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인물

p11.png 김희수(金希壽)1475(성종6)∼1527(중종22)--(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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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연재공 소개

2. 묘소 사진

3. 주요 시문 소개

 

4. 주요 필적 자료 소개

1) 이가서법

2) 시첩

3) 간이벽온방(簡易벽瘟方)

4) 친필 법첩

5) 이색영정기

6) 동국명필

7) 탁본첩(이가서법)

 

5. 유연재공 친필 각종 비갈 소개

 1) 이인 신도비

 2) 운산군 신도비

 3) 성경온 묘갈

 4) 경기 양주지역(박건,성희안)

 5) 양성지 신도비

 6) 심응 신도비

 7) 홍상 신도비

 8) 정미수 신도비

 9) 소자파 묘비

10) 송여해 묘비

11) 김감 신도비

12) 이손 신도비

13) 정충량 묘갈

14) 안자성 묘갈 *광주지역 미 탁본 묘갈 소개

6. 안사연 탁본대회

1) 유연재공,동고공 묘비 탁본

2) 성희안 신도비 탁본

7. 이가서법 경매 입수기

8. 각종 문헌 자료

 

본문

p11.png 5. 유연재공 친필 각종 비갈 소개

5) 양성지의 신도비 (2004. 8. 16. 발용(군) 제공)

 

有明朝鮮國純誠明亮佐理功臣崇政大夫行知中樞府事兼同知春秋館事兼        

同知春秋館事南原君 贈諡文襄公梁公神道碑銘 幷序        

資憲大夫議政府右參贊兼知 經筵事弘文館提學同知成均館事 金安國 撰         

□孫女서(女+胥)通政大夫吏曹參議 金希壽 書        

(後略)        

        

유명조선국순성명량좌리공신숭정대부행지중추부사겸동지춘추관사겸        

동지춘추관사남원군 증시문양공양공신도비명 병서        

자헌대부의정부우참찬겸지 경연사홍문관제학동지성균관사 김안국         

글을 짓고        

□손녀서통정대부이조참의 김희수 글을 쓰다.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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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성지 묘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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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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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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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도비 이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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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 앞면에는 가운데의 여의주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용이 마주 올려다보고 있으며 운문(雲紋)에 전체가 감싸여 있고, 뒷면은 앞        

면과 동일하며, 측면에는 용꼬리와 운문이 있다.        

조각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으며 비(碑)의 마멸이 심하나 자획 판독은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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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비 탁본(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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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비 탁본(후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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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도비 탁본(부분확대)        

                

*양성지 (梁誠之 1415∼1482(태종 15∼성종 13))         

조선 초기 학자·문신. 자는 순부(純夫), 호는 눌재(訥齋)·송파(松坡). 본관은 남원(南原). 춘추관 기주관과 고려사 수사관을 겸직하며 《고려사》 개찬(改撰)에 참여하고 1453년(단종 1) 왕명으로 《조선도도(朝鮮都圖)》 《팔도각도(八道各圖)》를 작성했다. 이듬해 《황극치평도(皇極治平圖)》, 55년(세조 1) 《팔도지리지》 《연변방수도(沿邊防戍度)》를 편찬하였다. 《팔도지리지》와 《연변방수도》는 실측한 지도가 없던 그때에는 정확하고 귀중한 자료였다. 63년 《동국지도》를 왕에게 올리고, 역대 서적의 보관을 위해 홍문관(弘文館) 설치를 건의하였다. 구현시(求賢試)에 급제, 이조판서에 오르고 대제학으로 있던 중 《오륜록(五倫錄)》을 펴냈다. 이듬해 발영시(拔英試)에 급제한 뒤, 서적의 보전·간행을 건의하는 상소문을 지어 올려 학문의 발전을 꾀하였다. 66년에는 《해동성씨록(海東姓氏錄)》을 펴냈다. 69년(예종 1) 《세조실록》, 70년(성종 1)《예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 3등으로 남원군(南原君)에 봉하여졌다. 81년 홍문관 대제학으로서 《여지승람(輿地勝覽)》을 간행하였다. 같은 해 지중추부사가 되어 문신정시(文臣庭試)에 장원급제하였으며, 82년 서적의 인간(印刊)·수장(收藏)이 실효를 꾀하자는 건의문을 올렸다.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6조에 걸쳐 관직을 맡는 동안 문교(文敎)에 끼친 공로, 정치면에서의 의견이나 언론 등이 당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쳤고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저서에 《눌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양(文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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