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2) 성소부부고에서 (2003. 5. 30. 항용(제) 제공) <하담 金時讓(제)이 북경의 사신(서장관)으로 갈 때 교산 허균이 전송하며 보낸 글> 가) 출전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허균 저) 제5권. 문부 2. 文部二 - 서 序 나) 인터넷 인용사이트 : 한국역사정보 통합시스템
북경(北京)에 가는 김자중(金子中)을 전송한 서 삼가 생각건대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김에 공경히 제후의 법도를 지키니, 그 조근(朝覲)ㆍ빙향(聘享)ㆍ진청(陳請)ㆍ위사(慰謝)의 즈음에 또 성의와 예절을 다하고 공경과 삼감을 극진히 한 것이 대개 2백여 년이지만 곧 하루같이 하였다.
그 봉명하는 신하도 반드시 유신(儒臣) 중에서 재식이 출중하고 문에 해박하고 예에 통달하고 또 장고(掌故)를 잘 아는 자를 뽑아서 임명해야만 임금의 뜻을 인도하여 드날리고 사신의 직을 잘 닦아서 정하게 가린 뜻을 저버리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조종 이래로 유독 이 선발만은 가장 중히 여겼으니, 그 취지를 대개 징험할 수 있겠다.
사신의 아래에 서장관을 두고 겸하여 헌전(憲篆)을 관장하게 하여 일행의 불법을 규탄하게 하였으므로 나라의 제도를 따르지 아니할 경우에는 비록 상사(上使)라도 또한 탄핵을 허여하여 피하지 않았으니, 그 선발이 사신을 선발함에 비하여 경중이 없으며 사람들이 무서워하고 꺼리는 것은 사신보다 한 등을 더한다고 한다.
나는 들으니 선릉(宣陵) 때에 정승 윤사분(尹士昐)이 있었는데 정희후(貞熹后)의 아우였다. 등극을 하례하고 돌아오는데 사사로이 재화를 가지고 온 것이 매우 많았다. 서장관(書狀官) 권공 경우(權公景祐)가 강상(江上)에 이르러 그 장물(贓物)을 적발하니 강정대왕(康靖大王 성종)이 불러서 청실(請室 궁중에서 대죄(待罪)하는 법으로 죄를 청하고 기다리던 곳)에 내려 장차 율(律)로써 죄주려 하자 사분(士昐)은 근심과 두려움으로 옥중에서 죽었다. 경우(景祐)는, 이미 종실이나 가까운 대신이라 하여 그를 용서하지 않았고, 강정왕도 끝내 후(后)의 동생이라는 친(親)이라 하여 두둔해주지 않았고, 후(后) 역시 관유(寬宥)를 빌 곳도 없었으니 선왕의 법을 지킴이 견고하다 하겠으며, 경우가 권척을 두려워 않음도 숭상할 만하다. 임금과 신하가 모두 다 이와 같다면 국가가 어찌 다스려지지 않음을 염려할 것인가?
근세의 사대부들이 법을 지키기에 조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의 의논이 너무나도 좁아 터럭만한 과실도 가리기 어려워서 불행히 법에 얽혀 든 자도 있는가 하면 또한 빠져 나가는 자도 많았으니, 아, 어떻게 상하가 법을 바르게 지키고 아부하지 않기를 선릉(宣陵) 시절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나의 벗 김군 자중(子中)은 천하의 선비다. 두루 듣고 많이 기억해서 문조(文藻)가 풍부하므로 약관(弱冠)에 과거에 올라 화려한 벼슬을 다 지냈다. 그는 몸 단속을 법도로써 하여 반드시 예전 어진이로써 스승을 삼았고, 공사(公事)를 받들고 법을 집행함은 한결같이 정직에서부터 나오고 강자에게 흔들리는 바 되지 않았다. 위풍이 늠름하여 야비하고 포악한 자들이 마음을 고치게 되었으니 진실로 좌우에 두어서 잘못을 보필하고 사특을 규탄할 만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모두 간신(諫臣)이 되지 않으면 반드시 대관(臺官)이 되리라 여겼었다. 그런데도 서둘러 끌어내어 하지사(賀至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삼았었으니, 중론(衆論)이 자못 불만스럽다 여겼으나, 자중(子中)은 좋게 여겨 만리에 장쾌한 노닒을 하게 되었으니 소원에 들어맞았음을 매우 기뻐한다 했다.
나는 여기에서 자중의 깊은 도량이 한 번 쓰이고 버림받는 사이에서 기뻐하거나 슬퍼하지 않아서 보통 사람보다 큼을 알게 되었다. 전형(銓衡)의 추택(推擇)과 주상의 발탁해 씀이 어찌 그 봄이 없었겠는가? 대개 위아래가 법을 유지하고 바름을 지켜, 사정에 끌리지 않는 것이 선릉(宣陵) 시절과 같고자 함이다. 자중은 포부가 본디 무거우니 또 즐겨 손순(巽順)히 참으며 말없이 구차히 넘겨서 조정의 선발한 바람을 저버리겠는가? 그 지경이라면 권공이 또한 사람들이 너무 적적하다고 비웃을 것이니, 자중은 힘쓸진저. 지금 이 행차에 있어 상사는 후덕하고 달식하여 족히 유아(儒雅)로서 진무(鎭撫)할 만하며 부사 역시 재능으로 자부하는 처지니, 자중의 풍력과 강개로써 협심하여 서로 도와 사신의 직책의 성공을 꾀한다면 오 나라 계찰(季札)이 주 나라에 간 것과 정(鄭) 나라 자산(子産)이 빙문(聘問)한 것과 시대는 다르나 일만은 똑같이 들어맞을 수 있을 것이니, 위대하지 아니한가?
자중은 힘쓸지어다. 그 행차에 있어 자중이 한 말로 보내줄 것을 요청하기로, 이를 써주며 경계하는 바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