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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공 휘 칠양 묘소 및 묘비 (2003. 4.발용(군) 제공)
▲ 군사공 내동 재실 - 강은재
※ 전면 글씨 : 증이조참판 행 수안군사 안동김공 칠양 지묘(贈吏曹參判行遂安安東金公七陽之墓) 증정부인김씨 합부(贈貞夫人金氏 合부))
군사공 휘 칠양 묘비명(郡事公 諱七陽 墓碑銘)
공(公)의 휘(諱)는 칠양(七陽)이요 호(號)는 강은(康隱)이시니 김씨(金氏)는 안동(安東)의 대성(大姓)이라. 충렬공(忠烈公) 휘방경(諱方慶)의 현손(玄孫)이며 전법판서(典法判書) 휘선(諱?)의 증손(曾孫)이며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충숙공휘승용(忠肅公諱承用)의 손자이고 상락공휘후(上洛君諱厚)의 제삼자(第三子)이시다.
타고난 바탕이 맑고 곧았고 위엄한 거동이 단정(端正)하여 가정(稼亭) 이곡(李穀)선생에게 수업을 할제 재주가 보통이 아니었고 지혜와 계략(計?)이 보통 사람을 넘었으며 부지런히 독서(讀書)를 하며 게을리 하지 아니하였고 때로는 시부(詩賦)와 예서(禮書)를 익히시고 부모께서 기뻐하시면서 “능히 우리 가문을 보전할 것이다” 하였고 선생께서도 자랑하시기를 “나라의 그릇으로 나아갈 것이다” 하였다. 봉상시(奉常寺) 예의총랑(禮儀摠郞) 김용진(金用珍)의 따님과 혼인하니 성품이 조용하시고 재주와 덕망이 뛰어 났으며 예의(禮儀)로서 가정을올바르게 하고 의리(義利) 로서 친족을 독목(篤睦)하게 하시었다. 삼남을 낳으시니 정도(正道)를 가르치시었고 공은 과거에 힘쓰지 않으시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재종(再從)인 척약제(?若齊) 구용(九容)들과 더불어 성리학(性理學)의 정론(正論)을 강구(講究)하시다.
비록 늦게나마 한 고을에 수령을 지냈으나 참다운 충성은 태양을 꿰뚫은듯하였고 고려(高麗)의 사직(社稷)을 지키려고 천한 거동이 없었으나 이태조(李太祖)께서 예의(禮儀)를 갗추고 어진 정성으로 여러번 불렀으나 나가지 아니하시고 셋 아드님을 불러꿇어 앉게하시고 훈계하시기를 “우리는 나라에 거목(巨木)같은 세신(世臣)으로 나라의 녹을 먹었으니 마땅히 이 나라가 패하고 임금이 죽었을 때 함께 죽지 못하고 국은(國恩)의 중대함을 생각지 못했다 하더라도 망령되게 새 임금의 사랑을 구(求) 한다는 것은 이심(二心)을 품은 것이라 지하로 돌아가서 어찌 무슨 면목(面目)으로 선왕(先王)과 선조(先祖)를 뵈올 것인가. 내가 죽거든 선산(先山)에 묻되 돌을 세우지 말아서 후인(後人)들로 하여금 “아무개의 무덤이다”고 손가락질 하는일이 없도록하라. 그리고 나라의 운을 어떻게 할 것인가 너희들은 신왕을 도우러 나가는 것이 옳을 것이니라” 하시고는 선영(先塋)의 밑으로 물러 가셔서 문을 닫고 자청(自淸)하시다가 향년(享年) 사십(四十)세에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마치시어 선영하(先塋下)에 장사(葬事)하였다.
이태조(李太祖)가 이소식을 듣고 매우 통석(痛惜)하여 가선대부(嘉善大夫) 이조판서(吏曹參判)의 증직(贈職)을 내렸으며 모든 자제들은 유명(遺命)을 공손히 받들어 장남 괄(土+舌)은 진사로서 조요(早夭)하고 이남 진(塡)과 삼남 돈(墩)은 차례로 문과(文科)에 급제(及第)해서 모두 벼슬이 제학에 올랐다.
진(塡)의 일남(一男)에 삼로(三老)가 있었으니 토산현감(兎山縣監)을 지냈고 돈(墩)의 일남으로 계로(季老)가 있어 담양부사(潭陽府使)를 지냈으며 토산현감(兎山縣監)이 이남(二男)이 있었으니 장남 곤(坤)은 철원부사(鐵原府使)였고 다음에 우(?)는 장흥고주부(長興庫主簿)이며담양부사(潭陽府使)의 일남 석정(石精)은 이조좌랑(吏曹佐郞)으로 이하는 능히 다 기록하지 못한다.
남기신 경계의 말씀이 있었기 때문에 일찍이 석물을 갗추지 못하다가 수대(數代)를 지난후에 비로소 묘(墓)에 표석을 세웠으나 사백년 세월에 바람에 갈리고 비에 씻기어 형상이 이그러지고 표문이 희미해져서 지난 신축(辛丑)년에 공론을 하고 상석은 새로 갈았으나 비석을 세우는 일은 미처 하지 못했으니 후손인 봉묵(鳳?) 동묵(東?)이 단독으로 자금을 냄으로 해서 장차 돌을 구하고 묘도(墓道)에 표석(表石)을 세우려 하고 봉묵(鳳?)씨가 불초를 불러 “그 글을 지어라” 하니 중회(重會)는 그 성의에 감격하여 외람(猥濫)함도 헤아리지 아니하고 감히우와 같이 기록하노라.
단기(檀紀)四三○二年 (西紀 一九七○년)正月十六日
二十代孫 重 會 謹撰
族后孫 正 會 敬書
김칠양(金七陽) < ? ~ ? (1350 ~1420 추정)> (2002. 9. 11. 태영(군) 제공)
호는 강은(康隱)이니 안동인(安東人)으로 첨의평리(僉議評理) 후(厚)의 아들이요,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 충숙공(忠肅公) 승용(承用)의 손자요, 충렬공(忠烈公) 방경(方慶)의 현손이다.가정 이곡(稼亭 李穀)의 문인이다.
공(公)은 젊어서 부터 재주와 덕망이 뛰어났으며 일찍이 성리학(性理學)을 강구하여 목은 이색(牧隱 李穡), 포은 정몽주(圃隱 鄭夢周), 재종인 척약재 김구용(척若齋 金九容) 을 종유(從遊)하여 그 의리와 명분을 같이 하였다. 여말(麗末)에 늦게나마 수안군사(遂安郡事)를 지냈으나 고려가 망하고 이성계가 등극하자 충신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굳은 절개를 지키고 강진(康津) 금릉산(金陵山) 선묘하(先墓下)에 은거(隱居)하여 학문을 벗삼아 세월을 보냈다. 조선조에 들어와 이태조가 벼슬을 주어 누차에 불렀으나끝내 불응불취(不應不就) 하였다.
<사재명신의록> 공(公)이 아들들에게 훈계하여 이르기를, " 나는 옛 고려국의 세신(世臣)으로서 비록 나라와 함께 망하지는 못하였더라도 너희들은 학문을 닦아 충성으로 새나라의 성왕(聖王)을 돕도록 하라" 하였다. 아들 전(塡)과 돈(墩) 형제는 과연 천명을 쫓아 조세(早歲)에 등과(登科)하여 모두 제학(提學)이 되었다.<대동기문>
여말충의열전 의절편(麗末忠義烈傳 義節編)에서 옮김.
『대동기문(大東奇聞)』 내의 김칠양(金七陽) 선조님 기록내용 (2003. 12. 29. 윤만(문) 제공)
- 金七陽 - 金七陽,은 安東人이니 號,는 康隱이요 忠肅公承用의 孫이오 稼亭門人이라 麗末에 文科하야 官吏?으로 麗亡後에 隱於金陵山中이러니
入本朝하야 屢徵不起하다. <練藜記述>
- 김칠양 - 김칠양은 안동 김씨로 호는 강은이며 충숙공 승용의 손자이자 가정 이곡의 제자였다. 고려 말에 문과에 올라 이부참판을 지냈. 고려가 망한 후 경상도 금릉의 산중에 들어가 조선 조정에서 누차 불렀어도 나오지 않았다.
『연려실기술』
《출전 : (원문) 大東奇聞-全-/學民文化社/1993/卷之四 pp附10 (국역)쉽게 풀어쓴 대동기문(하) pp738/국학자료원/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