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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경기도 양주 지역 유연재공 필적 탐방기 (2003. 12. 20. 발용(군) 제공) (박건, 서희안 신도비)
얼마 전 하남시에 소재한 유연재(悠然齋) 선조님의 필적(운산군 이계 신도비, 성경온 묘갈)을 소개한바 있습니다. 동일 주제를 가지고 접근하다 보면 전문적인 지식도 갖출 수 있고 흥미도 한층 있겠다는 생각에 “금석문 속의 선조님 필적을 찾아서......”라는 주제로 금석문 속의 선조님 필적을 찾아 보기로 하였습니다.
우리 홈이나 인명사전에는, 유연재 선조님께서 <계주문><영상 김수동비><영상 성희안비>를 서(書) 하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일전에 소개한 두 곳 이외에도, 주회 종친께서 소개한 대전의 송여해 묘비(정광필 찬, 김희수 서-정광필 묘비는 동고공 휘 노 선조님 書)등 당시의 묘비 및 신도비가 해서체로 음각되어 있고 유연재 선조님은 해서체에 있어 당대의 명인이셨던 점을 고려하면 많은 필적이 각처에 산재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성희안(成希顔) 비(碑)를 찾아보기 위해 양주문화원과 접촉 중 생각지도 않던 소득이 있었습니다. 양주(楊州) 지역에는 성희안 신도비를 비롯하여, 유연재 선조님께서 전서(篆書)하신 박건(朴楗)의 신도비와, 유연재 선조님의 아드님이신 동고공(東皐) 휘 노(諱 魯)선조님께서 서(書)하신 한세환(韓世桓) 신도비가 있다는 것입니다.
금년 들어 가장추운 날씨라는 뉴스가 나옵니다. 베란다 유리창에 낀 성에로 인하여 바깥세상이 뿌옇게 보입니다. 보온병에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후, 애마에 몸을 싣고 양주로의 나 홀로 테마여행이 시작됩니다 전화로 약속 된 양주문화원을 찾았습니다. 문화원 상임교수를 만나 자료를 부탁하니 이유를 묻습니다. 문중 선조님들의 금석문을 채집 중 이라고 하니, 흔쾌히 승낙하며 자료를 복사해주고 양주군 관광지도에 찾아가는 길 및 주변 후손들의 집까지 자세히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양주문화원에서 그간 발간한 도서 <양주의 옛 소리><양주의 지명 유래집><양주 금석대관><임꺽정 김삿갓 양주에서 태어났는가?>를 하나의 CD로 엮은 양주향토자료집을 하나 주십니다. CD에는 양주지역에 있는 신도비 및 묘갈, 묘표 등 200여점의 금석문(원문,번역문, 비문사진, 탁본사진)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일전에 주회 종친께서, 요즘은 CD 선물 받을 때가 기분이 제일 좋다더니 이런 기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양주문화원에 감사를 드립니다.
문화원을 나와 39번 지방도로를 타고 벽제 쪽으로 한참을 달리니, 임란 3대첩중의 하나인 행주대첩의 주인공 권율 장군의 묘역이 우측에 보입니다.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한 채 잠시 더 나아가, 장흥면사무소를 끼고 우측 길로 접어드니 샛말 입구에 거창신씨 묘역을 알리는 표석이 있습니다. 그 샛길로 접어들어 샬롬 유스호스텔을 지나니 고향집 간판이 보입니다. 고향집은 현재 박건의 후손이 거주하며, 바로 고향집 뒤편이 박건(朴楗)의 묘소와 신도비가 있는 곳입니다. 고향집에 들러 인사를 하고 신도비의 위치를 물으니 아주머니 한 분이 집 뒤편 재실 옆의 신도비까지 안내해 주십니다.
밀양박씨 재실 옆의 신도비는 1977년에 세운 것으로 원 신도비의 판독이 어려워지자 후손들을 위하여 새로이 세운 것입니다.
원 신도비는 산위로 30여 미터 위에 있는 박건의 묘소 옆에 있습니다.
박건 [朴楗 1434~1509] 본관 밀양(密陽). 자 자계(子啓). 시호 공간(恭簡). 1453년(단종 1)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집현전수찬, 교리(校理)를 거쳐 사정(司正)을 지냈다. 1455년(세조 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이 되었으며, 우부승지를 거쳐 1468년(예종 1) 한성부우윤을 지냈다.
1472년(성종 3) 진하부사(進賀副使)로, 1483년 천추사(千秋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후 평안도관찰사 ·대사헌 등을 지내고 1495년(연산군 1) 우참찬으로 춘추관지사(春秋館知使)를 겸하여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506년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에 임명되었으나 박원종(朴元宗) 등과 반정(反正)에 참여하여 중종을 추대,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밀산군(密山君)에 봉하여졌다. 봉분이 동그랗게 잘 가꾸어진 묘에는 하나의 상석이 놓여있고 상석 뒤쪽으로 옛 묘비와 새로 세운 묘비가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호석과 망주석은 새로이 정비한 듯이 보이며, 한쌍의 문인석과 중앙의 장명등, 상석이 세월을 느끼게 하는데, 묘 양쪽에 반듯이 포개어 놓아둔 돌들이 이채롭습니다. 신도비는 흔히 볼 수 있는 모양으로, 비신의 높이가 196cm, 넓이 66cm, 두께 191cm이고 비신과 이수는 일체형이며 대석은 구분 조형되어 있습니다.
신도비는 풍화로 마멸되어, 유연재 선조님께서 전서(篆書)하닌 필체도 판독이 어려울 정도입니다. 유연재 선조님이 전서(篆書)를 남기신 경우는 극히 드믄 경우라 아쉬움이 더 합니다.
양주문화원 제공 향토자료총람에 보면, 신도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 [원 문] 輔國崇祿大夫左贊成密原府院君恭簡公神道碑銘幷序 公諱楗字子啓密陽人高祖諱戶曹典書曾祖諱剛生安邊府使生 世宗後宮追 贈議政府 贊成事祖諱切問 (中略) 晉川君 晉州 姜渾 撰 禮曹判書 高靈 申用漑 書 大司憲 安東 金希壽 篆
[번역문] 보국 숭록대부 좌찬성 밀원부원군 공간공 신도비명 병서 공의 이름은 건(楗)이고, 자는 자계(子啓)이며 밀양인이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침()으로 병조 전서(兵曹典書)였고, 증조 할아버지의 이름은 강생(剛生)으로 안변 부사였으며, 세종의 후궁을 낳았기 때문에 의정부 찬성사로 추증되었다.
(중략) 진천군 진주 강혼(姜渾)이 글을 짓고, 예조 판서 고령 신용개(申用漑)가 쓰고, 대사헌 안동 김희수(金希壽)가 전(篆)을 쓰다.
짧은 겨울 해를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합니다. 성희온 신도비 및 묘소는 박건 신도비에서 길가로 나와 산 쪽으로 4~5백 미터 올라간 위치에 있습니다. 그 넓은 양주군에서 유연재 선조님의 필적이 남아있는 신도비가 지척에 있다니 답사를 하는 저에게는 여간 행운이 아닙니다. 성희안 신도비로 이동 중 거창신씨 신수근의 묘 및 신도비가 있으나 내려오는 길에 살펴보기로 하고 발길을 재촉합니다.
* 신도비 원문 및 번역문 (2004. 3. 10. 윤만(문) 제공) 輔國 崇祿大夫 左贊成 密原府院君 恭簡公 神道碑銘 幷序 보국 숭록대부 좌찬성 밀원부원군 공간공 신도비명 병서
[원 문] 公諱楗字子啓密陽人高祖諱戶曹典書曾祖諱剛生安邊府使生世宗後宮追贈議政府 贊成事祖諱切問有材名爲校書正字而卒以其胤密山君勳贈左贊成考諱仲孫遭世廟中興掌機要策靖難勳一等官至崇祿大夫議政府左贊娶工曹正郞文承祚之女 公生於宣德甲寅天資溫良端雅少力學政文詞未弱冠已有名長益成就景泰癸酉春公年二十中司馬試是季秋擢金壽寧榜甲科第三人選授集賢殿修撰知製敎陞校理轉成均直講吏曹正郞世子左文學又兼藝文應敎尋授成均司藝直藝文遷議政府檢詳歷舍人俄遷藝文直提學所歷皆儒林淸選名望益重成化乙酉授通政大夫僉知中樞府事擢拜承政院右副承旨累轉左承旨自吏曹政院常帶知製敎盖重其才也
丙戌遭內憂廬墓哀毁終三年服出爲全羅道觀察使當拜睿廟見公職啣問政院曰是於觀察使何稱守承政院以例對上曰予知其爲人可陞嘉善命下人皆稱後歷江原慶尙平安道觀察使漢城府左右尹兵禮工三曹判司憲府大司憲弘治壬子陞資憲爲漢城府判尹刑曹判書歷試盤錯剖決無留居官行已不苟同不崖異惟務當理故人自服戊午超崇政議政府左贊陞右贊成遭甲子縉紳之禍貶授咸鏡觀察使處艱危而能不撓其守卒甚病民而有力可救者未嘗不勉焉秩滿拜判中樞府使丙寅秋今上卽位策靖國功臣封密原君復爲左贊成未幾追秩輔國崇祿大夫封府院君兼領經筵事
公歷事六朝勳名福祿至
是可謂盛矣而能秉心一節謹飭寒素不終始盖其性然也己巳閏九月甲子以疾卒享年七十六訃聞上震悼輟朝賻典有加官備喪葬如儀以其年十月丙辰葬于京畿楊州治西長興里寺谷之原太常名曰恭簡
公娶富平府使崔之女生三男一女不幸皆先公亡男長曰承煥天安郡守次曰承燧兵曹知次曰承有文行登第爲議政府檢詳女適禮曹判書申用漑副室有一男承明郡守生一女適奉閔光門知生三男三女男曰葵女長適司評愼弘輔檢詳生二男曰芬曰薰芬戊午進士沒判書生二男二女曰淙奉沒曰瀚中丁卯司馬試宣傳女適修撰朴誾餘皆幼內外曾孫二十四人銘曰
密原大姓克邁種德 溫潤其章莊修游 藝薦爲國器 神扶愷悌卽壽且貴 位視台鼎遭聖而奮 最著曰朴寔 生卓如玉在璞 以磨以琢廊廟受擢 天爲謙約樹立宏博 功載麟閣處危能綽 垂光不朽承蔭雲仍維 楊西麓中有公墳 返紀靖國 餘慶攸托窈窕其壑紀德無
晉川君晉州姜渾撰 禮曹判書高靈申用漑書 大司憲安東金希壽篆
[번역문] 공의 이름은 건(楗)이고, 자는 자계(子啓)이며 밀양인이다. 고조할아버지의 이름은 침()으로 병조 전서(兵曹典書)였고, 증조할아버지의 이름은 강생(剛生)으로 안변 부사였으며, 세종의 후궁을 낳았기 때문에 의정부 찬성사로 추증되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절문(切問)으로 재명(材名)2)이 있어 교서관 정자가 되어 별세하였고, 그 아들 밀산군의 공훈으로 좌찬성에 증직되었다. 아버지의 이름은 중손(仲孫)인데 세조가 중흥한 때를 만나 중요한 책략으로써 도와 정난(靖難) 1등 공신으로 관직이 숭록대부 의정부 좌참찬에 이르렀고, 공조 정랑 문승조(文承祚)의 딸과 혼인하였다.
공은 선덕(宣德) 갑인년(1434, 세종 16)에 태어났는데, 천성이 온화하고 선량하며 단아하였다. 어려서부터 힘써 문사(文詞)을 공부하여 약관(弱冠:20세)이 못되어 이미 이름이 났고 장성하여서는 더욱 성취하였다. 경태(景泰) 계유년(1453, 단종 원년) 봄 공의 나이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그해 9월에는 김수녕의 방(榜)에 갑과 3등으로 합격하여 집현전 수찬, 지제교에 제수되었다. 교리에 오르고 성균관 직강·이조 정랑·세자좌문학으로 옮겼으며 또한 예문 응교를 겸직하였다. 곧이어 성균 사예·직예문관에 제수되었다. 의정부 검상으로 옮겼으며 사인을 역임하였다. 얼마 안되어 예문관 직제학으로 옮겼다. 역임한 것이 모두 유림의 청직(淸職)으로 명망이 더욱 커졌다. 성화(成化) 을유년(1465, 세조 11) 통정대부 첨지중추부사에 제수되었고 승정원 우부승지로 뛰어올랐으며 여러 번 옮겨 좌승지가 되었다. 이조에서 승정원까지 지제교를 계속 겸하였는데 그 재주를 중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병술년(1466) 모친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며 슬픔을 다하여 3년을 마쳤다. 상을 마친 뒤 전라도 관찰사로 나가게 되어 배례(拜禮)할 때 예종이 공의 직함을 보고 승정원에 묻기를 “이 관찰사가 어찌 수직(守職)이 걸맞겠는가” 하니, 승정원에서 예(例)로써 어지(御旨 : 임금의 뜻)에 답하였다. 임금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그의 사람됨을 아니 가선대부로 올려주는 것이 옳다” 하고 명하니, 아랫사람이 모두 칭송하였다. 뒤에 강원·경상·평안도 관찰사와 한성부 좌·우윤 그리고 병조·예조·공조의 참판 및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 홍치(弘治) 임자년(1492, 성종 23) 자헌대부로 올라 한성부 판윤·형조 판서가 되었다. 복잡한 사건을 판결하는 데도 관청에 미루어 두지 않았다. 구차히 남에게 영합하지 않았고 또한 모가 나서 남다르게 행동하지도 않았다. 오직 사리에 합당하도록 힘썼으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심복하였다. 무오년(1498, 연산군 4)에 숭정대부 의정부 좌참찬으로 뛰어올랐고, 우찬성으로 승진하였다. 갑자년(1504, 연산군 10) 사림의 화를 만나 함경도 관찰사로 내려 제수되었다. 어려운 때를 당하여도 흔들리지 않았고, 그 수졸(守卒)이 백성을 매우 핍박하니 있는 힘을 다해 구할 수 있는 자는 힘써 구하지 않음이 없었다. 임기가 차니 판중추부사에 제배되었고 병인년(1506, 중종 원년) 가을 지금의 임금께서 즉위할 때 정국공신 밀원군에 책봉되었으며 다시 좌찬성이 되었다. 얼마 안되어 보국 숭록대부 밀원부원군 겸 영경연사에 임명되었다.
공은 여섯 임금을 두루 섬겨 훈명(勳名)3)과 복록(福祿)이 여기에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성대하다고 하겠다. 마음가짐은 한결같이 지조를 지녔고 삼가고 경계하며 청빈한 것은 시종일관 변치 않았으니 그 성품이 그러하였기 때문이다. 기사년(1509, 중종 4) 윤9월 갑자일에 병으로 졸하니 향년 76세였다. 부음을 임금에게 아뢰니 매우 슬퍼하며 조회를 그치고 부의를 더하였으며 관에서 상장을 마련토록 하니 예이다. 그해 10월 병진에 경기도 양주의 치소에서 서쪽 장흥리 사곡(寺谷 : 절골)의 언덕에 장사하였다. 태상시에서 공간(恭簡)이라 시호하였다.
공은 부평 부사 최윤의 딸과 혼인하여 3남 1녀를 낳았으나 불행히도 공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장남은 승환(承煥)으로 천안 군수를 지냈고, 차남은 승수(承燧)로 병조 참지를 지냈으며, 3남은 승약(承)으로 문학과 덕행이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여 의정부 검상을 지냈다. 딸은 예조 판서 신용개의 부실(副室)4)로 들어갔는데 아들 승명(承明)이 있었다. 군수(장남)는 외동딸을 두었는데 참봉 민광문에게 시집갔다. 참지(차남)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위()·영()·규(葵)이며 장녀는 사평 신홍보에게 시집갔다. 검상(3남)은 2남을 두었는데 분(芬)·훈(薰)이다. 분은 무오년에 진사에 합격하였는데 죽었다. 판서는 2남 2녀를 낳았는데 종(淙)은 참봉으로 죽었고, 한(瀚)은 정묘 사마시에 합격하여 선전(宣傳)이 되었다. 딸은 수찬 박은에게 시집갔다. 나머지는 모두 어리다. 친·외 증손이 24명이다. 명(銘)에 이르기를,
밀원(密原)은 대성으로 덕을 널리 펴려고 힘썼네. 그 문장은 온화하였고 수행은 엄격히 하였으며 학예(學藝)에 마음을 두어 천거되어서는 나라의 그릇이 되었네. 신이 도와준 듯이 화락하고 단아하며 장수하고 또한 귀하게 되었네. 지위는 삼공(三公) 자리를 보았고 성왕(聖王)을 만나 분발하였으니 박건이 가장 드러났다네. 그 태어남이 탁월하여 옥이 박(璞)에 있는 듯하였고 부지런히 연마하여서는 조정에 발탁되었네. 천성이 겸손하고 검약하였으며 크고 넓고 굳은 뜻을 세웠네. 공(功)은 공신각에 새겨졌으며 위기에 처하여서도 침착하였네. 빛이 영원히 드리워지고 해 그림자가 이어져 구름이 이는 곳인 양주 서쪽 언덕에 공의 분묘가 있어 기강을 되돌려 정국(靖國)의 공을 세웠으니 남은 경사가 의탁한 깊은 골짜기여! 덕을 기록하기에 부끄러움이 없도다.
진천군 진주 강혼(姜渾)이 글을 짓고, 예조 판서 고령 신용개(申用漑)가 쓰고, 대사헌 안동 김희수(金希壽)가 전(篆)을 쓰다.
--성희안 신도비 * 성희안 [成希顔 1461~1513] 본관 창녕(昌寧). 자 우옹(愚翁). 호 인재(仁齋). 시호 충정(忠定). 1480년(성종 11) 생원이 되고 1485년 별시문과(別試文科)에 급제, 정자(正字)를 지냈다. 1504년(연산군 10) 이조참판 겸 부총관(副摠官) 때 양화도(楊花渡) 놀이에서 왕의 횡포를 풍자한 시를 지어 바침으로써 미움을 사 무신직(武臣職)에 좌천되었다.
1506년 박원종(朴元宗) 등과 중종반정(中宗反正)을 일으켜 연산군을 폐하는 데 공을 세우고 정국공신(靖國功臣) 1등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이어 창산부원군(昌山府院君)에 봉해지고 주청사(奏請使)로 명(明)나라에 가서 반정을 납득시켰다. 귀국 후 우의정을 거쳐 1513년(중종 8) 영의정에 이르렀다. 중종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성희안 신도비 역시 박건의 신도비와 같은 모양입니다. 신도비는 비신의 높이가 210cm, 넓이 75cm, 두께 20.5이고 대석이 거북모양으로 조형된 것이 박건 신도비와의 차이입니다. 근 500년의 세월이 흘렀건만 신도비에 음각된 필적은 탈자나 마모가 없는 명필의 아름다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보아온 유연재 선조님의 필체 중에 단연 으뜸입니다. 앞으로 묘비를 세울 때는 재료의 선택이 단연 우선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신도비 옆에는 창녕성씨 문중에서 새로이 세운 신도비가 나란히 하고 있어 좌우 대칭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느껴지는 정감이 예전 것만 못해 눈길이 가지 않습니다.
성희안 묘소는 신도비에서 산 쪽으로 50여 미터 올라간 자리에 있는데 경사가 가파른 곳으로 올라오니 숨이 턱까지 닿습니다. 성희안의 묘는 근래에 호석과 상석을 정비하여 비석의 고태에 비하여는 예스러운 멋이 없습니다. 붉은 벽돌로 둘러싼 병풍석 역시 산 속의 고적함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1쌍의 석상(문인석인지 무인석인지 구분이 안 됩니다. 아마도 문인에서 무인으로 좌천된 경력이 있어 의도 적으로 만든 석상이 아닌가 생각됩니다.)과 장명등, 망주석은 세월의 흐름에 이끼가 끼고 검게 변해 있습니다.
양주문화원 제공 향토자료총람에 보면, 신도비의 내용은 아래와 같습니다.
[원 문] 有明朝鮮國秉忠奮義決策翊運靖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春秋 館藝文館觀象監事兵曺判書昌山府院君忠定公成公神道碑銘幷序
崇政大夫議政府右贊成兼知 經筵事判義禁府事弘文館大提學藝文館大提學知春秋館成 均館事申用漑 撰 朝散大夫行議政府檢詳兼春秋館記注官承文院校理金希壽 書
(後略)
[번역문] 유명 조선국 병충 분의 결책 익운 정국 공신 대광 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 경연 춘추관 예문관 관상감사 병조 판서 창산부원군 충정공 성공 신도비명 병서 숭정대부 의정부 우찬성 겸 지경연사 판의금부사 홍문관 대제학 예문관 대제학 지춘추관 성균관사 신용개(申用漑)는 글을 짓고, 조산대부 행 의정부 검상 겸 춘추관 기주관 승문원 교리 김희수(金希壽)는 글을 쓰다.
(후략) 성희안 묘소와 박건의 묘소 사이에 거창신씨 재실과 소한당 신수근의 신도비 및 묘소가 있습니다.
신수근은 연산군의 처남이자 후에 중종이 되는 진성대군의 장인입니다. 연산군을 제거하고 진성대군을 옹립하자는 박원종, 성희안 일파의 제의를 거절했다가 중종반정이 성공하자 삼형제가 유자광에게 살해당합니다. 또한 신수근의 딸인 단경왕후 신씨도 박원종의 강권으로 폐출되는 시련을 겪기도 합니다.
반정공신인 박건, 성희안과 반정참여 제의를 거절하여 참살을 당한 신수근이 한 고향 사람이라니 놀라울 뿐입니다. 이웃이 원수가 된 경우입니다. 신수근 신도비 앞에서 멸문지화를 당한 그들의 한을 잠시 생각해 봅니다. 조선건국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에 의하여 멸문지화를 당한 연안차씨 종규에는 봉화 정씨와 혼사를 불허한다는 내용이 있다던데......
반정공신인 박건과 성희안의 신도비를 서하신 유연재 할아버지의 당시 정치적인 성향을 생각하며, 동고공 휘 노 선조님이 서하신 신도비가 있다는 청주 한씨 묘역으로 이동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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