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학공파(익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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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p02.png 65) 김추(秋萬)

1629(인조7)--1671(현종12)

충익공 시양(時讓)의 손, 사휴제공 휘(徽)의 자. 백부 합천공(휘 縠)에게 출계. 1660(현종1) 진사 합격, 의금부도사 역임. 향년43이며 묘는 충북 제천군 봉양면 마곡리에 있다. 2006년 4월에 묘비를 세웠다.

 

<충익공문중 묘비 건립 고유제 및 제막식 거행> (06. 4. 18. 항용(제) 제공)

1. 일시 : 2006. 4. 15--4 16

2. 장소 : 1)충북 제천시 봉양면 삼거리 및 마곡리

             2)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3. 내용

   가. 제천의 도사공(휘 秋萬), 밀양공(휘 鳳旨)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봉행

   나. 괴산의 충익공(휘 時讓), 합천공(휘 곡), 사휴제공(휘 徽) 묘비와 석물 건립 및 고유제, 제막식 거행

4. 참석자

   가. 4. 15. 제천 봉양면 행사 : 약 15명(상천, 상옥, 영회, 두응, 찬응, 정응, 성응, 대응, 규동, 규원, 국진, 항용, 원용 등)

   나. 4. 16. 괴산 능촌리 행사 : 약 60여 명

     1)괴산 : 학응, 택응(제,참봉공파), 태섭, 태석(제,구암공파), 태옥(제,구암공파), 규원(제,참봉공파), 영수(제,문숙공파),

                 용두(제,통덕랑공파)--8

     2)서울 : 상석, 두응, 문응, 찬응, 정응, 규태(제,구암공파), 항용-7

     3)청주 : 영묵(제,생원공파), 영회, 규환(제,구암공파), 규진, 규동, 규성, 태진, 대용(가족4)-12

     4)제천 : 상천, 대응, 국진-3

     5)병천 : 재철, 남응, 천응, 유응-4

     6)제주 : 익수(보명-태익)-1

     7)안사연 : 주회(안, 청주), 태영(군, 서울)-2

     8)기타 : 상천내자 외 3인,  

      * ( )외는 제학공파 비안공문중회 종친

   

 

<4월 15일>

1년 전부터 준비해 왔던 행사가 드디어 시작됐다. 1주 전부터 마음을 졸였던 날씨는 다행히 좋다고 한다. 천만 다행이었다. 하늘과 조상님들의 도우심으로 여겼다. 제주의 익수아저씨께서는 이번 행사에 참여하시기 위해 15일(토)에 서울로 오신다고 기별이 왔다. 감사했다.

아침 10시경에 찬응대부께서 차를 몰고 두응대부님을 모시고 나의 직장 정문으로 오셨다. 동승하여 제천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는 주말 휴가차량으로 벌써 많이 밀렸다. 오후 1시 20분에야 봉양면 마곡리에 도착했다. 약 15명의 종친들이 있었다.  

 

삼거리의 밀양공(휘 봉지-1649(인조27)∼1713(숙종39))의 묘소는 이미 묘역 정비 작업과 고유제까지 마쳤고, 도사공(휘 추만-1629(인조7)∼1671(현종12) ) 묘소의 작업도 반쯤에 이르렀다. 새롭게 만나는 종친들과 반갑게 인사 를 나눴다. 곧 중식 시간이었다. 시장했던 터라 재실처럼 사용하는 집(상옥종친 거주, 약 3000여 평의 도사공 위토 내에 있음) 마루에 앉아 상천 대모님께서 준비하신 소머리국밥을 먹었다. 그야말로 일미였다.   

 

도사공 묘소에는 사초를 겸하여 묘비를 건립하였다. 묘역도 매우 컸다. 마치 의금부도사의 위용이 보이는 것 같았다. 좌우의 문관석은 유난히 웅장했다. 묘 앞 발치에는 작은 두 기의 묘소가 있다. 상천대부님께선 ‘마부로 일하던 사람들인데 그들의 유언에 따라 이곳에 묻혔다’고 전설을 말씀하신다. 작업이 끝나고 고유제를 올렸다.

 

* 초헌관-상천, 아헌관-규영, 종헌관-규원, 좌집사-규동, 우집사-성응, 독축-항용, 집례-항용

 

이어 참예하지 못한 밀양공(휘 봉지)의 묘소로 향했다. 불과 5분 만에 차량으로 도착하여 오르는 산길은 포크레인 덕에 좋은 길이 되었다. 산 언덕마루 부근에 새로 단장한 묘역은 보기에도 아름다웠다. 특히 전망은 참으로 좋았다. 이곳엔 사초를 겸하여 묘비, 상석, 망주석을 세웠다. 약 300년 동안 너무나 쓸쓸했던 묘역이었다. 선조님의 영혼이 하늘에서 보고 계신다면 얼마나 기뻐하실까? 아니, 보고 있는 내가 더욱 자랑스럽고 어깨가 으쓱해진다.

 

<묘비문>

 公의 姓은 金이요 本貫은 安東이며 諱는 秋萬이고 字는 春一이시다. 鼻祖는 新羅 大輔公 諱 閼智이시며, 오랜 先祖는 新羅 敬順王이요 始祖는 平章事公 諱 叔承이시며 中始祖는 高麗朝의 最高 官職인 僉議令에 오르시고 上洛郡開國公이 되신 忠烈公 諱 方慶으로 公의 十四代祖이시다. 그후 文英公 諱 恂, 文肅公 諱 永暾, 上洛伯公 諱 縝을 지나 派祖이신 諱 益達은 寶文閣直提學이시다. 朝鮮朝에 와서 諱 顧는 文科 급제 후 左司諫에 오르셨고, 이어 司憲府 監察 諱 孟廉, 典農寺 主簿 諱 哲鈞, 贈承政院 左承旨 諱 壽亨, 贈 吏曹叅判 諱 彦黙을 지나 贈 領議政이신 諱 錫은 高祖요 贈 左贊成 諱 仁甲은 曾祖이시다. 祖 諱 時讓은 文科及第 후 慶尙道 平安道 觀察使, 八道都元帥, 四道體察使, 兵曹 戶曹 判書를 거쳐 崇祿大夫 判中樞府事에 오르시고 淸白吏에 錄選되신 후 忠翼의 諡號를 받으셨다. 父 諱 縠은 恩山郡守와 陜川郡守를 역임하셨고, 母는 淑夫人 坡平尹氏로 掌隸院司評 誠德의 따님이시다.  

 

 公은 一六二九年(仁祖七) 六月 八日에 四休第公 諱 徽의 長男으로 出生하셨는데 伯父 諱 縠께서 無後嗣하여 出系하셨다. 一六六0年(顯宗一) 司馬試에 合格하셨고 官職은 通訓大夫에 이르러 義禁府都事를 歷任하셨다. 公은 職務를 執行함에 있어 公正 嚴格하셨고 稟性은 溫柔하고 仁慈하셨으며 平素의 德行은 世人의 稱頌을 받으셨다. 一六七一年(顯宗十二) 十一月 二十九日에 小安國洞에서 歿하시니 享年은 四十三歲이며 墓는 堤川市 鳳陽面 鷹谷里(현 馬谷里)에 있다. 配는 淑夫人 豊山洪氏이시니 父는 贈 左叅贊 行南原府使인 의 따님으로 公과 合葬되셨다. 公은 二男을 두셨으니 長男은 密陽府使를 지낸 鳳至이시며 二男은 瑞興府使를 지낸 麟至이시다.

 

 公이 歿하신지 三百三十五年이 지난 후에 公의 曾祖父이신 比安公 先祖님의 墓碑建立이 계기가 되어 奉先孝思하려는 後孫들의 至極한 精誠으로 公의 蔭德을 기리고 遺志를 받들고자 이 墓碑를 세우게 되었도다. 이로써 公의 빛나는 業蹟들이 永遠이 傳授되며 本墓域 또한 子孫萬代 永久히 保存되길 간절히 祈願할 뿐이로다.

 

檀紀 四三三九年(二00六) 四月 十六日 都事公 十代孫 斗應 謹撰. 文應 碑前面 謹書.

都事公 九代孫                                                            謹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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