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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東人 字 일경(一卿), 號 탁청헌(濯淸軒), 성균관생원, 1687년(숙종13)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갑과(甲科)로 급제하고 헌납(獻納), 장령(掌令), 사련원헌납겸춘추관기주관(司言束院獻納兼春秋館記注官)을 역임하고 자헌대부(資憲大夫)(정2품) 예조판서겸지경연의금부사(禮曹判書兼知經筵義禁府事), 홍문관대제학(弘文館大提學),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성균관사(成均館事), 오위도총부도총관(吳衛都摠府都摠官), 세손좌빈객(世孫左賓客)에 추증.청백리(淸白吏)
墓 : 용인시 기흥읍 영덕리 직곡 하야동 신좌 유갈
墓碑銘 : 전영의정 유척기 撰, 영의정 서지수 書, 면 이조판서 조명교 書
配 : 정경부인 고성이씨
子 : 홍석(弘錫) 의영고직장(義盈庫直長)
七陽(郡事公) - 塡 - 三老 - 瑀 - 允剛 - 夏詳 - 壤 - 鼎 - 坰 - 寅亮 - 址 - 斗南
청백리 녹용에 대한 변(조선왕조실록)
1722(경종2) 10월 5일에 이조참의(吏曹參議) 이진유(李眞儒)가 장법(贓法)을 엄중히 하고 염리(廉吏)를 장려하기를 청하였다. 이어서 고(故) 목사(牧使) 김두남(金斗南)의 빙벽(氷檗)같은 조행을 천거 하면서도 그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여 조정에서 진휼(軫恤)하는 뜻을 보이기를 청하고, 고(故) 판서(判書) 윤지인(尹趾仁)의 청렴 결백한 절조를 이어서 진달하고,그 처(妻)에게 늠료(凜料)를 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모두 윤허 하였다.
1733(영조9) 12월13(경신)일에 승지 이광보(李匡輔)가 말하기를, “청렴을 장려함은 탐욕을 경계 하려는 것입니다. 청백리(淸白吏)를 오래도록 뽑지않고 있으니, 마땅히 구전(舊典)을 수명(修明)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춘제(李春臍)가 말하기를, “고(故) 헌납(獻納) 김두남(金斗南)은 염절(廉節)이 탁이(卓異)하여 주군(州郡)을 다섯번 맡았지만식량(食糧)이 자주 핍절 되었습니다. 선조(先祖)때에 자손(子孫)을 녹용(錄用)하라는 명이 있었으나, 끝내 포양(褒揚)의 은전(恩典)이 없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두남의 청백(淸白)은 내가 이미 알고 있어 바야흐로 대신(大臣)에게 순문 하였다. 했다.
1734(영조10) 8월4(정미)일에 고 헌납 김두남에게 증직하고 그 아들을 녹용할 것을 명하다. 고(故) 헌납(獻納) 김두남(金斗南)에게 증직(贈職)하고 그 아들을 녹용(錄用)할것을 명 하였다. 대신(大臣)이 김두남의 청백(淸白)한 지조를 말하며 마땅히 포상(褒賞)을 가해야 된다고 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령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