兼世子左副賓客)이 되었다. 그런데 전 해 겨울부터 눈병을 앓아 눈이 잘 보이지 않게 되자 세 번이나 차를 올려 면직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9월에 병조판서 겸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부임한 지 10일만에 눈에 백태가 끼어 사직하고 충주 하담리(荷潭里)의 사제(私第)로 갔다.

 

* 55세. 인조13년. 1635 - 1월 강화도 유수로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였다.  7월에 사직(司直)으로서 양전(量田)의 결과에 대해 차자(공부(貢賦)의 균등하지 못한 것에 대한 지적)를 올려 바로 잡았다.  

 

* 56세. 인조14년. 1636 - 4월에 방납(防納)과 사천(私賤)제도 등 다섯가지 폐단에 대해 상소를 올렸다. 6월에 청백리에 녹선되었고(김상헌, 이안눌, 김덕함, 성하종과 함께), 숭록대부(崇祿大夫-종일품)에 가자(加資)되었다.   7월에 병이 위독하게 되자 상감은 고향집에 내의를 보내 간병하였다.   

 

* 57세. 인조15년. 1637 - 봄, 병자호란 후 임금이 환도하여 공을 세 번이나 불렀으나 병으로 인해 상소로써 사양하였다.   다시 간곡한 임금의 부름에 상경하니 임금은 공의 병 치료를 위해 내의를 보내고 약을 내리기도 하였다.   9월 어구마(御廐馬)를 임금으로부터 받았다.  10월에 상벌과 시비를 엄하게 할 것을 상소하였다.

 

* 58세. 인조16년. 1638 - 5월에 다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를 명했으나 병으로 사양하고 수개월을 객사에서 머물다가 돌아왔다.   그 후 선조실록을 개수하게 되었는데 여러 조정중신들이 공을 원하므로 임금은 公에게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에 춘추관사(春秋館事)를 겸하여 주었다. 그러나 공은 여러 번 상소로써 사양하다가 할 수 없이 부름에 응하여 상경하다가 여주에서 병이 중하여 상소를 올린 뒤 임금의 하답을 기다리지 못하고 충주의 집으로 돌아왔다.

 

* 63세. 인조21년. 1643 - 5월 4일. 충주 하담리(荷潭里)의 사제(私第)에서 별세하였다.   임금이 관곽(棺槨)과 조묘군(造墓軍)을 내려주었고, 8월 18일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일명 방아재) 자좌오향(子坐午向) 선영하에 안장하였다.  회령의 사당에 위패(金宇顒, 李潤雨와 함께)를 모셨다. 숙종 7년 8월에 김상헌, 조석윤, 정온을 제사지내는 서원 안에 공의 위패를 모시고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숙종 16년 5. 13. 우의정 김덕원(金德遠)이 심희수(沈喜壽)와 함께 시호를 내릴 것을 청하였다.(공은 자손들에게 시호를 청하지 말도록 유언하여 청하지 않고 있었음).숙종 17년 7. 21. 충익(忠翼)의 시호를 받았다.  

 

저  서 : <忠翼公荷潭先生遺稿>八卷 - 부계기문(涪溪紀聞), 자해필담(紫海筆談),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소차(疏箚), 각종 한문체의 글, 각종의 시(詩), 임자일기(壬子日記), 유사(遺事), 신도비명(神道碑銘)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것은 1670년(현종 11) 경에 공의 아들인 판서공(휘 徽)이 공의 글들을 편집하여 제작한 것으로 추정한다.  친필 유품인 <荷潭雜記>가 중앙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유  물 : 관띠 1점(1631년 인조 9. 병조판서 배명시 임금으로부터 하사 받은 것)

신도비 :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에 있다.

위패 봉안 : 충북 괴산군 괴산읍 수진리 <世德祠>에 봉안돼 있다

        (향사일-매년 음력 10월 10일 이후 첫째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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