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공파(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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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판서공 휘 선(判書公 諱 愃)

  2) 대제학공 휘 승용(大提學公 諱 承用)

  3) 상락군공 휘 후(上洛君公 諱 厚)

  4) 군사공 휘 칠양(郡事公 諱 七陽)

  5) 김 진(金 塡)

  6) 김 돈(金 墩)

  7) 김삼노(金三老)

  8) 김 곤(金 坤)

  9) 김석정(金石精)

10) 김윤정(金允精)

11) 김 지(金言止)

12) 김언정(金彦禎)

13) 김 진(金 珍)

14) 김계선(金繼先)

15) 김 양(金 壤)

16) 김정일(金鼎一)

17) 김 경(金 坰)

18) 김인량(金寅亮)

19) 김익량(金翼亮)

20) 김두남(金斗南)

21) 김 감(金 堪)

22) 김영수(金永綬)

23) 김광국(金光國)

24) 김회빈(金晦彬)

25) 김인호(金寅浩)

26) 김계로(府使公 金季老)

27) 김 질(忠順衛公 諱 石質)

 

본문

p02.png 16) 김정일(金鼎一) [1562 ~ 1609](명종17~광해원년)

 

자는 의중(義中) 호:농포(農圃) 성균관 진사, 선조조 문과급제, 官 : 成均館典籍, 唐將接伴使, 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注官, 司憲府持平, 中國書狀官, 경기도敬差官, 충청도御史, 예조정랑, 공주判官, 등을 역임하고 함경도(咸鏡道) 도사(都事)가 되었으나 사직하고 본가(本家)로 돌아왔다.

 

월정(月汀) 윤근수(尹根壽)의 문인(門人)으로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 용주(龍洲) 조경(趙絅),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 등과 교류하였다.

묘비명 :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撰, 이조판서(吏曹判書) 이정영(李正英) 書

配 : 道康金氏 (父 : 牧使 福億, 祖父 : 牧使 若默)

청음집(淸陰集)과 만은유고(晩隱遺稿) 홍주화(송시열의 제자)에 농포(農圃) 김정일(金鼎一)에 대한 만사(輓詞)와 제문(祭文)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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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소 사진 (2004. 3.3. 발용(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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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묘비 사진 (2004. 3.3. 발용(군) 제공)

 

 

『국역국조인물고』 내의 자료 (2004. 5. 30. 윤식(문) 제공)

 

김정일(金鼎一) 묘갈 (2005. 1. 28.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총간

淸陰先生集卷之三十二

墓碣銘 十一首

 

司憲府持平金君墓碣銘幷序 君諱鼎一。字羲重。新羅敬順王之後。敬順王入高麗爲儀賓。徙籍安東。子孫遂爲安東人。五傳至方慶。征討有功。封上洛公諡忠烈。事載麗史。號爲名臣。上洛之子?(선)。密直司事。密直之子承用。寶文閣大提學。大提學之子厚。襲封上洛君。圭組聯綿。?爲大家。我太祖朝知遂安郡事七陽生塡。寶文閣直提學。生三老?山縣監。生?(우)長興庫主簿。是爲君之高祖。曾祖諱允剛。祖諱夏祥。俱不仕。考諱壤。折衝將軍龍?衛護軍。居鄕以孝聞。娶淸州慶氏。生君於嘉靖壬戌。自幼嗜書。每有文會。曹偶推居前列。戊子。中司馬。己亥。登文科。隷成均館學諭。例陞典籍。屢遷工曹佐郞,世子侍講院司書兼春秋館記注官。兵曹佐郞。辛丑。擢拜司憲府持平。遞爲正郞刑禮兩曹者各再。以巡檢御史使龍灣。以敬差官往端川監採銀。與鄭弘翼爲代還。又以敬差官出圻甸。以御史出湖西。皆視災傷。數年之中。往返道路計六千餘里。未嘗言勞?。乙巳。左降公州判官。州本劇部。彫?已久。適移設監營于本州。去牧使。以判官代之。其治視舊尤難。人多規避。時權倖用事。盡逐異己。君 無要路迹。名爲?柬而實?之。君不以遷客自居。悉心營職。上下相安。去後吏民追思之。戊申。戶曹正郞。咸鏡道都事。親?棄歸。散秩卽閑。己酉六月二十四日。以疾終於家。得年四十八。是年九月二十四日。從葬坡州先塋下酉向之原。君性?厚。不設城府。不事交游。不衒飾以求名譽。居官處事。寧拙毋巧。寧緩毋驟。以故少赫赫聲。然與人交。一定不易。當世道?變。出入榮?之際。終始無貳色。此其所以立也。父母俱老壽。家貧以色爲養。朝夕依依膝下。不忍去須臾。俸祿之外。不別治生。家人告?。笑曰。有自然之道爾。不見其憂歎。疾病謂其子曰。二尊人在堂。而不得終養。吾死不瞑目。聞者悲之。配金氏。系出康津。牧使福億之女。名有婦德。事舅姑盡禮。敎飭諸子。義方?然。君亡。哭泣成疾。服?猶喪食。後四年壬子歿。合葬君墓。生二男五女。男長坰。文科掌令。恬靜好山水。求爲淸風郡守。次堪中司馬。授察訪。女長適李克匡。次洪時建,尹?,趙必久,金地西。淸風三男三女。曰寅亮。通津縣監。曰翼亮。曰允亮。女壻洪碩亨,尹壽益,李重熙。察訪二男三女。曰聲亮。曰鳴亮。女壻洪時顯,宋仁卿。季未行。李克匡二男七女。曰奎老持平。曰斗老。洪時建五女。尹?無后。趙必久一男一女。男相周。金地西二男三女。曰世柱。曰漢柱。女皆嫁簪纓家。寅亮三男二女。長?( )。翼亮二男。聲亮三男一女。餘幼。?一男。內外曾孫男女若干。往年淸風以書乞銘。許而未就。忽焉棄世。其孤寅亮能繼父志。請之愈懇。余不忍已諾於逝者。老病昏?。收涕而爲銘。詞曰。 閼智?之。味鄒國之。麗之統一。王傅伏之。上洛接之。寶文牒之。種必穫之。始宜復之。培之?之。君子借之。筆之石之。來者式之。

 

형태서지

권수제목 : 淸陰先生集. 판심제 : 淸陰先生集, 간종 목판본 : 간행년도 1654年頃刊. 권책 : 40권 16책, 행자의 수 : 10행 19자, 반곽의 크기 : 19.8×15.3(㎝), 어미 : 上下花紋魚尾, 소장처 : 서울대학교 규장각, 도서번호 : 經古819.53-G425C, 총간집수 : 한국문집총간 77

 

저 자

성명 김상헌(金尙憲). 생년 1570년(선조 3). 몰년 1652년(효종 3). 자 叔度. 호 淸陰, 石室山人, 西磵老人. 본관 安東. 시호 文正

   

 

역문

출전 : 국역 국조인물고 제5집 295쪽~299쪽

묘갈명(墓碣銘) 김상헌(金尙憲) 지음

 

군은 휘(諱)가 정일(鼎一)이고, 자(字)는 의중(義中)이고,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이다. 경순왕은 고려에 들어와 의빈(儀賓 왕의 사위)이 되어 적(籍)을 안동(安東)으로 옮겼는데, 자손들이 마침내 안동 사람이 되었다.

 

오대(五代)를 거쳐 김방경(金方慶)에 이르러서 몽고와 왜구 등을 정벌한 공으로 상락군 개국공(上洛君開國公)에 봉해졌고, 시호는 충렬(忠烈)인데, 이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명신전(名臣傳)에 나온다. 상락공(上洛公)의 아들 김훤(金小宣)은 밀직사사(密直司事)를 지냈다. 밀직의 아들 김승용(金承用)은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을 지냈다. 대제학의 아들 김후(金厚)는 상락군(上洛君)에 세습으로 봉해져 관작이 이어져 마침내 큰 집안을 이루었다.

 

우리 태조조(太祖朝)에 지수안군사(知遂安郡事) 김칠양(金七陽)은 김전(金塡)을 낳았는데, 김전은 보문각 직제학(寶文閣直提學)을 지냈다. 직제학은 김삼로(金三老)를 낳았는데, 김삼로는 토산 현감(?山縣監)을 지냈다. 현감은 김우(金?)를 낳았다. 김우는 장흥고 주부(長興庫主簿)를 지냈는데, 이분이 군의 고조(高祖)이다. 증조의 휘(諱)는 윤강(允剛)이고, 조부의휘는 하상(夏祥)인데, 모두 벼슬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휘 양(壤)인데, 절충장군 용양위 호군(折衝將軍龍?衛護軍)을 지냈으며, 고을에서는 효자로 알려졌다. 김양(金壤)은 청주 경씨(淸州慶氏)를 맞이하여 가정(嘉靖 명 세종의 연호) 임술년(壬戌年 1562년 명종 17년)에 군을 낳았다.

 

군은 어려서부터 책읽기를 즐겼는데, 매양 문회(文會)가 있을 때마다 동류를 추대하여 전열(前列)에 앉혔다. 무자년(戊子年 1588년 선조 21년)에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고, 기해년(己亥年 1599년 선조 32년)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成均館學諭)에 배속되었다가 의례히 전적(典籍)에 올랐으며, 여러 번 자리를 옮겨 공조 좌랑(工曹佐郞), 세자시강원 사서(世子侍講院司書)와 춘추관 기주관(春秋館記注官)을 겸하였고, 병조 좌랑(兵曹佐郞)을 지냈다. 신축년(辛丑年 1601년 선조 34년), 군은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뽑혀서 제수되었다가 체직되어 형조(刑曹), 예조(禮曹)의 정랑이 된 것이 각각 두 번이다. 순검 어사(巡檢御史)로 용만[龍彎 의주(義州)]에 사신을 갔고, 경차관(敬差官)으로 단천(端川)에 가서 은(銀)을 캐는 것을 감독하다가 정홍익(鄭弘翼)과 교체되어 돌아왔다. 또 경차관으로 기전(圻甸 경기)으로 나갔고, 어사(御史)로 호서(湖西)로 나갔는데, 모두 재상(災傷)을 살피게 한 것이었다. 몇 년 사이에 오고 간 길이 어림잡아 6천여 리(里)나 되는데도 일찍이 군은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을사년(乙巳年 1605년 선조 38년)에 좌천되어 공주 판관(公州判官)으로 나갔는데, 공주는 본래 중요한 지역으로 피폐한 지 이미 오래 되었으며 마침 공주에다 감영(監營)을 옮겨 설치하였으므로 목사(牧使)를 없애고 판관(判官)으로 대체하였다. 그 다스림이 옛날에 비하여 더욱 어려워져 사람들은 대체로 피할 것을 생각하였는데, 이때 임금의 총애를 받은 사람들이 일을 주도하여 자기들과 뜻이 다른 자를 모두 축출하였다.

 

군은 본디 요로(要路)에 추적한 일이 없었는데도 선택되었다고 이름하여 실제는 물리쳐낸 것인데, 군은 천객(遷客)으로 자처하지 않고 맡은 직분에 마음을 다하여 상하가 서로 편안하였으므로 군이 떠난 뒤에 관리들과 백성들은 군을 돌이켜 생각하였다.

 

무신년(戊申年 1608년 선조 41년)에 호조 정랑(戶曹正郞)을 거쳐 함경도 도사(咸鏡道都事)로 나갔다가 어버이 병환이 있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산질(散秩 실제로 맡은 일이 없는 품계)로 곧 한가해졌다. 기유년(己酉年 1609년 광해군 원년) 6월 24일에 병으로 집에서 생을 마쳤는데, 나이는 48세였다. 이 해 9월 24일에 파주(坡州) 선영 아래 유향(酉向)의언덕에 묻혔다. 군의 성품이 침착하고 중후하여 남과 경계를 두지 않았고 서로 사귐을 일삼지도 않았으며, 과장해 꾸며 명예를 구하지도 않았는데, 관직에 나아가 업무를 처리함에 있어 차라리 옹졸할지언정 기교를 부리지 않았고, 차라리 느리게 할지라도 서두르지 않았다. 이런 까닭으로 군은 혁혁한 이름은 거의 없었지만, 그러나 사람과 사귐에 한번 정하면 바뀜이 없었고, 세상의 도(道)가 변천될 때를 당하여 드나들며 영화롭고 고달팠던 즈음에 처음부터 끝까지 다른 기색이 없었으니, 이것이 군의 수립한 바이다.

 

부모가 모두 오래 살았고 집안은 가난하였지만, 안색을 살피며 화락하게 봉양하여 아침저녁으로 자리를 비우기 안타까워 어버이 곁을 잠시도 차마 떠나지 않았으며, 녹봉(祿俸) 외에는 따로 생업을 영위하지 않았는데, 가인(家人)이 양식이 모자란다고 고하면 군은 웃으면서 이르기를, “자연의 도리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면서 근심하고 한탄함을 드러내지 않았고,병이 나자 그 자식에게 이르기를, “부모님이 아직 살아 계시는데, 임종하실 때까지 봉양하지를 못해, 나는 죽어도 눈을 감지 못하겠다.”라고 하자, 듣는 이들이 이를 슬퍼하였다. 부인은 강진 김씨(康津金氏)로 목사(牧使) 김복억(金福億)의 딸인데, 부덕을 갖춘 것으로 알려졌으며, 시부모를 섬김에 예를 다하였고, 여러 자식들을 가르침에 의방(義方 가르치는 방법)이 한층 더 뛰어났는데, 군이 죽자 부인은 슬피 곡하며 울다가 병이 되었으며 삼년상을 마치고도 오히려 상식(喪食)하였다.

 

4년이 지난 임자년(壬子年 1612년 광해군 4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군의 무덤에 합장되었다. 2남 5녀를 낳았는데, 큰아들 김경(金坰)은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장령(掌令)이 되었다가, 성질이 차분하고 산수를 좋아하여 외직(外職)을 청원해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되었다. 작은아들 김감(金堪)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찰방(察訪)에 제수되었다. 장녀는 이극광(李克匡)한테 시집갔고, 차녀들은 홍시건(洪時建), 윤병(尹?), 조필구(趙必久), 김지서(金地西)에게 시집갔다. 청풍 군수는 3남 3녀를 낳았는데, 김인량(金寅亮)은 통진 현감(通津縣監)을 지냈고, 차남은 김익량(金翼亮), 김구량(金久亮)이며, 사위는 홍석형(洪碩亨), 윤수익(尹壽益), 이중희(李重熙)이다. 찰방은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성량(金聲亮), 김명량(金鳴亮)이고, 사위는 홍시현(洪時顯), 송인경(宋仁卿)이고, 막내딸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이극광(李克匡)은 2남 7녀를 낳았는데, 첫째 이규로(李奎老)는 지평(持平)을 지냈고, 둘째는 이두로(李斗老)이다. 홍시건(洪時建)은 5녀를 낳았다. 윤병(尹?)은 후사를 두지 못했다. 조필구(趙必久)는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조상주(趙相周)이다. 김지서(金地西)는 2남 3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세주(金世柱), 김한주(金漢柱)이고, 딸은 모두 지체 높은 집안으로출가하였다.

 

김인량(金寅亮)은 3남 2녀를 낳았는데, 큰아들은 김미(金?)이다. 김익량(金翼亮)은 2남을 낳았고, 김성량(金聲亮)은 3남 1녀를 낳았다. 나머지는 어리다. 김미(金?)는 1남을 낳았다. 안팎의 증손 남녀는 약간명이다. 지난 해 청풍 군수(淸風郡守)가 서신으로 비문에 새길 글을 청하기로 허락을 하였었는데, 뜻을 이루지 못한 채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그 아들 김인량이 능히 아버지의 뜻을 이어 그것을 청함이 더욱 간절하므로, 나는 이미 떠난 사람에게 허락했던 것을 차마 어찌하지 못하여 늙고 병들어 눈도 어두웠지만 눈물을 거두고 명(銘)에 대한 글을 다음과 같이 쓴다.

 

알지(閼智)가 금궤[金?]에서 나왔고 미추(味鄒)가 국왕이 되었는데, 고려가 통일하자 경순왕(敬順王)이 복종하였네. 상락군[上洛君 김방경(金方慶)]이 계승하였고, 보문각 대제학[寶文閣大提學 김승용(金承用)]은 사첩(史牒)에 올랐네.

씨뿌리면 반드시 거두는지라 처음으로 마땅히 회복될 것이라 여겼는데, 북돋우었다가 막아 버리니 군자는 애석하게 생각하네. 비명 써서 돌에 새기나니 앞으로 후세에 경의를 표하리라.

 

김훤(金小宣瑄) : ‘선’, ‘훤’ 두 음 가운데 번역자가 우리 문중의 관습에 정통하지 않아 ‘훤’으로 번역한 것으로 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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