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1) 이인 신도비명 가) 1차 탐방 (2002. 4. 16. 영윤(문), 영환(문) 제공)
1)찬자 : 남곤(가선대부행첨지중추부사겸동지성균관춘추관사남곤 찬) 2)서자 : 김희수(선교랑행승정원주서겸춘추관기사관김희수 서) 3)연대 : 정덕사년구월 일립(1509) 4)묘비 위치 : 도봉구 도봉동 무수골 5)이인 ( 李 仁 ) : 1465(세조 11)∼1507(중종 2) . 조선 전기의 종친. 자는 자정(子靜). 세종의 9남 영해군(寧海君) 당(塘)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윤동(申允童)의 딸이다. 1474년(성종 5) 영춘군(永春君)에 봉하여졌으며, 사옹원제조(司饔院提調)를 지냈다. 연산군 때 아들 기(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하였으며, 이인은 남해에 정배되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이 되었다
나) 2차 탐방 (2004. 10. 17. 발용(군) 제공) ▲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신도비(유연재 김희수 서. 남곤 찬)
▲ 이인 신도비 이수 부분
▲ 신도비 전면
▲ 신도비 부분 확대
▲ 신도비 부분 확대
<묘소>
다)이인(세종의 손자)의 신도비 자료 조사 (2004. 9. 1. 항용(제 제공) (1)기초 자료 소개 출 전 : 국가문화유산종합 정보서비스. 종목 : 시도유형문화재 106호. 명칭 : 이인신도비 (李仁神道碑) 분 류 : 석비. 수량 : 1기. 지정일 : 1997.12.31. 소재지 : 서울 도봉구 도봉동 산81-1. 소유자 : 전주이씨영해군파 관리자 : 전주이씨영해군파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평생업적을 기록하여 그의 무덤 남동쪽에 세워두는 것으로, 이 비는 조선 세종대왕의 손자인 이인을 기리고 있다. 이인은 세종대왕의 아들 영해군과 평산신씨 사이에 태어나, 승헌대부에 오르고 목성공에 봉하여졌다. 어렸을 때 부모를 잃고 자라면서 연산군의 핍박을 받아 아들과 함께 귀양살이를 하기도 하였다가, 중종반정으로 풀려나 복직되고 정국원종공신이 되었으나, 중종 2년(1507) 43세로 생을 마쳤다. 평소 자연과 더불어 나무와 꽃을 사랑하고 아꼈다 한다.
비는 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릿돌을 갖춘 모습으로 본래의 모습이 잘 보존되어 있다. 비문에는 이인의 가문과 생애 등 한 왕족의 힘들었던 인생역정이 잘 담겨 있다. 중종 4년(1509)에 세운 것으로, 당시 영의정이었던 남곤이 비문을 짓고, 최고의 명필가였던 김희수가 글씨를 썼다. 오랜 세월이 지났으나 좋은 기후와 지리적인 여건 덕분에 거의 닳지 않아서, 명필의 아름다움이 그대로 살아나 있다. 이인의 묘는 부인 진주유씨의 묘와 함께 나란히 자리하고 있다.
(2)사진 및 관련 자료 사이트 소개 (2004. 9. 1. 발용(군) 제공) (가) <서울문화재> 내의 소개 내용
지정번호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06호. 지정연월일:1997년 12월 31일. 시 대:조선 중종 4년(1509). 규모·양식 :신도비 1기(基), 전체 높이 301㎝, 비신 높이 162㎝, 너비 73.5㎝, 두께 25㎝. 묘갈(墓碣) 1기, 보호구역 1,138㎡.
재 료 :비신-백일석(白一石), 대좌-화강암. 소 유 자:전주이씨 영해군파(寧海君派) 종중. 소재지: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81-1
조선 15세기의 종친 영춘군(永春君) 이인(李仁, 1465∼1507)의 신도비이다. 그는 세종의 아홉 번째 지자(支字)인 영해군(寧海君) 이당(李瑭)의 아들이다. 세조 11년(1465) 출생으로 자(字)는 자정(子靜)이며, 어머니는 좌찬성에 추증된 신윤동(申允童)의 따님이다. 어려서 외할머니 이씨의 손에 자랐으며 행동거지에 법도가 있었다고 한다. 열살 때 정의대부(正義大夫)의 군(君)에 봉해졌고, 그 뒤 사옹원 제조를 지냈으며 숭헌대부(崇憲大夫)에 올랐다. 연산군 12년(1506) 큰아들 완천부정(完川副正) 이기(李祺)의 사건에 연좌되어 부자·형제가 모두 유배당했는데, 그는 남해(南海)에 정배되었다. 수개월 뒤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풀려나 복직되었고 정국원종공신(靖國原從功臣)에 올랐다. 중종 2년(1507) 4월 27일 사망하였으며, 그해 8월 임신 일에 도봉산 남쪽에 장사지냈다. 시호는 목성(穆成)이다. 어려서부터 효성과 우애를 타고났는데, 11살 때 어머니 신씨를 잃었고 3년이 채 못되어 다시 부친상을 당하였다. 또 매사에 부지런하고 신중했으며 특히 상례(喪禮)를 잘하여 종친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다고 한다. 평상시 생활이 담박하고, 이름난 꽃을 뜰에 심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부인 유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유양(柳壤)의 따님으로 슬하에 4남 3녀를 두었다. 비는 1509년 9월 건립된 것으로 상하 2단의 받침돌 위에 대좌(臺座)를 얹고 그 위에 백일석으로 만든 비신(碑身)과 이수( 首)를 얹은 형태이다. 대좌에는 연꽃잎 무늬와 안상(眼象)을 새겼고, 이수에는 여의주를 다투는 쌍룡을 비(非) 대칭적으로 새긴 점이 특이하다. 16세기초를 대표하는 석비로서 임당정공신도비(林塘鄭公神道碑,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1호) 등 17세기 석비의 선례가 된다. 비문은 큰아들 이기의 부탁으로 첨지중추부사 남곤(南袞, 1471∼1527)이 지었고 글씨는 승정원 주서(注書) 김희수(金希壽, 1475∼1527)가 썼다. "穆成公神道碑銘"이란 머리전서[頭篆]도 김희수가 쓴 것으로 여겨진다.
(나) 관련 자료 사이트 및 동영상 http://sca.visitseoul.net/korean/stone_construction/i_tombstone08021.htm [새창에서 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