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6)심응 신도비 (2004. 8. 17. 발용(군) 제공)
有名朝鮮國贈純忠輔祚功臣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中樞府事豊山君行精忠出氣敵愾功臣嘉善大夫 豊山君襄胡公沈公神道碑銘 幷書 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世子師 南袞 撰 通政大夫承政院都承旨兼經筵參贊官 -9자 결- 直提學尙瑞院正 金希壽 書 (後略)
유명조선국 증 순충보조공신 자헌대부 병조판서 겸 지중추부사 풍산군 행 정충출기적개공신 가선대부 풍산군 양호공 심공 신도비명 병서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 세자사 남곤은 글을 짓고 통정대부 승정원 도승지 겸 경연 참찬관 -9자 결- 직제학 상서원 정 김희수는 글씨를 쓰다. (후략) ▲ 심응 묘소 전경
▲ 심응 신도비
▲ 심응 신도비 이수(전면) 시대 : 조선 연대 : 1524년(중종19년) 유형/재질 : 비문 / 돌 문화재지정 : 비지정 크기 : 높이-164cm, 너비-95cm, 두께-25cm 출토지 : 경기도 김포시 운양동 소재지 : (한국)-경기도 김포시 운양동 서체 : 해서(楷書) 찬자/서자/각자 : 남곤(南袞) / 김희수(金希壽) / 미상
이수 앞면에는 용 두마리가 여의주를 받치고 있는데 한 마리는 입을 벌리고 있으며, 뒤에는 용 한마리가 여의주를 바라보고 있으며, 또 한 마리는 구름사이로 숨어 몸통과 꼬리만 보이고, 측면에는 운문(雲紋)의 각(刻)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신도비의 좌대가 앞면이 파손되어 11m 뒤 땅에다 그냥 세워두고 있으며 비(碑)의 자획(字劃)이 작고 가늘어 마멸이 심해 반 이상 판독이 난이하다. ▲ 심응 신도비 전면(탁본)
심응(沈膺) 1433(세종 14)~1504(연산 10) 본관은 풍산(豊山), 상주목사(尙州牧使) 진(眞)의 아들이다. 음보(蔭報)로 출사하여 변방방어에 힘쓰다가 세조(世祖)때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세조 13년(1467)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조석문(曺錫文), 어유소(魚有沼) 등과 함께 반군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되어 풍산부원군에 봉해졌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양호(襄胡)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