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공파(칠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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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판서공 휘 선(判書公 諱 愃)

  2) 대제학공 휘 승용(大提學公 諱 承用)

  3) 상락군공 휘 후(上洛君公 諱 厚)

  4) 군사공 휘 칠양(郡事公 諱 七陽)

  5) 김 진(金 塡)

  6) 김 돈(金 墩)

  7) 김삼노(金三老)

  8) 김 곤(金 坤)

  9) 김석정(金石精)

10) 김윤정(金允精)

11) 김 지(金言止)

12) 김언정(金彦禎)

13) 김 진(金 珍)

14) 김계선(金繼先)

15) 김 양(金 壤)

16) 김정일(金鼎一)

17) 김 경(金 坰)

18) 김인량(金寅亮)

19) 김익량(金翼亮)

20) 김두남(金斗南)

21) 김 감(金 堪)

22) 김영수(金永綬)

23) 김광국(金光國)

24) 김회빈(金晦彬)

25) 김인호(金寅浩)

26) 김계로(府使公 金季老)

27) 김 질(忠順衛公 諱 石質)

 

본문

p02.png 6) 김 돈(金 墩) 1385(우왕11)∼1440(세종22)

 

조선 초기의 문신·과학자. 할아버지는 참의 후(厚)이며, 아버지는 칠양(七陽-군사공)이다.

 

1417년(태종 17)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직제학과 승지를 거쳐 벼슬이 참판·좌승지·인순부윤(仁順府尹)에까지 이르렀다. 세종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의 이름을 듣고 불렀으나 사양하였다.급제하자 임금이 “내가 경을 보고자 하였으나 경이 나를 피하더니 이제는 나의 신하가 되었구나!”라고 기뻐하였다 한다. 1428년(세종 10) 왕명으로 《서한이하역대보계도 西漢以下歷代譜系圖》를 찬진하고, 종학박사와 사성을 역임하였다. 1434년(세종 16)에 필체가 좋아서 집현전 직제학으로서 그가 쓴 글로 동활자인 갑인자의 주조에 참여하였는데 속칭 위부인자(衛夫人字)라 하였다. 이듬해(1435년)에는 집현전 부제학으로서 불교의 폐단에 대하여 왕에게 상소하였고, 그 뒤 부승지가 되었다.

 

1438년 도승지가 되었으며,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 여러 차례 외직을 원하였으며, 특히 역마를 보내어 탐라에 있는 어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봉양할 정도로 효성이 지극하였다.한편, 천문관측에 정통하여 간의대(簡儀臺)와 보루각(報漏閣)을 만들 때도 참여하였다. 한때 귀양가는 이숙번(李叔蕃)이 순금띠를 주면서 자신의 구출을 의뢰하자, 여러 방법으로 구출을 모색하였으나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세종의 명으로 김조(金兆)와 함께 천추전(千秋殿) 서편 뜰에다 흠경각(欽敬閣)을 창설하고, 종이를 뭉쳐서 산을 만들되 높이가 일곱자 되게 하고, 또 그 안에 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여 바퀴물로써 돌게 하였는데, 해의 도수와 그림자 누수(漏水)의 시각이 하늘의 운행과 조금의 차이도 없었다고 한다. 산의 사방에는 사시(四時)의 경물(景物)과 사람·새·짐승·초목의 형상을 만들어 그 절후에 맞추어놓아 백성이 농경의 어려움을 알도록 하였다. 또, 누기(漏器)를 설치하고 이름을 ‘보루각’이라 하고 이층으로 만들어 삼신(三神)을 그 위에 설치하였는데, 시간을 알릴 때는 종을, 경(更)을 알릴 때는 북을, 점(點)을 알릴 때는 징을 울리게 만들었다.

승지로 7년 동안이나 있으면서 논변이 상세하고 분명하였으며, 집현전출신으로 박학다식하고, 특히 과학기기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학자이었다.

 

   

 

김돈의 사위 성윤문(成允文)에 대하여

 

세조(世祖)3년(1457년)에 친시(親試) 을과3(乙科3)에 입격한 자로 자(字)는 경무(景武)이며 본관(本貫)은 창녕(昌寧)이다. 특별시(特別試. 병술1466(丙戌1466))에 올라 통사랑(通仕郞)을 거쳐 병조참판(兵曹參判)에 이르렀다.

   

 

김돈의 아들 김계로의 장인 함부림(咸傅霖)

 

1360(공민왕 9)∼1410(태종 10). 고려말 조선초의 문신.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윤물(潤物), 호는 난계(蘭溪). 검교중추원학사(檢校中樞院學士) 승경(承慶)의 아들이다. 1385년(우왕 11)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검열(藝文檢閱)을 거쳐 좌정언으로 승진하였다.1389년 공양왕이 즉위하자 헌납으로 승진하여 정지(鄭地)·이림(李琳)·왕안덕(王安德)·우인열(禹仁烈)·우홍수(禹洪壽)등 구신들을 탄핵하다가 왕의 미움을 받아 춘주지사(春州知事)로 좌천되었으나 다시 부름을 받아 형조정랑이 되었다. 이때 중방(重房)의 무신들이 문신을 멸시하자 이에 항거하다가 파직되었다.1392년(공양왕 4)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잡자 병조정랑 겸 도평의사사경력사도사에 복직되었다. 이해 이성계 추대에 참여하여 개국공신 3등으로 개성소윤에 임명되었다.그뒤 형조의랑에 이어 대사성·좌산기상시로서 상서소윤(尙瑞少尹)을 겸하고 명성군(溟城君)에 봉하여졌다. 태종 초기에 충청도도관찰출척사·예문관제학·동북면도순문사·동북면도순문찰리사 겸 병마도절제사 겸 영흥부윤 등을 거쳐, 1404년(태종 4) 참지의정부사로서 대사헌에 올랐다. 다음해 노비변정도감제조와 경기도도관찰사를 지내고, 1406년에 계림부윤·경상도도관찰출척사를 거쳐, 다음해 다시 참지의정부사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08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가 1410년 파직되었다. 성격이 강직하여 직언을 잘하였으며, 이치(吏治)에 능숙하여 관직을 맡을 때마다 칭송을 받았다. 1405년에는 앞서 1398년(태조 7)의 제1차왕자의 난 때, 정도전(鄭道傳)과 더불어 왕자 방석(芳碩)을 옹립하였다는 혐의로 탄핵을 받은 일이 있다.시호는 정평(定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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