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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미수 신도비 (2004. 8. 19. 발용(군) 제공)
秉忠奮義靖國功臣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右贊成兼領經筵事判義禁府事海平府院贈諡昭平鄭公神道碑銘 幷書 秉忠奮義靖國功臣崇祿大夫漢城府判尹晋川君 姜渾 撰 禮曹正郞兼承文院校理 金希壽 書 (後略)
병충분의 정국공신 보국숭록대부 행 의정부우찬성 겸 영경연사판의금부사 해평부원군 증 시소평 정공 신도비명 병서 병충분의 정국공신 숭록대부 한성부판윤 진천군 강혼이 글을 짓고, 예조정랑 겸 승문원교리 김희수 글을 쓰다. (후략) ▲ 정미수 묘소 전경
묘역은 사능리 사릉 능묘 약간 아래 우측에 정경부인 전의 이씨(全義李氏)와 합장묘로 서향하고 있으며, 1980년 3월 개사하여 잘 정비되어 있다. 봉분에는 장미 문양을 새긴 호석을 새로 둘렀으며, 그 앞에 목련과 꽃문양을 사방에 새긴 대석(82×50×23)에 대리석 비신(45× 15×83.5), 한 마리의 용이 구름 속에서 여의주를 다투는 모양이 새겨진 이수(35)를 갖춘 묘표가 있다. 비문에는 “秉忠奮義靖國功臣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判義禁府事海平府院君諡昭平鄭公之墓 貞敬夫人全義李氏之墓”라 새겨져 있다. 봉분 앞에는 혼유석(162×80), 장대석, 상석(162×101×27)이 있다. 상석 앞에는 육각 향로석(39×43)이 있고, 우측에도 육각형의 작은 향로석(31×33×38)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190)과 문인석(216)이 있다. 특히 문인석은 균형이 잘 잡힌 형태로 해주 정씨 묘역 중에서 가장 크다. 향로석 앞에는 장명등(178)이 있는데, 사각형의 받침대에 팔작지붕 형태로 그 중간에 사각형의 화창을 내었으며, 화창 밑으로 구름문양의 꽃무늬와 구름무늬를 장식하여 화려함을 더하였다.
▲ 정미수 신도비
신도비는 사릉 좌측 산등성이 정효준 신도비 우측에 남서향하고 있다. 신도비는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88×24.5×153)과 이수(97×34×66)를 갖춘 통비형이다. 비문 상단에 전서로 “昭平鄭公神道碑銘”이라 횡서했고, 비제는 “秉忠奮義靖國功臣輔國崇祿大夫行議政府右贊成兼領經筵事判義 禁府事海平府院君贈諡昭平鄭公神道碑銘幷序”이나 다른 글씨는 마모되어 알아보기 힘들다. 비문은 1513년에 세워진 것으로 강혼(姜渾)이 찬하고, 김희수(金希壽)가 썼다. 이수에는 발톱이 4개인 두 마리 용이 몸을 ‘ㄹ’ 자로 꼬고 서로 앞발을 치켜들어 여의주를 다투는 모습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전면의 조각은 좌측 용이 입을 다문 반면, 우측 용은 입을 벌리고 있는 조각상의 차이가 있다.
▲ 정미수 신도비 탁본
정미수 (鄭眉壽 1456∼1512(세조 2∼중종 7) 조선 중기 문신. 자는 기수, 호는 우재(愚齋). 본관은 해주(海州). 아버지는 형조참판 종(悰), 어머니는 문종의 딸 경혜공주(敬惠公主)로, 아버지가 사사(賜死)되자 세조(世祖)가 길렀다. 1473년(성종 4) 돈녕부직장·형조정랑을 지냈으며, 76년 중부참봉(中部參奉)을 거쳐 선전관, 89년 사헌부장령·사섬시첨정·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인천부사 (仁川府使)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하면서 당상관에 올랐고 96년 (연산군 2) 충청도관찰사, 98년 동부승지·우승지·좌승지·도승지를 거쳐 1502년 공조참판·지돈녕부사·한성부판윤을 지냈고, 1504년 의정부참찬 겸 판의금부사를 지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국공신 3등에 책록 되고 해평부원군(海平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박경(朴耕)의 옥사에 연루,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문장에 능했으며, 저서에 《한중계치 (閑中啓齒)》가 있다. 시호는 소평(昭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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