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학공파(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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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p02.png 36) 김가행(金可行)

               1654(효종11)∼1731(영조7)

 

字는 敬夫, 栢谷 金得臣의 孫子이며 金天揆의 아들이다. 1711년(숙종 37)에 漣川縣監이 되어 청렴하게 善治하니 관찰사가 임금께 아뢰고 邑民이 生祠堂을 세워 칭송하였으며, 1728년(영조 4) 楊致道의 亂때 宗廟署 令으로 從軍하여 楊武 1等勳에 錄選되었다. 그의 影幀은 괴산읍 능촌리 影幀閣에 奉安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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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향상 신 묘원의 묘소와 묘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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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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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각 입구의 안내 표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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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정>(제작연대와 화가는 미상. 2002. 5. 19. 항용 촬영)    <얼굴부분 확대>

 

이 영정은 조선 숙종 37년(1711)에 연천현감(漣川縣監)을 지낸 김가행(1654-1731)의 것으로 제작연대와 화가근 미상이다.

김가행은 숙종 37년(1711) 연천현감이 되어 청렴하게 다스리니 관찰사가 포계(褒啓)하였고, 영조 4년(1728)종묘서령(宗廟誓令)으로 종군하여 양무1등훈(揚武1等勳)에 록선(錄選)되었다. 영정은 오사모단령(烏紗帽團領)의 정장관복본으로 왼쪽 얼굴이 7푼쯤 보이는 팔장을 낀 전신교의좌상(全身交椅坐像)이다. 크기는 가로 99cm, 세로 165cm의 설채견본(設彩絹本)이다.  얼굴은 좌안 7분면이나 신체는 정면을 향하고 있어 전체적인 구도가 맞지않고, 몇몇 부분에 덧칠을 하였으나 매끄럽지 못하다.  현재 김가행이 연천현감을 지낸것에서 연유하여 연천사(漣川祠)라 이름한 사당에 보존되어 있다. 영정각은 정면 2칸, 측면 1칸반의 목조기와집으로 일각대문을 세우고 담장을 둘렀으며, 대문 앞에 1996년에 세운비가 있다.

(영정 및 영정각 해설문 출전 : 괴산군청 홈페이지)

 

<연천공 교지 촬영> (2006. 2. 19. 항용(제) 촬영)

  *교지 소유자 : 김인응, 김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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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 도사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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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금부도사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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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참봉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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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천현감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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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별제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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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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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예원 사평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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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열대부 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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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참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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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서별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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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 기록서>

 

  * <연천공(휘 可行)의 子인 한창의 교지>  (2006. 2. 19. 항용(제) 촬영 제공)

金漢昌 1684(숙종10). 11. 9--1742(영조18). 1. 27.

자는 道卿, 호는 趾默堂, 향년 59세. 묘는 괴산읍 능촌리 영상공(휘 錫) 묘 옆에 있다. 유고문(遺稿文)으로 참판 이제화(李齊華)가 찬한 행장이 있다.  

가계 : 時敏-緻-得臣-天柱-3子 可行-漢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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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덕랑(정5품)에 명하는 교지>

 

*<김가근 효성 관련 자료> (2007. 4. 21. 항용(제) 제공)

*가계 : 제학공(휘 益達)의 6대손 영상공(휘 錫)-忠甲-時晦-緯-得宗-天挺-(二子)可近

출전 : <사이버 충효 체험관>  http://www.chunghyo.net/

이름 : 김가근(金可近)     지역 : 서산시   

출생·사망 : 1688~1740   

구분 :효자   

시대 : 조선(충청도)   

내용 : 증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충부 부총관 행정충장군 첨지중추부사 김가근.

         영조 50년 갑오에 명정되었다. 김가근의 조부는 제학공의 15세손으로 본관은 안동이오 휘는 득신이고 호는 백곡이다.  

1604년(선조37)생으로 38세에 진사가 되고 58세때 문과에 급제하여 등과해서 가선대부에 올라 안풍군에 봉해졌다. 그 손자가 바로 김가근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할아버지를 모시었는데 할아버지가 노환으로 계실 때 곁에서 병간을 하던 중 갑자기 수 십 명의 화적이 들이 닥쳐와서 할아버지께 공갈 협박하였다. 이에 노복들은 도망하고 나이 어린 손자인 김가근만이 묵판으로 할아버지의 위급을 가려 드리며 병환에 계신 할아버지께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부르짖으며

 

  "아저씨들도 인간적으로 생각해보시오. 이럴 수가 있소"

하니까 화적들은    "이놈 보게, 잘못하면 너도 죽는다."

하였다. 그는 또    "우리 할아버지를 당신들이 구해 드릴 수 없소?. 할아버지께서 무슨 잘못   이 있으십니까? 당신들에게 해 끼치신 일이 있나요? 아무런 죄가 없지 않   소?"   의연한 태도로 무서움도 생사도 가리지 않고 서슴지 않으며  

  "할아버지의 노환과 장병에 돈이 어디 남아 있겠소!"

하니 어린 가근의 말에 화적들도 인간인지라 생각이 있었는지

  "아 그놈 보게 그럴 듯한데. 그러나 너 이 놈 돈을 내어놓지 않으면 안돼"하고 재다짐하자  

  "여보시오, 내가 다 말했잖소, 창고에 벼밖에 없으니 가지고 가시오. 그것    이 전부 다요"하자 화적들은 저희들끼리 중얼거리며 나가 버렸다. 그래서 조부께서 병환 위급에서 모면했다 한다.   그 후 이러한 사연을 알게 된 유림들은 도의 관찰사에게 건의하고, 관찰사도 감탄하여 조정에 상주했다. 영조대왕이 ‘이제까지 효자 효열부의 정표 사실은 많았어도 효손정표란 처음 있는 일이다’ 하고 서류를 책상머리에 밀어놓고 의아해하며 잠시 생각하고 있던 차에 바람이 불어 어전에 갖다 놓여졌다. 그러자 전하께서는    "아 이는 보통 일이 아니다. 이는 하늘에서 낸 효손이기에 하느님께서도 재가를 촉구하는 뜻이다.!"

 하시며 효손명정을 명하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사실상 효손정문이란 희귀한 일이다.  

 

   <정려 소개> (2007. 4. 21. 항용(제) 제공)

  1. 자료 제공 : 충남 서산시청 문화관광부 이강열님

  2. 자료명 : 1)정려 사진(1964년 촬영),  2) <김가근 정려 문화재 조사 자료>

  3. 내용

    1)사진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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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김가근 정려 문화재 조사 자료>

    출전 : <서산시지>(서산시 간. 1998.)

 (1) 유적명 : 서산 김가근 영정

 (2) 소재지 : 충남 서산시 운산면 갈산리(정문거리)

 (3) 시대 : 조선(1774년) 명정. 1964년 개건     

 (4) 유적 개요 : 운산면 소재지에서 서산 방향으로 약 1km정도 가면 갈산에 이르는데,

      갈산리 1구 마을 입구 소로에서 서편으로 난 밭길을 따라 80m 정도 들어가면 마을의 정문거리라 부르는 곳에 정려가 위치한다.

 

 정려는 방형의 시멘트 기단 위에 세워진 정 측면 1칸의 건물이다. 방주형 초석 위에 8각 돌기둥을 세우고 둥근 기둥을 올렸으며 전면과 양 측면은 홍살을 두르고, 후면은 중방 밑까지 벽돌로 채우고 중방 위는 시멘트로 처리하였다. 처마는 겹처마이며 팔작지붕에 이익공 양식의 건물이다.

정려 나무에는 석재로 만든 명정현판(가로 114cm, 세로 37cm)이 있는데 ‘孝孫 贈嘉善大夫吏曹參判 兼同知義禁府事 五衛都摠府 副總管 行折衝將軍僉知中樞府事 金可近之門’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현판은 1964년에 7대손 金在憲이 정려각 건립과 함께 改建한 것으로, 정려 건립시 함께 만들어진 원현판의 유무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가근(1658-1740)은 본관이 안동으로, 1658년 충북 괴산 능촌리에서 태어났다. 자라면서 얼굴이 수려하고 남보다 총명하여 조부인 金得宗은 장차 이 아이는 가문을 빛낼 것이라며 기뻐했다고 한다. 김가근이 자라 조부가 병이 들어 간병할 때 화적이 나타났는데, 김가근은 자기 몸으로 조부를 막고 적에 대항하여 결국 칼에 찔리고 조부는 화를 면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모두 지극한 효성이라고 칭찬했다.

해미 여미리의 전주이씨인 李震白의 동생 李東白의 딸과 혼인하여 이 지역과 인연을 맺었고, 말년에 처가에 와서 후학에게 학문을 가르치며 인덕을 베풀다가 83세인 1740년(영조16)에 죽었다. 효손으로서의 행적은 원래 거주지인 충북 괴산군에서 있었으나, 해미 사림들의 천거로 죽은 뒤 34년 만인 1774년(영조 50)에 가선대부 증직과 효자 명정을 받았다. 한편, 정려로부터 북서쪽으로 100m 떨어진 구릉 중반부 동남향 사면 야산에 김가근의 묘소와 1833년에 세운 구묘비, 신묘비가 1기씩 서 있다.

 

 <서산시, 1998. 『서산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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