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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字)는 수임(秀任), 호(號) 부가(浮家), 부휴재(浮休齊). 정묘(丁卯) 진사(進士). 관(官)은 세마(洗馬)에 이르렀다. 배(配)는 김제조씨(金提曺氏)이며 묘는 태인(泰仁) 고현내(古縣內)수천동(水川洞) 유좌(酉坐)이다. 정읍의 송산사(松山祠)에 배향되었다.
세계: 칠양(군사공) - 塡 - 三老 - 瑀 - 允剛 - 夏詳 - 壤 - 鼎一 - 감(堪)
송정(松亭) : 전북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산 4
조선조(朝鮮朝)의 광해군(光海君) 때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抗訴)한 세속 7광(七狂)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어지러운 세상에 벼슬을 버리고 세월을 보내던 곳이다. 이곳 정읍 칠보면은 公의 외가로 외증조부 양주목사(楊州牧使) 청백리 김약묵(金若默) 도강(道康-康津의 옛이름)인으로 호는 성재(誠齋)이며 외조부목사(牧使) 김복억(金福憶)은 농포(農圃) 김정일(金鼎一)의 장인(丈人)이다. 성재(誠齋) 김약묵(金若默), 증손 명천(鳴川) 김관(金灌: 10賢)은 고운 최치원, 불우헌 정극인과 함께 무성서원(사적166호: 숙종22년(1696)사액)에 배향되었다.
公値丙子亂勤驛卒誓以同死於南漢圍中入水原山城作短律曰一年將盡亂離中白首從軍意轉雄北望孤城消息斷不知誰是大元戊卒至誠下之盟斥和不得率妻拏致仕題詩東門上曰北岳山猶舊人間事不同明詩那忍哭掩淚出城東遂隱於錦大山時下晩而喜易手植五松以保晩節至今人稱其松曰察訪松與宋곤庵諸賢會于泰仁詩山松亭修契其後承旨金應均跋 松亭圖領相金鍾秀撰 七狂國序士林仰墓配享松山洞
송정(松亭)
전북문화재133호 조선조(朝鮮朝)때 광해군(光海君)의 폭정(暴政)과 폐모사건(廢母事件)에 항소(抗訴)한 세속 7광(七狂) 10현(賢)들이 뜻을 이루지 못하자 벼슬을 버리고 이곳에 모여 음풍영월(吟風詠月)하며 세월을 보내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가르켜 7광과 10현이라고 불렀다.
7광(七狂)
김대립(金大立), 김응윤(金應贇), 김 감(金 堪),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 이상형(李尙馨), 이 탁(李 倬)
10현(賢)
김응윤(金應贇), 김 관(金 灌), 김 감(金 堪), 김 급(金 汲), 송치중(宋致中), 김우직(金友直), 송민고(宋民古), 양몽우(梁夢禹), 이 탁(李 倬), 김 정(金 鼎).
후송정(後松亭)
송정(松亭) 아래 산 허리의 바위 위에 있다. 고종(高宗光武3年) 때인 1899년에 화개헌(和介軒) 김직술(金直述)이 처음 지었다. 원래는 송정의 10현(賢)을 추모한다는 뜻에서 十송정이라 불렀는데 언제부터인지 후송정이라 했다. 1985년에 다시 중수하였고 바위 위에 후송정 42원비(員碑)를 세우기도 했다.
송산사(松山祠)
1788년(正祖 12年) 창건하여 김대립(金大立) 김응빈(金應嬪) 김정(金鼎) 김감(金堪) 김급(金汲) 송치중(宋致中)을 향사(享祠)하였는데 1868년(高宗 2年 戊辰)에 훼철되었다가 1954년 송산(松山, 詩山里)에서 성황산(城隍山) 동편에 중건(重建)하였다.
소재지 : 정읍시 칠보면 시산리 산 4
영모당(影慕堂)
송정 10현도(松亭 十賢圖)를 모신 곳이다. 1898년(松亭 十賢圖)에 창건하였다. 일명 송정영당(松亭影堂)이다. 광해 난정(光海亂政)에 항소(抗疏)하고 벼슬을 버리고 나와 이곳에 모여 나라를 염려하는 뜻있는 사람들이었으니 이를 가리켜 7광10현(七狂十賢)이라 한다. 후손들이 영당(影堂)을 세우고 7광도(七狂圖)와 10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중정(中丁)에제사 지냈다. 10현(賢)의 영상을 송민고(宋民古)가 그렸는데 근세에 와 정산(定山)채용신(蔡龍臣)이 다시 모사한 것이다.
김감 묘갈명(2005. 1. 28. 주회(안) 제공)
출전 : 한국문집 총간. 敬庵先生遺稿卷之十
碑銘 : 경암(敬庵) 윤동수(尹東洙) 찬. 議政府 侍講院事全州 李載現 찬. 奎章閣 副提學延安 李炳觀 서. 墓碣銘
察訪金公墓碣
嗚呼。丙丁之事。尙忍言哉。腥塵漫天。至有城下之盟。於是慷慨而殺身者有之。亦有棄官長往。以守其志者。如故察訪金公是也。公早喪?恃。克自奮發。丁卯。選上庠。俄授禁府都事。轉長興庫直長。甲戌。爲省峴察訪。丙子冬。虜兵猝至。南漢被圍。公自任所。從軍入援。及講和軍罷。隨入京城。慨念時事。有詩曰。北岳山猶舊。人間事不同。明時那堪哭。掩淚出城東。遂退居于錦山之大山邨。不復仕進。自號浮休齋。蕭散林泉三十餘年。以崇禎壬寅十二月十三日而終。距生年庚寅十月十二日。爲七十三年也。如公者。沒身遯世。高風凜然。與捐身殉節者。雖有生死之殊。而其皎皎之志。則初無異致也。錦之章甫。曾有祭社之議。鳩材經紀。而以力綿不果就。然其志?節義之爲人景慕如此。公諱湛。字季任。安東人。新羅忠順王之後也。蟬冕相繼。而在勝國。則上洛公方慶最著。入我朝。有諱?(우)。仕至寶文閣直提學。於公爲七世祖也。高祖諱允剛。曾祖諱夏祥。皆隱德不仕。祖諱壤。副護軍。以孝聞於鄕。考諱鼎一。登文科。官至司憲府持平。性恬淡自守。淸陰金文正公銘其墓。?淑人康津金氏。牧使福億之女。有婦德。配金堤趙氏。主簿成立之女。生卒先後於公一年。與公同葬于泰仁古縣內水泉洞卯向之原。有二男三女。男曰聲亮,鳴亮。洪時顯,趙必濟,宋仁卿。其壻。趙進士。聲亮二男。?( ),?( )。鳴亮一男曰 ▼(土+厚)。其曰得吉,得先。庶出也。洪啓遠,趙相如,相老,宋錫。外孫也。相老。進士。?之男曰漢南。?之男曰以南。壻曰趙汝達。▼(土+厚)之男曰重南,大南。壻曰李徵憲。進士。南成夏,李必坤。餘不盡載。公之子若孫。擧多流轉早夭。惟大南。能自振發於飄蕩?獨之中。勤身力作。以成其家。一日。以我族叔父正言公之狀公者。來示余曰。吾曾祖。丙子變後。卷懷以終。子孫因以零替。行跡之可述可傳者。一倂遺逸。墓寄遐鄕。非但樵牧之幾不能禁。又幾何而將不知爲誰人之葬也。今則孤露餘喘。惟不肖在耳。欲圖竪表於墓前。願有以記之。余以不文辭。其言益懇。竊念今距公歿之年。甲子一周而又過十稔。文獻亦且無徵。其言行事迹之懿。實難得以道其詳矣。雖然。論人之道。觀其大體。餘可略也。噫。當冠?易處之日。人幾恬然不知爲恥。而公獨超然遠引。蟬?塵界。其高節貞操。當於古人中求之。觀於公詩及事則可知已。惟此可足傳遠。又奚以多爲哉。遂取正言公狀文。略加節刪。而係以銘曰。 凜凜乎其蹈海之志。??乎其掛冠之行。非義無以識恥惡之正。非勇無以堅介石之貞。惟其高節之邁倫。足以立懦而廉頑。有樂斯邱。衣冠是藏。我文雖短。公名自長。
형태서지
권수제목 : 敬庵先生遺稿 판심제목 : 敬庵遺稿 . 간종 활자본 : 목활자. 간행년도 : 1916年刊 . 권책 原集 : 11권, 紀實 합 6책 . 행자의 수 : 10행 20자. 반곽의 크기 : 22.6×17(㎝) . 어미 : 上下白魚尾 . 소장처 :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 도서번호 D1-A72 . 총간집수: 한국문집총간 188
저자
성명 윤동수(尹東洙)
생년 1674년(현종 15).몰년 1739년(영조 15) . 자 大源, 士達 . 호 敬庵 . 본관 坡平
안사연의 송산사 참배
안사연의 제 7회 여름캠프(2008. 8. 15--8. 17) 기간에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를 답사하고 참배한 내용입니다.
<8월 17일(일)>
아침 일찍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에 도착해 <무성서원>을 둘러보고, 인근의 <태산선비문화사료관>에서 사료관에 근무하시는 안성렬님의 안내를 받아 사료관의 전시물을 관람하고 성황산 동쪽에 있는 송정(松亭)으로 올라갑니다.
송정(松亭)은 광해의 폐모에 항소한 세속 7광(狂)과 10현(賢)을 기리는 영당으로 군사공의 9세손 부휴재공 휘 감(堪)께서 이곳에봉안되어 있습니다.
송산사(松山祠)는 1788년 창건하여 부휴재 휘 堪, 김대립, 김응윤, 김급, 김정, 송치중을 향사하였는데 고종 때 훼철되었다가 1954년 성황산에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후송정(後松亭)은 조선 고종 때 송정 10현을 추모하여 지은 정자로 1985년 새로 고쳐 지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