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시양(金時讓)1581(선조14)∼1643(인조21)--(제)

(목록 제목을 선택하시면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1. 충익공소개 및 연보

2. 각종 사진

3. 친필 서찰 소개

4. 각종 도서관소장 목록

5. 신도비

6. 묘비문

7. 주요자료 - 1) 하담김시양문집

2) 유배지 영해탐방기

3) 묘비 건립 고유제

4) 신도비 문화재지정

5) 신도비 탁본과 탐방기

8. 각종 문헌 기록 종합 - 1) 조선왕조실록

2) 성소부부고

 3) 한국문헌설화

 4) 기문총화

 5) 연려실기술

 6) 대동기문

 7) 해사록에서

 8) 조선조 청백리

 9) 국가종합서비스

10) 계곡선생집

11) 지봉선생집

12) 택당집

13) 약봉유고

14) 만운집

15) 다시 쓰는 택리지

16) 고산유고에서

17) 성옹유고에서

18) 충익공행장

 

본문

p11.png 7. 주요자료

3) 충익공 묘비 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 거행 (06. 4. 18. 항용(제) 제공)

 

1. 일시 : 2006. 4. 15--4 16

2. 장소 : 1)충북 제천시 봉양면 삼거리 및 마곡리

             2)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3. 내용  

   가. 제천의 도사공(휘 秋萬), 밀양공(휘 鳳旨)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봉행

   나. 괴산의 충익공(휘 時讓), 합천공(휘 곡), 사휴제공(휘 徽)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제막식 거행

4. 참석자  

   가. 4. 15. 제천 봉양면 행사 : 약 15명(상천, 상옥, 영회, 두응, 찬응, 정응, 성응, 대응, 규동, 규원, 국진, 항용, 원용 등)

   나. 4. 16. 괴산 능촌리 행사 : 약 60여 명

     1)괴산 : 학응, 택응(제,참봉공파), 태섭, 태석(제,구암공파), 태옥(제,구암공파), 규원(제,참봉공파), 영수(제,문숙공파), 용두(제,통덕랑공파)--8

     2)서울 : 상석, 두응, 문응, 찬응, 정응, 규태(제,구암공파), 항용-7

     3)청주 : 영묵(제,생원공파), 영회, 규환(제,구암공파), 규진, 규동, 규성, 태진, 대용(가족4)-12

     4)제천 : 상천, 대응, 국진-3

     5)병천 : 재철, 남응, 천응, 유응-4  

     6)제주 : 익수(보명-태익)-1

     7)안사연 : 주회(안, 청주), 태영(군, 서울)-2

     8)기타 : 상천내자 외 3인,   

      * ( )외는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종친

5. 주관 : 안동김씨 제학공파 비안공 문중회 (행사 기획 및 추진-김항용)

 

<4월 15일>

1년 전부터 준비해 왔던 행사가 드디어 시작됐다. 1주 전부터 마음을 졸였던 날씨는 다행히 좋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었다. 하늘과 조상님들의 도우심으로 여겼다.  제주의 익수아저씨께서는 이번 행사에 참여하시기 위해 15일(토)에 서울로 오신다고 기별이 왔다. 감사했다.  아침 10시경에 찬응대부께서 차를 몰고 두응대부님을 모시고 나의 직장 정문으로 오셨다. 동승하여 제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주말 휴가차량으로 벌써 많이 밀렸다. 오후 1시 20분에야 봉양면 마곡리에 도착했다. 약 15명의 종친들이 있었다.  

 

삼거리의 밀양공(휘 봉지-1649(인조27)∼1713(숙종39))의 묘소는 이미 묘역 정비 작업과 고유제까지 마쳤고, 도사공(휘 추만-1629(인조7)∼1671(현종12) ) 묘소의 작업도 반쯤에 이르렀다. 새롭게 만나는 종친들과 반갑게 인사 를 나눴다. 곧 중식 시간이었다. 시장했던 터라 재실처럼 사용하는 집(상옥종친 거주, 약 3000여 평의 도사공 위토 내에 있음) 마루에 앉아 상천 대모님께서 준비하신 소머리 국밥을 먹었다. 그야말로 일미였다.   

 

도사공 묘소에는 사초를 겸하여 묘비를 건립하였다. 묘역도 매우 컸다. 마치 의금부도사의 위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좌우의 문관석은 유난히 웅장했다. 묘 앞 발치에는 작은 두 기의 묘소가 있다. 상천대부님께선 ‘마부로 일하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고 전설을 말씀하신다. 작업이 끝나고 고유제를 올렸다.

 

* 초헌관-상천, 아헌관-규영, 종헌관-규원, 좌집사-규동, 우집사-성응, 독축-항용, 집례-항용

 

이어 참예하지 못한 밀양공(휘 봉지)의 묘소로 향했다. 불과 5분 만에 차량으로 도착하여 오르는 산길은 포크레인 덕에 좋은 길이 되었다. 산 언덕마루 부근에 새로 단장한 묘역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특히 전망은 참으로 좋았다. 이곳엔 사초를 겸하여 묘비, 상석, 망주석을 세웠다. 약 300년 동안 너무나 쓸쓸했던 묘역이었다. 선조님의 영혼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니, 보고 있는 내가 더욱 자랑스럽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오후 5시 30분, 내일의 행사 전반을 재점검하고 서울로 행했다. 여주휴게소에서 저녁을 먹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은 나는 듯 했다. 중부고속도로 3터널 직전 좌측에 보이는 아름다운 모선재를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서운관정공파 선조님들과 허난설헌 할머님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지난 4월 2일 준공했던 이야기도 겸했다. 모두 새롭고 신기한 눈으로 바라 보셨다. 감탄과 함께 자긍심이 저절로 생겨진다는 말씀과 시간을 내어 꼭 한번 들르시겠다고 하신다.

 

입경한 후 곧 시내 남대문 시장으로 향했다. 내일 먹을 음식(침채, 전류, 편육 등)을 장만하기 위해서다. 마침 근처에 매장(블랙박스)을 갖고 계신 찬응대부님의 안내로 일은 쉽게 끝났다. 내일의 행사 전반 과정에 대해서도 최종 점검했다. 이때, 서울에 도착하시어 아드님댁에 계신 익수아저씨께도 전화하여 내일의 만남을 약속했다.

 

<4월 16일>

 

행사 걱정인지 밤새 부는 바람 소리 때문인지 잠을 설치고 일어나니 5시이다. 7시에 만남 장소인 잠실 종합운동장에서 익수아저씨, 규태아저씨, 태영아저씨(군, 안사연)를 만나 곧바로 올림픽도로를 따라 중부,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중부 내륙고속도로를 달린다. 시원하게 뚫린 도로 옆으로는 벚꽃, 진달래꽃, 개나리꽃, 목련꽃들로 온 산야를 수놓고 있다. 일행은 줄곧 문중 역사 이야기, 새로 경매받은 <약제집>의 ‘지인록’에 실려 있는 선조님(시양, 휘, 소)과 여러 명인들의 이야기, 선배수간 등에 대한 이야기로 심심할 시간이 없다.  

 

괴산에 도착하니 8시 40분, 불과 1시간 20분 만이다. 세덕사에 들러 사당에 참배하고 몇 가지 짐을 챙겨 능촌리로 향한다. 가는 도중 4군데에 도로표지도 설치했다. 능촌리 현지에 도착하니 충익공(휘 시양)의 묘소에서는 묘비 건립 공사가 한창이다.  

 

우선 지난 4월 5일 묘역을 정비하고 고유제를 올린 선조님들께 참배하기 위해 개향산에 올랐다. 산을 오르는 59계단의 새 계단길은 멋과 위용이 배어 있다. 우리 제학공파의 대표적 선조님들이 모셔져 있는 곳이다. 묘역에 오르자 아! 하는 감탄사부터 나온다. 이것은 묘역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박물관이요 공원이었다.

 

 * 이 미륵불상은 옛날부터 본 능촌리 마을에서 강쪽으로 나가다가 우회전하여 강변을 따라 가다가 있는  독족골(현 쓰레기 종합 처리장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약 50년전에 이 미륵은 반쯤 쓰러져 있었으며나무로 된 갓도 씌워져 있었음. 그래서 무당들을 불러 굿을 하며 미륵이 일어나길 기원하기도 함. 만든 사람과 시기는 미상이나 약 300녀전의 것으로 추정함. 그런데 1988년경 도난을 당하자 주민들이 경찰에 이를 신고했고, 곧 경북 포항의 비치호텔(대표 김진규)에서  발견되어 다시 이곳으로 옮겨와 세운 것이다. 현재 마을의 신준식씨(75세)가  정성으로 관리하고 있음. 아직 공식적이고 연례적인 행사는 없음. 마을의 수호신 역할을 하고 있는 이 불상은 앞으로 문화재로 지정 받아 이 마을 관광자원으로 삼을 계획이다 한다.

 

    (2006. 5. 마을인 김태석, 김태옥 담)

 

ankim02-6-64z41.jpg

<개향산 묘역 전경>

 

산 능선 전체에 총 22위를 모셨다. 4위는 현지에 있었고 18위는 이번에 새로 옮겼다. 공사와 고유제 소식만 들었지 평일의 행사실시로 인해 미처 와 보지 못했다공. 3월 15일부터 약 20일간 이곳 능촌리의 일가 여러분들이 약 6700여 만원의 종중비(능촌리 산 28-1번지, 임야 41334㎡. 2004. 12. 13.안동김씨 능촌종중명  매각금 1억 2천만원)로 이룩한 것이다.

 

맨 위에는 지난 3월 15일 경기도 시흥시 소래산에서 이곳으로 옮겨 오신 참판공(휘 彦묵)선조님 내외분께서 계신다. 약 500년간 시흥(참판공)과 이곳 괴산(배위 의성김씨할머니)에 두 분은 떨어져 계셨다. 원형 둘레석에 앞에는 원래의 작은 묘비석(참판공)과 큰 묘비석(배위)이 나란히 있고 좌우에는 역시 한 쌍씩의 문관석이 있다.  

 

ankim02-6-64z42.jpg

<맨 위의 참판공(휘 언묵) 묘소>

 

ankim02-6-64z43.jpg   ankim02-6-64z44.jpg

<의성김씨 할머님 묘비 후면-'崇禎後 四 壬子 十一月  日'이라 기록됨>

 

제 2단에는 맨 좌측에 영상공(휘 錫)이 모셔져 있다. 원래는 내외분이 쌍분으로 되어 있었는데 이번에 합분을 했다. 배위이신 행주기씨할머님의 묘소를 파니 물이 많이 고여 있었다 한다. 이번의 공사로 편히 모시게 되어 모두들 기분 좋아 했다.  

 

ankim02-6-64z45.jpg

<2단 첫째의 영상공(휘 석) 묘소>

 

영상공 우측으로는 장자이신 구암공 묘소가 있다. 벌써 두 번째 이장이다. 최초는 충주시 살미면 무릉리에서 77년 경 충주호 건설로 능촌리 충민사 뒤로 옮겼다가 이번에 다시 이장되었다. 사각의 둘레석을 했고 앞에는 약 8자비 정도의 크고 웅장한 신도비를 그대로 이곳으로 옮겼다. 그 우측으로는 역시 지난 3월 15일 참판공과 함께 시흥에서 이곳으로 이장된 현감공(휘 孝甲)의 묘소가 사각의 둘레석으로 모셔져 있고 그 우측으로는 영상공의 묘비 중건비가 서 있다.  

 

ankim02-6-64z46.jpg

<2단 둘째의 구암공(휘 충갑) 묘소> (전에 있던 신도비를 우선 묘소 앞으로 모셨다)

 

ankim02-6-64z47.jpg

<맨 우측의 현감공(휘 효갑) 묘소> (지난 3월 15일 시흥 소래산에서 이장했다)

 

제 3단에는 원래부터 있던 비안공(휘 仁甲) 선조님의 묘소가 있고,

 

ankim02-6-64z48.jpg

<제3단의 비안공(휘 인갑) 묘소>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다)

 

제 4단에는 부평공(휘 時晦, 구암공 장자), 송화공(휘 緯), 안흥군(휘 緻-가묘)이, 제 5단에는 송화공(휘 得宗), 안풍군(휘 得臣-가묘), 화은군(휘 天柱-가묘)가, 제 6단에는 참판공(휘 天挺), 동은군(휘 可敎), 연천공(휘 可行)이 있다. 각 묘소는 사각의 둘레석으로 장식했고 새로 만든 와비가 일정하게 배열되어 있었으며 사초를 하고 주위의 나무도 말끔하게 정리하여 매우 깨끗하였다. 전엔 좀 어수 했는데 이제는 누가 방문해도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한참 묘역을 보고 있는데 주회대부님께서 오신다. 이렇게 반가울 수가 있으랴, 휴일에 쉬지도 않고 찾아 주시는 이 분들, 그 놀라운 정성에 감탄을 금하지 않을 수 없다. 주회대부임, 익수, 태영 아저씨께 간단한 해설을 하면서  맨 위의 참판공부터 아래로 오면서 참배를 했다.

 

ankim02-6-64z49.jpg

<기념촬영-좌로부터 주회, 항용, 태영, 규태, 익수>

 

부듯한 맘을 안고 묘역을 내려와 충익공 신도비 앞을 지나 충익공 묘소로 향했다. 이제부터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된다. 안사연 두 분과 익수아저씨, 영회대부님께는 취묵당을 다녀오시도록 하고 나는 행사 마지막 점검에 바빴다.  

10 30분, 충익공과 합천공 묘소의 작업이 끝났다. 충익공 묘소에는 6자 반의 비석이 거북좌대 위에 서서 이수를 받치고 서 있다. 종1품 숭록대부 판중추부사, 청백리, 시호 충익의 위용이 웅장했다. 그리고 장명등이 새로 섰다. 이를 만들기 위해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날을 준비해 왔던가! 두응회장님이 찬한 것을 익수아저씨와 내가 수십 번을 바꾸어 갈고 다듬은 묘비문이다. 전면 글씨는 충익공의 후손으로 서예가인 문응종친이 썼다. 예서체의 글씨는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11시가 되자 참석자들도 점점 많아졌다. 괴산, 청주, 병천, 제천의 일가들이 속속 찾아 오셨다. 입구의 접수대에서는 방명록 기재와 함께 행사 안내문을 나눠주어 오늘 전 일정에 대한 안내를 대신하게 했다.  

 

먼저 행사일정에 대한 기초 안내에 이어 고유제 제례를 위한 안내말씀을 전했고 고유제 분방기를 발표했다. 헌관과 집사들만 제복을 입도록 준비했으며 축문과 약식홀기는 국문으로 마련했음도 알렸다.  

 

초헌관-두응(비안공문중회장), 아헌관-태섭(비안공문중고문), 종헌관-학응(문영공종중회장), 축관-항용(비안공문중 총무), 좌집사-규동(충익공문중 총무), 우집사-규성, 집례-남응(제학공파부회장, 전 병천종약소장)

 

집례이신 남응대부님의 의식 진행에 따라 고유제는 엄숙하고 경건하며 일호의 흩어짐 없이 진행되었다.  

 

약 30분간의 고유제를 마치고 이어 그 자리에서 제막식을 거행하였다. 항용의 사회로 시작되었다. 식순에 따라 <경과보고(두응 비안공문중회장), 감사패 수여(받는자-두응, 항용), 회장(상천 묘비건립 추진회장)인사, 축사(태섭, 학응, 영묵, 남응), 결산보고, 선조님 소개>로 진행되었다.  곧 이어 바로 아래에 있는 합천공의 묘소로 이동하여 고유제를 올렸다.  

 

초헌관-상춘, 아헌관-영묵(제학공파종회장), 종헌관-익수(제주 문화재위원), 축관과 집사 및 집례는 전과 같았다. 약 20여 분이 지났다. 곧 기념촬영을 하고는 능촌리 마을의 제각으로 이동하여 중식에 들어갔다.  

 

식사는 추진회장님이신 상천대부님댁에서 준비했다. 대모님과 세 분의 일가 아주머님들, 또 아드님인 대응대부님이 많은 고생을 하셨다. 고맙게도 능촌리의 태옥총무님 아주머님이 돕고 있었다. 문중의 각종 행사 때가 되면 어느 곳이든 매번 찾아 주시는 괴산군 사리면의 용두종친님에게 건배 제창을 부탁드리니 서로 권하는 반주에 온 일가들은 점점 하나가 되어 갔다.

 

약 1시간 반 가량 진행되는 중식시간에는 전 참석종친들의 인사 소개가 있었다. 먼 곳 제주에서 오신 익수아저씨에게는 모두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또한 안사연의 태영종친(군)과 주회종친(안)이 소개되고 그 분들의 눈부신 활동 내용들을 소개하자 큰 박수가 터져 나왔다.  

 

오후 2시 20분, 전 종친은 능촌리 마을 뒤쪽의 문숙공(휘 제갑)파 제각으로 갔다. 이곳에는 문숙공(휘 제갑) 이하 약 10여 위의 선조님들 위패가 모셔져 있다. 약간의 향촉대를 올리고 합동으로 참배했다. 문숙공께선 원주목사로서 임란때 원주산성에서 부인과 아들과 함께 장렬히 전사하신 분이시다. 어찌 머리가 숙여지지 않으랴!

 

이어 바로 위에 있는 사휴제공 묘소로 향했다. 이미 모든 공사는 끝나가고 있었다. 괴산의 삼화석재 김사장님은 점심도 거르고 작업에 매달려 있었다. 그저 감사하고 고맙기만 했다.  고유제를 정성으로 올렸다. 이 묘비의 비문은 부끄럽게도 내가 썼다. 먼 훗날 혹시 욕은 되지 않을지 두렵기만 하다. 안사연의 태영(군사공파)종친께 종헌관의 분방결정이 내려졌다. 감사했다.  

 

*초헌관-상천, 아헌관-영수(제, 문숙공파), 종헌관-태영(군사공파), 축관-항용, 집례-영묵(제, 제학공파회장), 좌집사-규동, 우집사-규성

 

고유제를 올린 일행은 마지막 남은 작업을 해야 했다. 충익공 신도비 해설판 건립공사다. 개향산 아래로 이동하여 충익공 신도비 우측에 해설판을 세웠다. 해설판은 스테인레스 스틸로 제작했다. 해설판 크기는 120Cm×80Cm이며 전체 높이는 지상에서 약 190Cm이다. 서울 종로 3가에서 50만원으로 제작하였다. 내용은 본인이 편집하였다. 10년 쯤 후에 해설판 부식부분의 검은색이 떨어지면 분리하여 다시 색을 입힐 수 있도록 임의 탈착형식으로 제작하였다. 세우고 나니 이렇게 기분 좋을 수 없다. 신도비가 더욱 돋보인다. 오래 전부터 해설판이 없어 몹시 아쉬워했던 일이다. 여러 번 관청에 부탁했으나 무효로 끝났던 일이기도 했다.  이제 이 신도비를 문화재로 등록하기 위해 문화재청과 충북도청에 공문을 보내고 민원을 넣을 계획이다. 이때 이울러 문숙공(휘 제갑)께 내린 정려문 현판에 대한 문화재청의 적극적인 현양과 보호대책도 함께 요청을 하겠다. 모두 모여 기념촬영도 했다.

 

모든 행사가 종료 되었다. 다시 능촌리 제각에 모여 간단한 평가회를 마치고 오후 5시에 해산하였다. 84세의 아버님께 인사 올리고 뒤돌아 서울로 올라오는 불효자의 맘은 천추에 없는 죄인이었다.  

 

일요일 상경길은 다소 밀렸으나 그래도 달릴 만했다. 7시에 서울에 도착하여 태영아저씨와 함께 서울시 송파구 가락동 한 음식점에서 저녁을 겸해서 익수아저씨로부터 많은 공부를 하는 기회를 가졌다. 언제나 다정하고 박학하시며 도덕과 겸양이 넘치시는 익수아저씨의 구수하고도 그칠 줄 모르는 소 학술발표는 9시를 훨씬 넘기고 나서야 일어설 수 있었다.  

 

익수아저씨를 숙소이신 반포의 아드님 집까지 모셔다 드리고 개포동으로 돌아오니 밤 10시가 넘는다. 아! 오늘처럼 보람 있는 날이 내 생애에 앞으로 계속 이어져야 할텐데--   눈이 감긴다. 내일 태양은 더욱 빛날 것이다. (끝)

 

 

 

 

 

b001.j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