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字 : 재치(在治) 號 : 송정(松亭)
孝宗1年(1650) 成均生員이 되고 음사(蔭仕)로 서사동몽교관(筮仕童蒙敎官), 세자사(世子師), 용안현감(龍安縣監), 병마진절제도위(兵馬鎭節制都尉)를 역임하였다.
墓 : 파주읍 연풍리산 3번지 오좌 유갈
配 : 원주변씨
묘갈명 : 일찬선(逸贊善) 영가(永嘉) 김원행(金元行) 撰
현종15년 4월 7일에 호남 관사에서 운명하여 영구(靈柩)가 고향파주까지 六百里길을 올때에 각읍의 목사(牧使)와, 부사(府使)가 곡하며 만사(輓詞)로서 교정(交情)을 표(表)하였다. 외제(畏齊) 문충공(文忠公) 이단하(李旦夏)가 만사(輓詞)를 썻으며, 운구가 노성(魯城)에 도착하여서는 명제(明齊) 문성공(文成公) 윤증(尹拯)이 크게 통곡하며 만사세의(輓詞世誼)를썼으며 서울에 도착하니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과 가제(稼齊) 김창업(金昌業)이 장막을 치고 영구(靈柩)에 제문(祭文)을 올렸다.
公은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문인(門人)으로 남인(南人)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리면서 소론의 진보세력에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외제집(畏齊集)> <노가재집(老稼齋集)>
七陽(郡事公) - 塡 - 三老 - 瑀 - 允剛 - 夏詳 - 壤 - 鼎一 - 坰 - 寅亮 - 翼亮 -
김창흡 金昌翕 [1653~1722] 삼연(三淵) 문강공(文康公) 제문
김창업 金昌業 [1658~1721] 노가제(老稼齊) 제문
윤 증 尹 拯 [1629~1714] 명제(明齊) 문성공(文成公) 만사
이단하 李端夏 [1625~1689] 외제(畏齊) 문충공(文忠公) 만사
김원행 金元行 [1702~1772] 미호(渼湖) 문경공(文敬公) 비문
▲ 묘소 사진 (2004. 3.3. 발용(군) 제공)